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외출 (8/152)



〈 8화 〉외출

피복창고에서 50만원을 획득했다.

깔끔한 오만원권 열장이 아니라 오만원권 몇장과 만원권.. 천원, 오천 원짜리도 섞여있었다.
내가 작업할 때는 그냥 500000 으로 찍어둬서 몰랐는데 봉투에 매직으로 거칠게 적힌 글을 보자  지폐 묶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 2 정비대대 2018 족구동호회비 - 담당 :  하사 (v)'

이거 아저씨들 족구회비잖아.. 부대 이전하면서 피복창고에 놔둔걸 잊어버리고 간  같다. 김 하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돈으로 매꾸느라 난리 났겠네
벌써 4년이나 지난 돈이니 이제와서 찾으러 오지는 않겠지.


내가 했던 작업 뒤에 이런 비화가 있었을 줄은...  돈은 감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돈 봉투를 챙기고 혹시나 더 필요한  없을까 뒤져보니 피복창고였던 덕분에 남겨두고 간 상자가 몇 개 보였다.
그 안을 뒤져보니 정비복이 들어있었다. 정비복의 대부분은 남자 성인 기준으로 맞춰져서 그런지 대부분 사이즈가 커보였다. 95...100...110
전부 입을 수 없는 사이즈들뿐이었는데 상자의 맨 밑에 90짜리 한 세트가 있었다. 이거라면 입을  있지 않을까

그래도 이걸 입는다면 헐렁거려서 위나 옆에서 슬쩍 보면 속이 다 비쳐보일텐데..

락커안에 뭐가 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락커를 뒤져보니 대부분은 비어있고 찌그러져있었으나  안에서 검은색 티셔츠를 몇 벌 찾았다.


'최강의 정비태세 -제 2 정비대대-'

여름에 근무할  정비복 상의 대신 입도록 부대차원에서 허락해준 티셔츠 같았다. 나도 예전에 이런  있었지
먼지를 맞아 퀘퀘한 먼지 냄새가 올라오긴 했어도 다행히 아저씨들 특유의 땀에 찌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여벌로 갖고 있던거였나보네


파일럿 슈트를 입고 시내로 내려가면 너무 눈에 띌 테니깐 이 정비복이면 조금 특이해보이긴 해도 몸에 딱 붙는 파일럿 슈트만큼 집중이 쏠리진 않을 것이다.
근처에 공업 고등학교도 있다니깐 주말에도 나와서 실습하는 학생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일단 바로 입어보자는 생각에 파일럿 슈트를 벗고 피복창고 안에서 나신이 되었다.


아까는 너무 급한 탓에 몸을 살펴볼 일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깐 정말 새하얗고 예쁜 몸이었다. 밖에서 빛을 쐰 적이 없는 아이마냥 하얀 피부와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최근엔 쇄골까지 털이 자라서 고민이었던 아저씨의 가슴팍 대신 작게 자리 잡은 두 봉우리 그리고 그 밑으로 보이는 발가락 끝

살짝 손을 내려 아랫배와 허리선을 한번 쓸어보자 부드러운 곡선감이 느껴지며 손이 아래로 타고 내려갔다.


아 머리가 은발이니깐 아래는 무슨 색일까 하는 아저씨다운 음흉한 생각을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살짝 갈라진 틈이 보였는데..


[파일럿 슈트는 제가 보관할까요?]


"어? 어! 응 그렇게 해줘"

창고를 뒤적거리느라 잠깐 존재를 잊고 있던 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엄한 짓을 하려다가 걸린 것 같은 느낌에 손을 때선 허리 뒤에 얹었다. 흠흠

---


속옷이 없는걸 아쉽지만 일단 정비복을 입어보자 바지 밑단이 길긴 했지만 그래도 접으면 어떻게 입고 다닐 수는 있다.
허리가 조금 흘러내리려고 하긴 했는데 정비대대 아저씨가 놔두고 간 벨트가 있어서 고정시킬 수 있었다.


우와 예전엔 벨트 남는 단이 적었는데 이젠 허리를 한번 감고도 한 바퀴 더 두를 수 있겠어


그 위에 정비대대 티셔츠를 입고 작업복 상의를 걸쳤다 살짝 춥긴 한데.. 낮에만 돌아다닐거면 괜찮고
족구회 회식비용으로 시내 나가서 옷도 살거니깐 불편해도 잠깐만 입고 나가면 된다.


