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토요일 (17/152)



〈 17화 〉토요일

카페 문에 달린 작은 차임이 울리며 들어온 것은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였다.

키는 얼추 150 정도에, 어깨까지는 못 오는 살짝 자연스러운 펌이 들어간 갈색 머리의 소녀.
겨울용 코트를 입었으며 그 아래에는 조금 긴 스커트와 얼핏 보이는 검은 레깅스와 갈색 부츠. 옷 자체야 수수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손에 들린 두꺼운 책이었다.
가벼운 전자책이 보편화 되어도 아무도 책을 읽지 않게 된 시대를 거꾸로 가듯 일부러 무겁고 큰 책을 읽는 소녀.


그녀의 이름은 류하연

3월이 되면 주인공군과 같은 학교, 같은 반을 다니는 학우면서 주인공군을 조언해주는 위치에 있는 히로인이다.


전투파트가 아닌 일상파트에서 앞으로의 진행에 대한 힌트나 조언을 읽고 있는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역할을 갖고있다.

적합자는 아니지만 여름방학 이후 발생하는 그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소홀히 하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이벤트를 놓칠 위험이 있으니, 의무적으로라도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은 히로인이었다.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사람이 드문 카페까지 오게  이유는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투르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의 학업만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아진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혼자만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사람이 없는 카페에 오는 것이다.


"아..아메리카노 하나요.."

카페의 카운터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사실은 쓴 것을 잘 못 마시는데 다른걸 주문하기 너무 어려워해서 늘 울상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모습을 창가쪽 테이블에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다 자리로 가려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설마  낡은 카페에 선객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겠지.


놀란 그녀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주곤 일부러 지금은  것도 없는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응시했다.

지금은 이렇게 눈도장만 찍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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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선을 피해주자 구석 자리에서 두꺼운 책을 펼치고 쓴 아메리카노를 인상을 찌푸려가며 마시는 그녀.


사실 책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는 생각 때문에 제대로 집중도 못할 것이다. 흘긋 보면 아까부터 같은 페이지만 십분 넘게 계속 보고있다.

오늘은 이 정도로만 만족하자.

스무디를 다 마신  잔을 들고 카운터에 가져다주고 말했다.


"고마워 삼촌. 다음 주에 또 올게"


일부러 멀리 앉아있는 류하연에게도 들리도록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목소리 톤이 높아져서 이럴 땐  편했네. 예전 같았으면 일부러 크게 말했어야 할텐데.


카페의 차임을 울리며 점퍼에 손을 찔러넣곤 카페 밖으로 향했다.




"토끼..."

카페 한 구석에서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중얼거림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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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마주친 히로인은 셋,

서예린, 틴달로스, 류하연

두 명의 학생과 교단의 간부.

주인공군이 초기 히로인을 이렇게 영입했다면 게임 밸런스는 무너졌겠지. 어느 히로인이나 여름방학이 넘어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지는 히로인들이었다.

3월이 시작되고 나면 정신없이 바빠져서 만날 여유도 짜기 힘들 텐데 이렇게 눈도장이라도 찍어두는게 최선이었다.

뭐 서예린은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거였지만..

일단 류하연에게 눈도장도 찍어주었으니 3주남은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근처의 교복점을 들렀다.



제 1 공업 고등학교. 줄여서 제1공고 라 부르기도 하고 일공이라 부르기도 한다. 어차피 이 지역의 공고는 한 개뿐이니  말해도 이 학교지만.


국내에 몇 없는 적합자와 코어 관련 커리큘럼을 가진 학교다. 그만큼 전국에서 응시하는 학생들의 경쟁률도 높고 커리큘럼 자체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편이다.

교복도 디자인이 예쁜 편이라 인기도 많았는데... 사실 주인공과 히로인들의 학교니깐 이쁘게 디자인 해둔게 당연하지.


한국의 교복 답지 않게 제법 치마가 짧았다. 그 이유는 적합자가 비상시에 움직임의 제약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는 개발자군의 사심이 담긴 설정이었지만..
지금은 그 사심을 내가 정통으로 받고 있었다. 어차피 게임상 캐릭터의 상반신 포트레이트에는 상체밖에 안 나오는데 그런 설정 넣지 말자고  걸..


교복점의 안에 걸린 거울을 보며 그런 후회를 하고 있었다.


