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외출
서예린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히로인들 중 한명이다. 주인공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2학년 지휘과 선배다.
지휘과는 차원기를 조종하는 파일럿들을 보조하기 위한 오퍼레이터의 직무를 배우는 학과다. 상황에 알맞은 전술을 조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조종과 다음으로 입결이 높은 학과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학과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우수성을 평가할 수 있었다.
3월 이후 테러가 일어나면서 현장인력이 부족하게 되서 지휘과에서 우수한 그녀가 주인공군이 속한 부대에 배속되어 전술 지휘를 담당한다.
물론 그것은 3월 이후의 이야기였고 아직은 성실한 학생에 불과하다. 집이나 학교에서 공부만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기서 아르바이트생으로 마주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래도 서예린은 중반부 이후로 이탈도 없고 끝까지 남아있는 히로인이니 지금 조바심을 내고 구하려 들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손님과 아르바이트생 정도의 관계로 마주치는 게 좋겠지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녀도 다른 점원들처럼 매아리 치듯 접객 멘트를 날리곤 설렁설렁 주변을 걸었다.
지금 내가 사야하는건 운동화... 인데 운동화 매장이라고 꼭 운동화만 취급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한쪽에 있는 워커에 눈이 갔다.
우와 우와 워커 봐 검은색 소가죽 워커.. 발목 위 까지 올라오는 게 지금 핏으로 입으면 참 이쁠거 같은데... 옆에 있는 스웨이드 재질도 이쁘다. 관리는 힘들어 보이지만.
아쉽게도 가격표를 보고 생각을 접었다. 응 24만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족구 동호회의 사라진 회식비는 15만원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신발만 사고 땡이 아니라 며칠 뻐팅길 식사거리도 사야하고 세면도구도 사야하고.. 그러니 신발은 오만 원 내에서 승부를 봐야한다
바이바이 예쁜 워커야
그렇게 조금 낙담하곤 다시 운동화를 둘러봤다.
역시 이쁜건 가격이 좀 되네... 어플을 깔면 할인해준다고 하는데 난 어플은 커녕 지금 폰도 없어.
주머니에 카페 진동벨 마냥 들어있는 엘을 계속 한 번씩 만지작 거리면서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내 원래 스마트폰의 느낌을 그리워하며 문질러 주었다.
원래 신던 신발과 비슷한 브랜드가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비슷할 뿐 같은 브랜드는 아니었다. 아마 승리의 여신을 상징하는 로고랬나? 이 곳에선 약간 비틀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저 브랜드의 신발이 이쁘고 발도 편하고 좋았으니 이 세계에서도 통용될 거라 생각하고 적당히 둘러보자 괜찮아 보이는 운동화를 하나 찾았다.
'AXIS 01'
무난하게 하얗고 이쁜 운동화였다. 이름이 어느 세계에서 지구에서 떨어질 번한 거대한 소행성과 비슷한 어감이었지만 마침 가격도 시즌이 좀 지난 덕에 할인해서 48,000원이니 예산 안이다.
"이거 꺼내주시겠어요?"
운동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꺼내달라는 이야기를 하자 점원이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금방 다가왔다.
"네 어떤 사이즈로 꺼내드릴까요?"
다른 예쁜 운동화에 정신이 팔려서 어떤 점원이 왔는지도 몰랐는데 옆에 나보다 큰 키의 여자 점원이 서있는 것을 확인했다. 붉은 머리의 그녀 서예린이었다.
"음.. 220이랑 230 꺼내주세요"
사실 지금 발 사이즈 잘 모르겠는데 족구화 250이 작아서 덜렁거리니 그 정도면 얼추 맞겠지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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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백을 의자 옆에 내려놓고 다리를 내려 보며 살짝 다리를 까닥거리며 흔들어봤다.
다리 진짜 얇네.
지저분한 족구화가 보이면 좀 그러니깐 미리 양 족구화를 벗어두곤 조금 달라붙는 청바지 밑으로 보이는 까만 양말의 발을 살살 흔들었다.
"230부터 신어보시겠어요?"
어느새 창고에서 상자 두개를 가져온 서예린이 운동화 상자 하나를 열어 운동화의 왼쪽 발을 건네주었다 곧바로 왼발을 넣어서 신어보곤 발 뒤꿈치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아 이건 안 되겠다 너무 커 헐렁거린다
"220 줘보시겠어요?"
그녀가 알겠다며 230을 치우고 220을 꺼내던 중 무언가 본건지 내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비복... 혹시 이 근처 공고 다니세요?"
아까 옷을 갈아입으면서 맨 위에 개어 넣었던 탓에 정비복의 반사 띠가 매장 조명을 살살 비추듯 비춘 탓에 눈에 띄었으리라
"네, 주말 실습 나왔어요"
미안해요 사실 고등학생 아니야.