마지막으로 파일럿 슈트 때는 신발도 겸하는 슈트라 신발이 필요 없었지만 이 옷들을 입는다면 신발 정도는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간이 신발장을 뒤지자 몇 번 신은 흙먼지가 묻은 족구화가 몇 개 나왔다. 가장 작은걸 골라 신었는데도 헐렁하긴 한데 뛸 것도 아니고
편하게 질질 끌고 다닐 거면  정도는 괜찮겠지. 어디까지 임시니깐

옷 속이 허전한 것도 어쩔 수 없다. 임시니깐.

옷을 위부터 아래까지 세트로 갖춰 입고선 엘에게 물었다


"어떤거 같아?"

[굳이 신체 보호까지 잘 되는 파일럿 슈트 대신에 왜 그런 원시적인 옷을 입는 건지 잘 이해가 안되네요]

"음.. 이건 정찰 복이야. 시내로 내려가 볼 거거든"


[그런 의미에서라면 목적은 적합해 보이는데 조금 크지 않나요?]


"원래 임무수행은 현지조달이 원칙인 경우도 있거든"

[현지조달이라면 어쩔  없겠네요]

"그런데 파일럿 슈트는 어떻게 했어?"

아까 보관이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방금 벗어두었던 곳을 확인해보니 슈트가 사라져 있었다.


[입자 상태로 분해해서 게이트 안에 넣어두었어요]


"그렇구나... 게이트?"

게이트라면 그거 아닌가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그거

[네, 사도의 무장 중 하나인 창도 그 안에 들어가 있는걸요]

분명 스토리 후반부 까지 게이트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최종판에 추가된 추가 설정인가? 아무튼 다시 꺼낼 수도 있는거일테니 문제는 없었다.

조금 헐렁한 탓에 상의라기 보단 지퍼가 달린 자켓을 입는다는 느낌으로 정비복을 입고 마지막으로 옷걸이에 걸려있던 검은색 야구모자를 쓰고 나왔다.
지금 시간은...

[지금은 10시 17분이에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살짝 쳐다보기만 했는데 바로 시간을 알려주자 조금 감탄했다.

[유능한 서브 파일럿은 파일럿의 심리도 파악해둬야죠]

잘했다고 칭찬으로 엘의 가운데를 쓰다듬어주자  기쁜  제자리 비행을했다.

---

다음으로 확인해 볼 것은 이 몸의 체력이었다.
원래도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덩치에서 나오는 힘은 있었는데 혹시나 모를 육탄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힘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둬야 했다.


족구장 한가운데 서서 자세를 취한  가볍게 주먹을 휘둘러 봤다

- 휙

힘은 모르겠는데 몸이 가벼워서 그런지 속도 자체는 빨랐다.

- 툭

뒤로 몸을 빼며 살짝 뛰어보자 일 미터 정도 가뿐하게 뒤로 움직였다 순발력도 빠른 것 같고 지치지도 않았다.


- 파바밧

마지막으로 그 자세에서 다리를 차올려보자 높게 올라가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지금이라면 할  있을지 몰라 라이X킥 같은거..
직접 누군가와 싸워봐야 알겠지만 어지간하면 직접 싸우는 일은 피하고 싶다. 아픈 건 싫으니깐 싸움을 피하는 일에만 올인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손을 풀듯 한쪽 팔을 앞으로 뻗은  손바닥을 안으로 당기듯 까닥까닥 하며 손목을 움직였다.


[그 동작은 꼭 하실 필요가 있던거에요?]


이상하게 몸을 풀면 마지막엔 이걸 한번 해보고 싶었다.


더 놀고 있을 시간은 없고 이제 시내로 내려가봐야겠다.


"근처의 시내로 내려가볼건데.. 엘은 어떻게 할 거야?"


데리고 다니기엔 조금 눈에 띄는데


[저도 마스터와 함께 갈게요 눈에 띌까봐 걱정은 하지 마세요. 주머니 속에 들어있으면 되니깐요]

역시 유능한 서브 파일럿이다.


