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카페
또 다시 꿈을 꿨다.
하늘에는 우주가 펼쳐진 새하얀 넓은 대지 위에 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홀로 열려있는 검은 흑요석과 같은 매끈한 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관 옆에 놓인 다른 관들은 여전히 열릴 생각이 없는 것처럼 침묵을 지킨 채 그대로였다.
꿈속에서 지루함을 느낀 나는 관들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걸어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절벽에 도착했다.
그리고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 보자 그 밑엔 푸른 지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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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알 수없는 꿈을 꾸곤 잠에서 깨어났다. 기체의 모니터에 표시 된 시간은 2022년 2월 7일 09시 53분
어제 분명 일찍 돌아왔을 텐데 또 늦잠을 자버렸다. 예전에 하루 세 시간만 잠들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날 수 있었던 부지런한 사회인인 나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늦잠만 자는 소녀가 되어버렸나.
일어나서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며 머리를 살짝 긁었는데 이상하게 자고 일어났는데도 윤기가 있는 느낌이었다. 원래 이렇게 시트에 기대서 자다 깨면 머리가 눌리거나 떡지기 마련인데
열 두 시간 가까이 잠들어놓고 너무나 깨끗한 상태가 이상해서 의문이 들었다. 사실 09시 53분이 아니라 2월 6일 21시 53분이 아닐까. 그렇다기엔 격납고의 창문에서 비치는 햇빛은 지금이 완전한 아침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치 잠들지도 않았던 것 같은 깨끗한 상태에 의아해하며 점퍼의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리를 조종석 앞에 뻗어 올린 채 생각에 잠기자 어느새 엘이 내 옆으로 와서 작게 비행하고 있었다.
[잘 주무셨나요 마스터?]
"응 잘 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잔 흔적이 안 보인다?"
[사도의 안은 더러움이 남지 않는 공간이니깐요.]
그녀가 저번에 기체가 전투의 흔적을 스스로 지우고, 흙먼지조차 없애던 것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것은 마스터도 마찬가지에요]
"뭐?"
사도가 자동으로 정화된 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도와 파일럿은 강하게 엮인 관계니깐요. 인간의 몸이 된 마스터라 해도 사도의 안에 있으면 그 영향을 받을 거예요]
그녀의 설명을 정리하면 사도가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사도에 탑승하고 있는 나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어제 그건 왜 ..."
정화를 통해 무결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어제 아침의 그 실책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사도가 정화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파일럿의 겉 육신뿐이니 생리활동 제어까진 힘들겠죠]
공복과 갈증, 그리고 수면과 생리활동 까지는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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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어제 자전거를 찾게 되면서 옆 격납고 사이에 간이 화장실이 있는 것을 알게되서 그 곳에서 간단한 세수와 양치를 끝냈다. 사도가 몸을 깨끗하게 유지시켜준다 해도 사람으로서 이 정도는 해야겠지.
아직 겨울이라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춥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역시 인간과는 다른 2%가 영향을 주는 걸까
세면을 마치자 엘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외출 준비를 했다.
[오늘은 어딜 가시는 건가요?]
"도와줄 사람을 찾으러"
그걸 위해 어제 하루를 소비하면서 옷을 구한 것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려면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춰 입고 가야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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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장보고 잔돈을 가지고 시내까지 걸어 나온 뒤 다시 시내로 향하는게 아닌 버스 정류장에 섰다.
지금부터 갈 곳은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다. 그래봐야 버스로 다섯 정거장이면 도착하는 곳이었지만 지금의 짧은 다리로는 정말 한참 걸릴 것 같아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정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 금방 버스가 도착해서 기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천 원짜리 한 장을 넣었다.
-짤그락
돈 통 밑으로 거슬러져 나온 백 원짜리 세 개
"아저씨.. 저 초등학생 아니에요..."
요즘 애들 키가 좀 크긴 하지만 초등학생으로 보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버스카드를 찍어도 삐빅이 아닌 삑 소리만 들은 지 한참 지난 삶을 살았는데 초등학생 취급을 받을줄이야...
"어... 중학생이야? 미안해 학생."
조금 분해졌지만 뒤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얼른 맨 뒷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렇게 어려보이나? 어제 만난 서예린은 그래도 날 고등학생 취급해줬는데...
좌석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자 아까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봤던 건지 살짝 웃음이 걸려있었다. 비웃는건 아닐텐데 묘하게 자존심이 상해서 그 시선을 피하듯 창밖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원작 시나리오가 시작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4주정도. 길면 긴 시간이지만 짧다면 금방 사라지는 시간이다.
이 보너스 시간동안 나중에 도움이 될 일을 미리 해두거나, 난처해질 일을 미리 없애두면 편하게 지낼 수 있겠지.
게임이라면 행동에 제약이 걸려있겠지만 지금은 진짜 살아 숨 쉬는 세계다. 게임에선 구현이 되지 않아 불가능했던 일들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믿으며 생각을 정리하자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졌기에 벨을 누른 뒤 잠시 후 버스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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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조금 떨어진 옛 거리 였다. 옛날엔 젊은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지였다고 하지만 다른 곳에 역이 생기고 그 위에 쇼핑시설이 들어서면서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게 된 거리다.
그래도 주변에 주택이 있고 중학교가 있던 덕분에 아직 거리의 기능은 하고 있는 거겠지. 근처를 둘러보면 마실나온 노인 정도 밖에 없었다. 아직 점심도 안 된 시간이라면 이게 보통이겠지
정류장에서 오분 정도 걷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간판이 없는 자그마한 카페.