"와 저도 그 학교 다니는데 ...음 얼굴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아.. 그게 맨날 정비실 안에서 늦게까지 있었으니깐 못보셨을지도 몰랐겠네요 아하하.."
미안해요 저 그 학교 정비실에 있어본적도 없어요.
"그런가요? 이렇게 귀엽게 생기셨는데 아쉽네요... 죄송해요 혹시 선배는 아니시죠?"
와 귀엽데. 난 거짓말을 벌써 두 번이나 한 나쁜 사람인데
"응? 아니에요. 저 이제 2학년 올라가요 아직은 파릇한 1학년이에요"
고등학교 졸업한지 십년이 더 넘은 누우런 이파리가 돼 버린 아저씨입니다...
"진짜요? 같은 학년이네요"
"네 그러니깐 말 편하게 하세요.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인데 존대라니 서로 어색하네요"
"아 그래도 지금은 점원인데... 응 그럴까?"
전환이 참 빠른 학생이네
"응 서로 어색하잖아"
"그래 그렇게 할게 그럼. 아... 내 정신좀 봐 220 달랬지?"
뭐가 즐거운 건지 조금 웃는 그녀가 다시 일을 하려는 듯 가지고 온 220 운동화 상자를 열어서 왼쪽을 건네주었다.
이번에 발을 넣어보니 잘 맞았다. 손가락을 넣어봤는데도 아까처럼 헐렁거릴 정도로 공간이 많이 남지도 않았고 딱 적당한 느낌이었다. 내 발사이즈가 220이 되었구나.. 발 줄어든 만큼 가격도 줄어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엔 잘 맞네 나 이거로 살게. 참... 바로 신고 가도 되는 거지?"
"응 계산하고 나서 신고 가. 음... 저건 버려줄까?"
내가 아까 부끄러워서 치워뒀던 낡은 족구화를 그녀가 가리키며 물었다.
"응 아까 정비하다가 신발이 기름에 쩔어서.. 저거 신고 온 거거든"
"고생이네"
그런 가벼운 담화를 나누면서 일단 계산을 위해 운동화를 벗고 다시 족구화를 걸치고 계산대로 향했다.
"매장 어플 설치하면 만원 할인인데 어플 있어?"
".. 그것도 아까 정비하다가 고장나버려서"
"음... 그러면 내가 일단 찍어줄게. 같은 학교 학생한테 파는 거니깐 이 정도는 괜찮을거야"
와 이런 서비스도 해줄 줄이야 갓예린이다 정말로...
"진짜? 고마워!"
만원 더 아끼면 이거로 필요한 것도 더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기쁜 탓에 조금 미소를 짓고 웃었다. 아 음흉한 오타쿠 웃음처럼 보일까봐 밖에선 잘 안 웃는데 웃어버렸네 그치만 만원 할인이래잖아.
"넌 웃는 모습이 참 귀엽네... 자 삼만 팔천 원입니다."
웃는 모습이 귀엽다고? 역시 미소녀 보정은 대단하구나... 굉장해 미소녀
그렇게 내 항공점퍼 안쪽에서 이제는 꼬깃해져 가는 족구동호회 회비 봉투에서 만 원짜리 세 장과 천원짜리 여덟장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삼만 팔천 원 받았습니다. 포인트나 맴버십.. 아 미안 지금 못한댔지"
"아니야. 대신 할인 해줬으니깐 ... 아 가위좀 잠깐 빌려줄래?"
"택 자르려고? 내가 해줄게"
그녀가 계산대 옆에 놓인 가위를 들어 택을 싹둑 하고 잘라줬다.
"아차... 이러면 반품이나 교환 힘든데... 아니야 문제 생기면 갖고 와 내가 매니저님한테 잘 말해볼게"
그녀가 다시 건네주는 운동화를 받아들고 오른쪽 운동화 안에 든 종이뭉치를 빼서 조심스레 이제는 버려질 상자에 같이 담아 건내주었다. 애프터 서비스까지 완벽한 히로인이구나
거울 앞에서 운동화를 신고 발끝을 바닥에 톡톡 두들겼다. 이걸로 내 사복 패션의 완성이다. 역시 원판이 좋아서 그런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트 패션인데도 참 이뻐
"고마워 개학하고 학교에서 보자 그럼"
그녀에게 안녕! 하고 쇼핑백을 손목 안으로 끼고 양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줬다. 만원씩이나 까준 히로인이니 이런 큰 감사를 담은 인사를 해주자
그녀가 조금 웃더니 한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그렇게 서예린과 작별한 후 무빙워크를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쟤 이름을 안 물어봤네..."
조금 한가해진 매장에서 혼자 남은 서예린이 아차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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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사고 난 뒤 2층 식품 및 생활 매장으로 내려와서 일단 들고 있는 짐을 락커에 넣었다.
카트에 백 원을 넣고 조금 낮아진 높이 감을 느끼며 카트를 끌고 세면도구와 수건 몇 개를 담았다.