그렇게 말한 엘은 내 정비복 상의 오른쪽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면 자주 쓰다듬어줄  있겠네




---


격납고 앞의 활주로 쪽을 나서자 저 멀리 끊어진 펜스가 보였다.
기체를 놔두고 가도 들키진 않겠지? 누가 들어온 흔적은 계속 없었고 이따금 차원수도 나타나는 곳이니깐

기본이 비행장 활주로라 그런가 제법 먼데 저걸 다 걸어가기엔 멀어보였다. 차가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차 까지 두고갔을리는 없는 일이다.

그대로 십분쯤 걷자 마지막 격납고 까지 지나쳐 오는데 문이 부서진 격납고 한쪽 아래에 버려진 자전거를 찾을 수 있었다.
잠금장치는 없었고 이것도 역시 부대 자산이었던 것 같은데 기어는 뻑뻑한 것 같아도 비를 직접 맞지는 않았는지 녹이 별로 슬지 않아서 그걸 타고 달렸다.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맑은 공기를 쐬어보는게 몇  만이더라
곧 아까 보았던 펜스의 끊어진 부분에 도착했고 그 너머가 도로인 것을 보고 도로 옆의 인도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자

십분쯤 천천히 달려서 시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은 식사부터 먼저 해결해볼까 주변을 둘러보자 가까운 동네 백반집이 보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일요일 오전이라 그런가 손님은 아직 없던 중에 내가 들어온 첫 손님인 것 같았다.
메뉴판을 살펴보자 순대국, 해장국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빈속에 든든하게 바로 순대국을 채우기 보단
일단 가볍게 먹고 활동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잔치국수를 시켰다.

"잔치국수 하나 주세요"


"네 잔치국수요"

 아주머니가 주방 안으로 들어가시면서 국수를 준비하시는 듯 했다.
모자를 벗어서 의자 옆에 내려놓곤 일어나서 물병과 컵을 가지고  물을 한잔 마시고
손님이 오기 전 까지 아주머니가 보고 계셨던 건지 틀어져있던 티비의 뉴스를 봤다.

'어제  저수지 주변 미확인 운석체 낙하 현장 조사 중이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저거 아마 내 이야기겠지


현장 특파원이 저수지 주변을 보도하고 있었다. 무언가 떨어진 건 확실한데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게이트가 열린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주민의 인터뷰도 있었지만 차원수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며 당분간 저수지 주변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근처 주민들에겐 미안한 일을 저질렀네


"잔치국수 나왔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보던 중 아주머니가 반찬과 함께 국수 한 그릇을 가져다 주셨다


"고맙습니다."

"여기 공고 학생이야? 어려보이는데"

정비복 덕분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는 않으시는 건지 공고 학생이냐며 물어봤다

"네 아직 방학이긴 한데 실습하러 오늘 나왔어요 이래뵈도 열 여덟이거든요"


직장 다니면서 얻은 처세술은 허사가 아니었는지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나왔다.
열 여덟로 보긴 힘든 몸이었지만 대충 옷을 보고 믿어주시겠지

"어휴 부지런하네."

그렇게 이야기하시곤 곧 이어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그 손님들에게로 가서 주문을 받으셨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네


일단은 배부터 채우자


국수는 조금 따뜻한 게 빈 속에 넣기는 좋았다.
먹다보니 예전처럼 안경에 김이 서리는 일은 없어서 좋았는데 대신  머리가 조금 걸리적거렸다.

살짝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올린 뒤 국수를 먹고 있자 시선이 느껴졌다.

다른 테이블에 두 명. 아까 온 손님들일까 모습을 보니 내가 입은 야매 정비복과는 다르지만 기름때가 묻은 제대로  정비복을 입고 있었다.
정말 근처 공고 학생인걸까. 유심히 살펴보듯 내가 쳐다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뻘쭘했던지 시선이 흩어지길래 살짝 웃어줬다.

원래 어색할 땐 웃는 게 최고야.


시선이 후다닥 흩어지는걸 느끼곤 식사를 마친 뒤 벗어두었던 모자를 다시 쓰고 족구회비 봉투에서 오천 원을 꺼내 계산하고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