〈 7화 〉열다섯
꿈을 꿨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대지를 걷는 꿈이었다 새하얀 대지 위에는 드넓은 우주와 별들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내려 몸을 살펴보니 지금 이 세계에 와서 얻게 된 몸을 한 채 아무런 옷조차 입지 않고서 황량한 백색의 대지 위를 방황하듯 걷고있었다.
한참을 걷던 중 넓은 공터와 같은 곳에 도착했다.
공터에는 열개 정도 될지 모르는 검은 흑요석 같은 비석들이 놓여 있었다
비석들 앞에는 비석의 숫자에 맞춘 것 같은 관들이 놓여있었는데 직접 다가가 관을 만져보니
이음새가 없어서 원래부터 하나의 구조물이었던 것 같았다
꿈속의 나는 그 관을 열어보려 손가락으로 이음새를 찾으려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자 금방 포기하곤 다른 관들을 살펴보며 걸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 있던 유일한 물건들이라 그런 건지 하나하나 살펴보며 걷던 중 맨 끝에서 다른 관들과 다르게 뚜껑이 열려있는 관을 찾았다.
열려있는 관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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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 조종석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아침부터 의미심장한 꿈이라니 옛날 소년시절의 감성을 떠올리게 하는 SF적인 꿈이었다.
조종석 모니터 한쪽을 살펴보니 모니터 위에 오버레이 되어 날짜와 시간이 나타나있었다.
2022년 2월 6일 08시 57분
내가 살던 시간대와 다른 시간대 그리고 금방 정신이 들고 가볍게 느껴지는 몸이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듯 했다.
어제 일이 꿈이었다면 친구들에게 일어나자마자 '본인 미소녀 되는 꿈꿨음ㅋㅋ 엌ㅋㅋ' 하며 보냈겠지
그래도 여덟시가 넘도록 푹 잘 줄은 몰랐다. 침대도 아닌 의자에서 누워잔거라 금방 깰 줄 알았는데
평소에 여섯시면 저절로 눈이 떠지는 몸과는 다르게 이 몸은 잠이 많은 것 같다. 성장기라면 이 정도가 보통이던가
내 기상을 눈치 챈 것인지 공중에 계속 움직임을 멈춘 채 떠있던 엘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이네요 마스터. 그렇게 푹 주무실 줄은 몰랐어요]
"응 안녕. 별일은 없었고?"
[네 어제 차원수 세 마리 이후로 아무런 생명반응도 감지되지 않았어요]
푹 잘 정도의 여유는 생긴 것 같았다.
오늘은 어제 자기 전 계획했던 대로 도시 정찰을 나가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어나니깐 갈증과 함께 배고픔이 찾아왔다.
외계인 같은 몸인 줄 알아서 식사도 안 해도 되는 완전무결한 미소녀인줄 알았는데
"엘. 이 몸은 식사도 해야하는 거야?"
[마스터의 몸은 이 별의 생명체와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니깐 요. 98%정도 유사하실거에요]
100% 순수한 인간은 아니란 건가 2% 정도 다르다면...
2%의 구성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아랫배에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 감각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도 잘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저기 엘..."
[네 마스터]
"이 슈트는 어떻게 벗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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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의 탈착은 간단했다.
어제 온도를 조절하던 손목 부근을 몇 초간 꾹 누르자 등에서 푸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몸을 타이트하게 잡고 있던 슈트의 조임이 약해지더니 슈트의 등 부분이 열리며 벗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아래가 전라였다는 건데 속옷조차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은발 미소녀의 전라라니 아래도 은색이냐구 라며 확인 할 생각도 가질 여유도 없어서 재빨리 조종석 위로 발돋움해서 조종석을 뛰쳐나갔다.
다행히 엘은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 알고 있는 듯 기체를 살짝 움직여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맨발바닥에 닿는 까슬한 콘크리트와 꾸덕한 먼지의 느낌.