검정 기조의 무릎 근처까지 오는 교복치마와 하얀 블라우스, 목 주변을 감싸는 얇은 검은색 리본 넥타이, 블라우스 위를 덮는 투 버튼 조끼.


마지막으로 치마와 같은 배색의 블레이저. 여학생 교복은 갑갑한 넥타이가 아니라 얇은 끈이라 마음에 들었다.

여자아이가 되고 처음으로 입어 본 치마였는데 맨 다리라도 딱히 춥지는 않았지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밑에 아무것도 없는 듯한 느낌.

그래도 이제부턴 이 느낌에 익숙해져야겠지. 학교 다니는 동안 줄곧 입고 다닐테니깐.

아주머니의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성장할지 모르니 조금 크게 맞추는 게 어떻냐는 이야기에 고등학생이라 더 자랄것 같지 않다고 하자 교복 위로 살짝 가슴 쪽을 보시더니 씁쓸하게 웃으셨다.

어차피 여기서 더 자라서 옷이 안 맞으면 그   틴달로스의 카드로 긁어버리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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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복 주제에 따로 재단할 필요 없이 옷 핏이  맞은 덕분에 나중에 다시 찾아올 일이 없어서 좋았다.
그리고 거의 10년도 더 넘은 세월 만에 입어본 교복이니 학생때의 추억이 잠깐 떠올라서 이대로 교복을 입고 위에 점퍼만 걸친 채 격납고 까지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동안 엘이 이 별의 정복도 나빠 보이진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며 잘 어울리다는 이야기를 돌려서 해주기도 했고.


이제는 익숙해진 격납고까지의 외진 길을 걸어서 도착하자 활주로 한 가운데 선객이 있었다.


어제와 같은 차콜색의 정장을 갖춰 입고 곧은 자세를 취한 채 격납고 문을 응시하고 있는 무인.


틴달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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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틴달로스."


내가 오던 곳과 정 반대의 위치에서 격납고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내 쪽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길래

그 무방비해 보이는 등짝에 장난이라도 쳐보려고 일부러 뒤에서 양 팔로 올곧게  허리를 감아서 꽉 당겨봤다.

예전 같으면 비쥬얼적으로도 아웃이지만 지금은 여자끼리니깐  정도 장난은 OK 다.

"뭐.. ! 무어냐!"

정말로 나의 등장을 예측하지 못한 것인지 진심으로 당황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전장이 아닌 사적인 현장에서 만나면 어딘가 모자란 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아이였다.


"어떻게 내 뒤에... 그것도 기척도 없이.."


"아까부터 걸어서 왔는데 정말 못본거야?"

"...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저 격납고 안에만 있는 줄 알았다."


둔감계 히로인이란 건가. 격납고 안에도 없었는데 정말 비어있는지 몰랐던 거야?


왠지 시시해져서 허리에 감은 팔을 풀어주고 돌아선 그녀와 마주 봤다. 여전히 키 엄청 크네

"그것보다 그 옷은... 그런가 정말로 잠입할 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학교에 잠입할 테니 도와달라고"

나는 언제나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점장이나 틴달로스나 아무도 신뢰해주질 않네. 내가 그렇게 신뢰감이 없던 건가.

살짝 불만 섞인 말투로 말했는데 별다른 대꾸 없이 나의 교복 차림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의 붉은 눈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틴달로스?"

"아.. 으흠흠"


왜 그렇게 멍하고 보고있던건지 모르겠다. 나의 부름에 헛기침을 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 또 싸우려고 온 거야? 안되는 일에 질척거리며 매달리는 여자는 좀 별로인데."

"그런건 아니다. 봐라, 오늘은 성체도 두고 왔지 않는가."

아 그러네, 기껏해야 전투기의 격납고에 차원기가 두개나 들어갈 리가 없으니 지금 상태를 보면 두고  거겠지.

"그리고... 저번에 다시 올  가져오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녀의 오른쪽 발치에는 골판지 상자가 하나 놓여있었다.

"이런건 잘 몰라서 .. 박쥐에게 물어서 사왔다."

그녀가 그 자리에서 살짝 무릎을 내려 상자를 열어주자,  안에는 마트에서 파는 제법 달달한 과자들이 가득 있었다.


솔직한 성격만큼  말로 한 약속도 잘 지켜주는 아이구나.


부탁  두개 정도는 들어주도록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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