단골들이나 들릴법한 낡아 보이는 카페였지만 메뉴만큼은 최신 트랜드를 잘 따라가고 있는 것인지 직접 칠판에 쓴 신 메뉴 몇 개가 입구에 걸려있었다.
밖에서 보이는 가게의 안은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20대 여자 한명과 점장으로 보이는 40대 정도의 사내가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찰랑
카페에 들어서자 문 위에 달린 조그마한 금속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점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카운터 앞에 서서 인사를 건넨 점장을 지긋이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르바이트생 안 필요하세요?"
미소를 짓고 있던 점장의 얼굴에 조금 당황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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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점장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곤 카페 안쪽의 테이블에 나와 마주 앉곤 내 얼굴을 한번 살피곤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가게가 보는 것처럼 손님도 없고... 이미 아르바이트생도 있어서 말이야.. 미안한데 식구를 늘리는 건 조금 힘들겠는걸..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중학생은 아르바이트생으로 쓸 수 없어"
악! 이제는 중학생이란다. 아까 초등학생 취급보다는 낫지만 대체 이 얼굴은 남들한테 어떻게 보이고 있는 걸까. 조금 슬퍼졌다.
"그렇게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도 중학생은 안 돼. 일하고 싶으면 적어도 고등학생이 되서 와야..."
"소꿉놀이는 즐거우신가요. 첩자 씨. 아니면 교단의 박쥐라고 불러드리는게 좋을까요."
나의 이야기를 듣자 방금까지 곤란해 보이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등을 타고 오르는 듯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누구냐 넌."
사람 좋은 듯 한 태도는 싹 사라진, 아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뒤바뀐 인상을 가진 그가 나를 심문하듯 말했다.
"세례자라고 하면 알까요. 아니면 거듭난 자?"
"... 저 아르바이트생은 아무것도 몰라.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 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어깨를 살짝 으쓱하자 그가 일어나서 아르바이트생에게 가게를 봐달라며 말하곤 가게를 나서는 것을 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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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따라 말없이 조금 걷자 카페 뒤편의 작은 동네 공원에 도착했다. 사람도 몇 없는 게 거리만큼이나 한적한 공원이었다.
"교단도 갈 데 까지 갔군... 이런 어린아이까지 이용할 줄이야"
"실례되는 말이네요. 이래봬도 열 여덟은 되는걸요."
"역시 세례자들은 뭔가 다르긴 한 건가.."
어린아이라는 말에 열여덟이라고 받아쳐줬다.
그를 불러내는데 사용한 '교단'. 3월에 도시에 테러를 저지르는 세력이다. 특정한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닌 교단 또는 이름 없는 교단이라고 불리우는 세력이다.
이런 카페 아저씨가 그런 흉흉한 테러조직에서 무슨 역할을 하겠나 싶지만 꽤 중요한 임무인 조직원의 첩보 임무를 위한 위장신분 발급, 자금조달, 거래상과의 연결을 주선해주는 공작원이다.
그런 그가 첩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주인공 세력의 본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카페를 하며 감시 임무를 동시에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3월이 시작되고 되면 주인공은 휴식을 위해 그나마 본부에서 가까운 이 카페에 히로인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주 들리게 된다.
주인공군은 빡빡한 본부의 훈련에 대한 푸념으로 카페에서 점장이나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전부 교단으로 새어나갈 줄은 모르고 있다가 여름방학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례자란 교단내의 적합자들에게 주어지는 간부의 바로 아래에 속하는 계급이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은색의 긴 머리, 그리고 붉은 눈. 적합자인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한 튀는 외모 덕에 적합자라는건 쉽게 알 수 있었을거다.
아직까지 교단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활동조차 시작하지 않았으니 교단의 정보를 몇 개나 꺼낸 나는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사내를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계획은 3월 이후로 시작되는 게 아니었나? 벌써부터 공작원을 준비하란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4주나 이른 시간에 찾아온 나를 의심하는 듯 말하며 나의 의중을 살피는 그에게 자신 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2호기가 예정보다 빠르게 건조 되고 있어요."
"..! 벌써 2호기 까지? 아직 1호기의 적합자도 찾지 못 한게 아니었나?"
"아뇨. 이미 적합자는 찾았어요. 3월에 제 1 공업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학생이에요."
살짝 다리를 꼬곤 미소를 지어주며 2호기에 대한 소식으로 당황하는 그에게 주인공군에 대한 정보도 일부 까발려버렸다.
"그래서 위장신분이 필요한 거구요. 지금의 제 신분으로는 학교도 들어갈 수 없으니깐요"
"1호기의 적합자가 학생일 줄은... 그래서 너를 보낸 건가"
"네 뭐. 이래봬도 나이는 고등학생이니깐요"
고등학생이란 단어에 살짝 의구심을 갖듯 인상을 찌푸린 그에게 살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교단에서 준비한 선물이에요"
점퍼 안쪽에 넣어두었던 포장지로 감싸진 손바닥만 한 크기의 물건을 그에게 건내자 그는 포장을 살짝 열어보곤 당황한 듯 말했다.
"벌써 3월 작전에 필요한 차원수의 코어까지 준비해뒀을 줄은.. 알겠다. 바로 준비해주지."
다행히 미리 알고 있는 시나리오의 내용과 저번 전투로 얻은 차원수의 코어를 사용해서 위장 신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물건을 품 안에 넣어두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잠깐의 조작을 거친 뒤 나에게 물었다.
"이름은?"
위장신분에 사용 될 이름이자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불릴 이름. 그 이름을 잠깐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백묘월로 해주세요"
백묘월 그것이 이 세계에서 사용될 나의 새로운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