어제 격납고로 들어오면서 살짝 덜 닫힌 틈을 통해 격납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격납고를 나오니 아침 햇살 덕에 눈이 부셨지만 재빠르게 격납고 옆에 무성히 자란 잡초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발밑이 거친 풀 때문에 거칠었지만 그대로 엉덩이를 내리곤 웅크렸다.
"으앗...아..."
잡초더미 속에서 전라로 방뇨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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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넘어와서 여자아이의 몸이 된 나의 몸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한 일이 전라로 야외노출 방뇨라니
아무리 평소에 뻔뻔하게 살아온 나라도 이런 일에는 수치심이 팍 들어서 방뇨를 마치자마자 자기가 무슨 일을 한건지 알고 얼굴이 붉어졌다.
거울이 없으니.. 아니 지금의 얼굴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이 주변에 생명반응은 감지되지 않았다니깐 누가 보지는 못했을 거다 정말 누가 봤다면 어제의 머리 빔을 쐈을거다.
아니 세 번 정도 쐈을 거다.
잡초더미속에서 수치심에 가득 젖어 나오자 어느새 따라 나온 것인지 엘이 격납고 입구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밑엔 생수병과 같은 튜브가 두개 놓여있었다.
[주변에선 수원지를 찾을 수가 없어서 사도 안에 있는 비상용 식수를 가져왔어요]
"응...... 고마워"
물병 중 하나를 가지고 잠깐 잡초더미속으로 다시 들어가 살짝 뒷정리를 하곤 남은 물로 손을 씻었다.
파일럿의 생리적 곤란함을 이해하고 도와준다니 정말 만능의 서브 파일럿이었다.
잡초더미속을 나오자 그때서야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이 들어 한 팔로 가슴을 가리고 다리를 모은 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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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볼까봐 호다닥 조종석으로 다시 들어와서 슈트를 입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전투 테스트를 위해 만들어둔 구 격납고 필드에는 내가 테스트를 위해 숨겨둔 요소가 하나 있었다.
전투 중 패배할 경우 갖고 있는 자금의 손실을 테스트 해볼 겸 맵을 불러올 때의 시작점에 자금을 숨겨두었다.
위치는 지금 내 기체가 있는 격납고의 뒷문 아래쪽 바닥.
게임 상에선 타일 한 칸 정도의 영역이었지만 지금 기체와의 사이즈를 비교한다면.. 아마 5m x 5m 정도의 영역이 되겠지
"엘 잠깐 따라와줄래?"
[네 마스터]
다시 기체에서 내려 조금 걸어 나와선 계속 드나들었던 격납고의 정문이 아닌 정비원용 출입구인 후문 쪽으로 도착해서 뻑뻑한 철문을 열어보려 시도해봤다.
-끼..
후문의 커다란 핸들과도 같은 금속 손잡이를 돌려봤지만 녹이 슬어있는건지 제대로 열리질 않았다.
[조금 뒤로 물러서주세요 마스터]
엘의 이야기를 듣고 잠깐 뒤로 물러서자 엘의 앞부분에서 어제 나를 스캔할 때 보여주었던 광선이 나타나 문손잡이를 한번 쓱 스캔했다.
설마 녹이거나 부숴서 여는 건가?
[거꾸로 돌리셨으니 열리지 않았던 거네요]
거꾸로 돌렸을 줄이야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끼익..
정말 손잡이를 반대로 돌려보자 조금 뻑뻑하긴 해도 손쉽게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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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납고 뒤편은 산과 철조망을 마주하는 조그마한 공터와 족구장이 있었다.
이 곳에서도 격납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족구를 좋아하는구나...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족구장을 둘러보다가 조그마한 컨테이너 박스를 찾았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던 건지 얇은 철문이 가볍게 열렸고
안은 낡은 테이블과 의자 몇 개, 그리고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축구용 팀 조끼나 정비복이 널려있었다.
피복창고 겸 흡연실이었던 것 같네
"찾았다"
그리고 정비복을 놔둔 철제선반 옆에서 생각했던 물건을 찾았다.
갈색 서류봉투에 들어있는 묵직한 지폐
테스트를 위해 맵 타일에 배치해둔 50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