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화 〉외출 (9/152)



〈 9화 〉외출

아침겸 점심식사를 마치고 격납고에서 가져온 자전거는 식당 앞에 그대로 세워두고 조금 걸었다.
몇 번 걷다보니 접어둔 정비복의 바짓단이 흘러내려서 몇 번 고쳐주고 걸었더니 생각보다 이채로운 시내의 풍경이 느껴졌다.

먼저 사람들의 머리색이 다양하다.
이건 게이트가 열리면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 탓에 일어난 일종의 변이다.
사실 한국 배경이라고 죄다 검은색, 갈색 계통의 머리색이면 컬러 배치가 심심해지니깐... 넣은 설정이긴 한데
그 설정 덕분에 지금의 은발이 막 신기한 것처럼 쳐다봐지지는 않아서 좋았다. 사람 눈에 너무 집중 받는 건 언제나 질색이다.

 번째로 도로 간격이 널찍하니 좋았다.
게이트가 열리고나서 군부대나 민간 처리기업이 바쁘게 다니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도로에 세워둔 불법 주차들이 싹 사라졌다.
비상시에 도로에 주차 된 불법 주차차량은 법으로 보호받지 못한다. 덕분에 출격시 도로 정체로 이동이 힘들 일도 없고 비좁은 2차선 도로 양옆에 꾸역꾸역 대둔 차량을 안봐도 되서 너무 좋아졌다.

마지막으로 넓어진 도로 위를 천천히 이동하고 있는 병기 ...
'차세대 전술 기동 코어 내장형 대 차원 병기' 긴 이름대신 차원기라고 불리는 인간형 전투 병기다.
개발사에 따라서 여러 형태로 달라지지만 대체적으로 인간형태를 가지고 있고 이족 보행을 하는  주  스타일이다.
크기는 보통  미터 정도의 크기로 아래에서 보면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지만 사실 상대하는 차원수들을 생각하면 막 큰 사이즈는 아니다.


어제 상대했던 차원수는 고작 삼 미터 정도의 덩치인 소형종이었고 보통은 차원기와 비슷한 10m 전후의 크기를 가진다.
현대의 기술로는 저런 두발로 걷는 메카닉을 만들 수도 없었을텐데 이걸 가능하게 해준건 모두 코어 덕분이다.
차원수의 코어에서 방출되는 새로운 에너지원을 통해 물리적인 제약을 뒤틀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코어는 크기에 따라 간섭할 수 있는 힘이 다르다.
소형 코어는 사람이 직접 사용할  있지만 사람 머리보다 큰 코어는 사람의 맨몸으로 다루기 버거운 힘이다.

커다란 코어를 다루기 위해 커다란 장치를 만들고 작동시키는 실험이 성공하여 지금의 인간형 병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코어의 에너지원을 가장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 형태의 조작이다. 다른 형태로도 코어의 힘을 끌어 쓸 수는 있지만
인간형태가 가장 효율이 높다고 밝혀졌다. 코어를 매개체로 해서 사람이 탑승하여 조종함에 따라 본래의 물리력으로 불가능한 일을 행할 수 있다. 그야말로 마법과도 같은 힘이다.


저 거대한 덩치가 아스팔트 도로를 걸으면 아스팔트가 전부 금이 가고 깨질텐데 아무 일도 없는 것 처럼 소음도 내지않고 조용히 이동하는 게 바로 코어에서 오는 능력이다.


거대한 차원기 옆으로 커다란 다리가 두개 달려있고 앞에는  유리창이 달린 삼 미터 정도 높이의 기계위에 사람이 있었다.
저건 소형 코어를 통해 움직이는 간단한 탈것이다.  다리로 걷는다고 워커라고 불리는 이동 수단이다.
커다란 차원기로 아래에 있는 사람을 미처 확인하지 못할 수 있으니 안전을 위해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개발자군의 게임 속에서나 등장하던 차원기들을 실제로 볼 줄이야

내가 타고 있던 사도도 역시 굉장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게 아니라서 신기함은 좀 덜한 느낌이 있었는데
게임에서 여러  보았던 차원기들이 직접 움직이는 것을 보니 한참이나 그 자리에 멈춰서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워커에 타고 있던 운전사와 눈이 마주쳤다.


신기한 듯 올려보고 있었더니 조종사가 간단하게 손을 흔들어주길래 나도 따라서 흔들었다.

워커와 차원기가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서 쳐다보았다.

아 옛날에 놀이동산에 갔을 때 퍼레이드를 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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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는 일단 속옷부터 사기로 결정했다...

지금 정비복 안에 브라는커녕 팬티도 안입고있잖아.
정비복의 까슬거리는 감촉이 부드러워진 허벅지에 쓸릴 때마다 조금씩 아프기도 했다.
언제까지 속옷도 입지 않고 다니는 치녀가 될 수는 없으니 속옷을 살만한 곳을 찾아 걸었다.