커피... 도 사고 싶었는데 작은 믹스는 다 떨어졌고 365 사이즈만 있네.. 저건 비싸서 사무실 간식비로 살 때도 다들 큰 결심을 하고 사던 믹스 사이즈다... 아쉽지만 커피는 포기하자, 아니 이 김에 좀 끊어보자. 너무 카페인을 많이 마시고 살아왔어
먹을 만 한 건 뭘 살까 하다가 마침 다이어트용으로도 쓰이는 조금 부드러운 건빵 같은 스틱 제과가 유통기한 문제로 40%할인을 때리길래 그걸 세 묶음이나 담았다 이것도 참 바쁠 때 커피랑 입에 달고 살았는데 여기서도 신세를 질 줄이야.
솔직히 요리는 그 격납고에 부르스타라도 있을 것 같진 않아서 못하겠고 불이 필요 없는 먹을거리를 찾다가 건빵 1kg이 조금 싸길래 그걸 사버렸다. 아까 국수 먹을 때도 솔직히 배 불렀는데 이 몸은 적게 먹어도 괜찮을 거 같아.
결국 산건 칼로리 스틱과 건빵포대 그리고 얘도 할인 매대에 있길래 이온음료 분말을 좀 샀다. 얘는 물에타서 마시면 좋다구
그렇게 계산대로 카트를 밀고 가다가 계산대 근처에 초콜릿이 있길래 그것도 다섯 개 샀다 다섯개 해도 오천원이니깐 괜찮아.
괜찮긴 개뿔 진짜 돈 다 썼다. 수건이 비쌀줄은 몰랐는데 얜 꼭 필요하잖아. 머리도 감아야하고 몸도 닦아야하는데..
손을 살짝 떨면서 봉투 안에 든 돈을 전부 내버렸다. 남은 건 칠백원 어치인가.. 가다가 음료수 하나 뽑을 가격이겠네
마트에서 대여금을 받는 질긴 장바구니에 전부 넣자 짐을 다 넣을 수 있었다. 건빵포대가 좀 골치긴 한데 얘는 내 생명선이야.
락커에 넣어두었던 옷 바구니도 들으니 진짜 한 가득이다. 양 손 꽉찼어
그래도 이상하게 드는데 지치진 않았다. 98%짜리 인간이라 그런가? 파일럿은 강하니깐 일반인 보단 힘이 강한 건가
손이 꽉 차긴 했지만 문제없이 짐을 들고 마트를 나서서 아까 자전거를 세워두었던 식당 앞에서 내 자전거를 찾았다
"아 내 자전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방심했다 설마 이 세계관에서도 자전거는 사라지기 쉬운 품목이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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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쩔 수 없이 양 손 가득 쇼핑백과 장바구니를 들며 격납고 까지 걷기 시작했다.
슬슬 해가 저물려는 듯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니 빨리 돌아가야겠지. 어두운건 싫어.
시내를 벗어나자 그때서야 내 점퍼 왼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엘이 조심히 나왔다.
[고생하시네요 마스터]
"응 아니야 같이 따라 와준 너가 더 고생한 거지"
[정말 배려심이 넘치시는 분이네요.]
조금 지루할 수 있는 길 걷기를 그녀가 말동무를 해주니 조금 즐거웠다.
[마스터. 알고 계셨죠?]
"그녀가 적합자인거 말이야?"
[네]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엘도 그걸 알고 있었나보다.
히로인은 코어와 높은 동조율을 보인다. 일정 동조율 이상 올라가는 사람은 적합자라고 불리며 코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직종에 종사할 수 있다. 주인공과 히로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는 고등학교도 그런 적합자들을 양성하는 기관 중 하나였다.
[마스터에게 위험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야. 그녀는 그런 아이가 아닌걸"
조금 경계하는 듯 한 엘의 말에 나는 아니라고 말했다. 히로인들은 착하다. 사모하는 주인공을 위해 큰 결심을 하고 따라 와주는 헌신적인 존재니깐.
[가끔씩 마스터는 신비로운 느낌이 드네요... 마치 모든 걸 알고 계신 분 같아요.]
그런 엘의 말을 적당히 흘려 넘겨주곤 결국 삼십분을 더 걸어서 격납고에 도착했다. 신발은 정말 잘 산 것같다. 발이 편하니깐 힘들지도 않네.
이 겨울에 이렇게 걸어왔는데도 이상하게 땀은 별로 나질 않았다. 예전 같으면 땀에 절은 아저씨가 되어서 격납고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엎어졌을 텐데 정말 완전무결한 미소녀가 된 걸까.
살짝 열려있는 격납고의 정문으로 들어와 살짝 경계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게이트도 열리지 않았던 것 같다.
일단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정신적으로 피곤해진 나머지 바로 조종석에 들어가 엘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곤 바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