조금 걷다보니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알고 있던 브랜드 이름과는 다르지만 뭐 비슷한 느낌이다. 입구에는 카트가 여러  있고 껌딱지가 눌어붙은 벽돌 바닥들

혹시  세계에서도 마트가 쉬는 날이 있나 걱정했는데 둘째 주인데도 영업하는 것을 보니 이 세계에는 그런 제약이 없는  같았다. 다행이다


마트 자동문을 통해 들어오니 근처에 아까 봤던 것과 비슷한 정비복을 입은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이 제법 보였다.
슬슬 점심시간이니 마트 푸드 코트에라도 들어온건가 보다. 여기서 밥 먹을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학생들이 제법 많은 게 괜한 시선을 끌 것 같았다. 동네 식당에서 먹고 오길 잘했다.


무빙워크를 타고 3층으로 올라오자 여성의류 코너가 보였다.
예전에 첫 월급을 타고 어머니 속옷을 사드리려고 간  이후로 처음와봤다. 이제는 내 속옷을 사러 오다니... 역시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일이다.


속옷 매장으로 들어오자 젊은 직원이 계산대에서 하품을 하고 있다가 나를 보자 그 하품을 빠르게 삼키고 내 쪽을 향해 비즈니스적 미소를 지었다.


"찾으시는 거 있으신가요?"

"네 속옷을 좀 사려고 하는데... 사이즈부터 재주실 수 있을까요?"

"탈의실  쪽으로 들어와주세요"

직원을 따라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안쪽의 전신 거울을 보며 정비복 상의를 벗었다.
앞에서 보면 밋밋한 검은 티셔츠지만 등짝에 '최강의 정비태세' 라고 쓰여 있는 글귀를 본 직원은 잠깐 웃음을 참듯 표정을 돌렸다.

어려보이는 여자아이가 최강 정비라니 웃음이 나올 만도 하겠지


"옷 위로 재드릴까요?"

"아뇨 이왕이면 정확하게 재는  나으니깐 직접 재주세요"


 티셔츠가 몸에  맞는 티셔츠도 아니고 헐렁거렸으니 어설프게 재는  보다 정확하게 재는 게 낫겠지 일은 전문가에게 맞기는게 베스트다.


"그러면 티셔츠 위로  들어주시겠어요?"

"네"

골반 근처까지 내려오는 티셔츠의 양 끝 자락을 잡고 들어 올리자 아무것도 입지않은  가슴이 드러났다.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에 점원이 잠깐 당황한  했지만 역시 프로다운 태도로 줄자를 써서 사이즈를 재주었다.

"75.. 힙은 옷 위로 재드릴게요"


줄자를 든 손을 내려 정비복 바지 위로 엉덩이에 줄자를 둘러 사이즈를 쟀다.


"80.."

정비복이 조금 두께가 있으니깐 이 아래에 아무것도 입은걸 들키지는 않았겠지? 안들켰을거야 제발.

"위에는 75A로 보시고 아래에는 스몰 사이즈로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어떤 게 잘 나가나요?"

점원과 함께 탈의실을 나서며 어떤 제품이  나가냐고 물었다. 잘 팔리는거로 입는게 낫겠지


"보통 위아래 세트로 사 가시는데 이런 베이지 계열이나 흰색, 검정도  나가요"

무난한 컬러들이었다. 하지만 왠지 베이지는 별로라서 흰색과 검정 기조로 몇 벌을 사기로 정했다.
흰색에 조금 레이스가 달려있고 자그마한 파란 리본이 디자인. 딱 소녀다운 디자인인데 지금의 나는 소녀니깐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를  있다.
검은  그냥 전체적으로 검정색으로 통일한 조금 프릴이 달린 디자인. 그리고 나머지 적당한 것  벌을 더 골라서 다섯 세트를 샀다.

"세트당 4만원씩 해서 20만원 인데 행사 제품도 있어서 15만원에 속에 입는 티셔츠도 세벌 드려요. 색은 어떤 거로 해드릴까요?"


"검정으로 주세요"


여자 속옷은 비싸구나 벌써 족구회비의 1/3은 썼다... 이제 남은 돈으로 옷도 좀 사고 격납고에서 먹을 것도 사야지.
속옷 코너를 나오며 자그마한 쇼핑백에 손목을 끼곤 나머지 옷을 보기 위해 여성의류 코너로 간게 아니라 무빙워크를 한  더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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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 브랜드와 SPA브랜드 매장. 이런데 는 아저씨도 자주 와봤으니깐 잘 알지. 양복입고 일하는 직업은 아니니깐 맨날 이런데서 산 청바지랑 티셔츠 또는 체크무늬 셔츠 차림이었는걸

여기서라면  벌 사더라도 아까 속옷보단 쌀거다.


"찾으시는 제품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저 점원의 매아리 같은 소리를 들으며 티셔츠 코너로 향했다.
티셔츠 하나를 집어 앞에 있는 거울에 대보면서 이게 맞는 건가 여러번 재봤다. 스몰사이즈면  맞겠네 스몰은 재고도 많고
맨날 큼직한 사이즈를 사다가 작은 사이즈를 사게 되니깐 신기했다. 큰거나 작은거나 가격은 변화가 없지만

팝  느낌의 노란색 티셔츠와 주황색 티셔츠, 검정색등 적당히 몇 벌 골라 바구니에 담고 바지를 골랐다.

바지는 겉으로 대봐도 확인이 힘드니깐 직접 입어봐야겠지

청바지는 역시 티셔츠보단 비싼 느낌이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필요 경비다. 공업고 학생도 아닌데 계속 정비복 입고 다니면 좀 이상하잖아.


청바지를 작은 사이즈와 그 위의 사이즈를 하나씩 들고 탈의실로 가서 바지를 갈아입기 위해 정비복 바지를 내리자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서 조금 민망했다. 그걸 거울 앞에서 보니깐 더욱 그랬고.

그 민망함을 떨치듯 바지를 입었는데 역시 까슬한 느낌이 힘들게 느껴져서 아까 사왔던 속옷의 택을 때고 팬티만 입은 뒤 바지를 시착해봤다.


아까 속옷코너의 점원이 잘 골라준 덕분인지 불편함도 없이 잘 맞았다. 드디어 허전한 느낌이 사라지고 안정된 느낌이 들었다.
역시 문명인은 팬티는 입고 다녀야지

작은 사이즈라 그런지 딱히 바지 단을 줄일 필요는 없어보여서 탈의실쪽 점원을 부를 일도 없었다.


시착한 바지를 벗고 다시 정비복을 올려 입고 큰 사이즈의 청바지는 리턴 바구니에 넣어두고
시착했던 바지와 비슷한 바지를 두벌정도 더 담았다.

이제 남은 건 위에 걸칠만한 자켓과 운동화.
자켓은 아까 돌아다니면서 봐둔게 있었다. 녹색의 항공점퍼.

원래도 가을쯤 되면 자주 입고 다니던 옷이었는데 이 포근함은 입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느낌이다.  주변이 허전하긴 하지만 지금은 머리도 기니깐 괜찮겠지

이것도 가장 작은 사이즈가  맞았는데 일부러 한 사이즈 큰걸 샀다. 한 사이즈 큰걸 입으니 엉덩이도 살짝 덮어주는 느낌이라 편했으니깐.
스커트도 사볼까 고민했는데 심리적인 저항감은 없었지만 지금 예산으론 빠듯하니깐... 그건  더 소녀력을 키우고 와서 구매해야겠다.

티셔츠 다섯 벌과 바지 세벌 그리고 항공점퍼에 양말도 다섯 개.. 맨 처음부터 옷을 사려니깐 돈이 엄청드네


"다해서 18만 8천원입니다. 맴버십이나 포인트 있으신가요?"

"아뇨 괜찮아요 여기서 갈아입고 나가도 될까요?"


"네 영수증 버리지 마시고 갈아입고 나가실  보여주세요"


계산을 끝마치고 한가득이 돼 버린 옷 쇼핑백도 받았다. 와 주차 하셨냐 고는 이제 안 물어보네 여기서 젊어진 기분이 팍 든다.

탈의실로 들어가 방금 구매한 점퍼와 티셔츠 한  그리고 바지와 양말의 택을때고 아까 바로 입느라 택을때었던 팬티와 세트가 되는 브라의 택도 때어냈다.
마트 의상과 SPA 브랜드로만 싹 통일하다니 이 무슨 저렴함. 하지만 이 돈은 제 2 정비대대의 소중한 회식비용이었다. 언젠가 보답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

거울 앞에 서서 정비대대 티셔츠를 벗곤 한참 브라를 차느라 수고를  했는데 예전에 어디서 들었던 팔을 먼저 넣지 말고 앞에서 훅을 채우고 돌리면 쉽다는 말이 떠올라서 입을 수 있었다.
원래 앞이 허전한건 당연한 느낌이었는데 속에서 받쳐주는 느낌이 들자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손목 보호대를 찼을때 같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거울 앞에 검정 속옷을 위 아래로 갖춰 입은 여자아이가 된 나의 모습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탈의 부스 안에 있던 작은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며 목이 조금 긴 양말을 올려 신고 청바지를 입고 티셔츠를 입은 뒤 마지막으로 항공점퍼를 걸쳤다.
싸구려 프로그래머 같은 패션인데 역시 미소녀가 입으니깐 느낌이 되게 다르다.

그리고... 여태 정비복 주머니에서 계속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엘을 꺼내 가볍게 가운데를 쓸어주었다.

"미안해... 계속 혼자 놔둬서"


사과에 대답하듯 가볍게 부르르 떨렸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대화를 나누면 이상하게 보일 위험을 알고 견뎌준걸까 정말 참한 서브 파일럿이다.
그런 엘을 내 항공점퍼의 주머니로 옮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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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대대 옷을 방금 쇼핑백에 넣고 양손이 묵직해진 채 마지막 목적지인 운동화 코너에 왔다.
이제 남은 돈은 15만원 남짓. 신발은 오만원 안에서 해결해야겠다.


4층을 돌며 운동화 매장에 도착하고 나는 그 곳에서 잠깐 멈춰 서버렸다.

목에 사원증을 걸고 손님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는 붉은 머리의 소녀.

 게임의 히로인 중 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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