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영구동토
영구동토.
모든 생명이 태동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항상 차가운 극저온의 땅.
원래 세계에서의 영구동토래 봐야 살아가는 생물이 제법 있었지만, 이 세계에선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는 생명이 없는 땅이다.
그것도 세계의 끝이라 불리우는 극지점. 이 별의 주민도, 교단도 아무도 탐내지 않는 버려진 땅이다.
그런 불모의 땅으로 가자고 하니 틴달로스가 당황할 만도 했다.
자살 희망이라도 하는 게 아니라면 갈 일이 없을 땅에는 왜 가자고 하는 것일까.
나의 생각을 짐작해보려는 듯 내 얼굴을 유심히 몇 번씩 내려 보고 고민하는 듯 눈 사이가 조금 찌푸려졌지만 결국 포기한 듯하다.
"정말로 그런 곳에 볼 일이 있는 건가? 물론 가본적은 있다만.."
"응 그 곳에 너랑 단 둘이 가고 싶은데."
단 둘이.
라고 한 번 더 말해주자 방금 영구동토를 들었을 때 보다 더 놀라는 듯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왜 그런거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단 둘이서 만나고 있지 않았나.
"... 알겠다. 그게 그대의 부탁이라면."
결국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곤 동의의 표시를 나타내었다.
"고마워 틴달로스. 역시 착한 아이구나."
의문을 가지면서도 부탁을 들어주는 게 마음에 들어서 한 손으로 고운 검은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앉은 상태라도 키 차이가 좀 있어서 살짝 허리를 들어야했지만.
"정말 아이 취급은 ...아니다."
내 작은 손을 따로 떼거나 피할 생각은 없던 건지 그 쓰다듬을 받아주면서 작게 한숨을 쉬는 듯 했다.
원래 얘 머리 쓰다듬어지는 거 좋아하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개 과니깐.
---
"출발은 언제 할 건가?"
내 손이 머리에서 내려가자 언제 출발할 것이냐며 틴달로스가 물었다.
"지금 시간이.. 16시네. 지금 가자."
"갈 때는 어떻게 갈 것인가? 역시 내 성체를 같이 타고 가는 편이.."
자신의 성체 틴달로스를 같이 타고가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했지만
"아. 난 내 차원기를 탈 테니깐."
".. 알겠다"
곧바로 거절해주었다. 솔직히 한번 나와 개발자군이 창조한 차원기에 타보고 싶긴 한데
지금부터 갈 곳은 외팔이 틴달로스로는 버거운 곳이니깐 나도 사도를 타고 가는 편이 좋다. 또 뭔가 못미덥나 보네 쟤는.
일 하러 가는데 새 옷 입고 가긴 좀 그렇겠지.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소파(임시)에서 내려와서 그 자리에서 점퍼를 벗곤 블레이저와 넥타이, 그리고 조끼와 블라우스를 벗어선 옷걸이 대용으로 쓰던 철골에 던져걸었다.
"자..잠깐 지금 뭘 하는 건가!"
"응? 아무래도 새 옷 입고 가면 더러워질까봐 편한 거로 갈아입으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고개를 돌리며 얼굴이 붉어진 틴달로스. 마치 성체의 붉은 빛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어차피 같은 여자끼리인데 뭐가 문제인가. 당황하는 틴달로스를 내버려두곤 교복 치마 마저 벗어내려 하얀 속옷 차림이 된 채로
새로운 옷을 입고 나가고 싶어 철골 위에 있는 티셔츠를 집어오려 했는데 저번에 너무 높게 던져두었던 탓에 손이 잘 닿지 않았다.
-툭
손을 뻗어 점프를 했지만 닿지 않는다.
-툭 툭
몇 번 제 자리에서 속옷만 입은 채 뛰다가 포기하고 그녀의 도움을 구했다.
"도와줘 틴달로스군."
"정말..."
결국 고개를 이 쪽으로 돌린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 양 팔 밑에 손을 넣어 허리를 잡곤 들어 올려 주었다.
아니 그냥 위에 저거 집어달란 뜻이었는데.
어쨌건 철골에 걸린 옷은 잡았다. 다음엔 행거를 사서 여기에 설치하던가 해야지.
그래봐야 결국 티셔츠의 청바지라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패션이었지만 옷을 갈아입곤 마지막으로 제일 먼저 벗어두었던 항공점퍼를 다시 걸쳤다.
아 역시 외투도 좀 사고 싶어. 맨날 이것만 걸치고 다니네.
"준비 끝. 자 가자."
"그대는 부끄러움이란 것도 없는건가.."
부모가 자식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부끄러워 할 이유가 있는가.
뭐라 더 말하려는 틴달로스를 내버려두곤 자연스럽게 사도에 올라타 격납고 밖으로 나왔다.
---
활주로 한 가운데 선 틴달로스는 잠깐 눈을 감고 왼손을 옆으로 뻗어 그 손에서 외팔의 틴달로스와 같은 붉은 태도를 꺼내어냈다.
- 싸악..
그 검을 절도 있게 공간을 베어내듯 사선으로 휘두르자 그 공간 속에서 붉은 거인이 서서히 나타났다.
붉은 철의 거인. 차원을 가르며 교단의 적을 사냥하는 목표물을 놓치지 않는 사냥개이자, 성찬식을 통해 탄생한 신성한 성체.
무신의 기개를 상징하는 것처럼 머리 끝 쪽에 짧지만 곧게 서있는 붉은 두 가닥의 뿔.
그 아래로는 가면을 쓴 것처럼 얼굴을 가렸지만 붉은 두 눈만큼은 가면의 틈 사이로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한 팔에 든 주인과 같은 거대한 붉은 태도는 단순한 철붙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강렬한 기운을 감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현현이었지만 그 위용은 강렬했다.
붉은 거인은 거체와 같은 붉은 눈을 아래로 내려 자신을 불러낸 주인을 인지하곤 서서히 몸을 숙여 입구를 열어주었다.
비로소 주인이 탑승하자 신성한 성체는 하나가 되어 붉은 안광을 빛냈다.
<목표는 영구동토. 향하는 길을 열겠다.>
역시 성체에 타고 있을 때는 일 모드라 그런지 멋있게 말하네. 아까의 푼수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 쌔액..
외팔의 틴달로스가 거대한 태도를 가로로 휘둘러 공간을 찢자 그 너머로 새하얀 대지가 보였다.
공간을 자신의 힘으로 찢어 발생한 게이트.
자연적으로 열리는 게이트와는 다르게 불안정하고 거친 공간의 일렁임이 시야로 느껴져왔다.
먼저 가라는 듯 붉은 거인이 옆으로 길을 비켜주자 나는 사도를 움직여 그 공간의 일렁임 속으로 들어갔다.
곧 이어 외팔의 틴달로스가 갈라진 차원의 틈 안으로 들어오자 텅 빈 활주로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
[오토 파일럿 모드로 전환할까요? 마스터]
"아니 전투할 일은 없을 거야. 이 곳에 온건 탐사가 목적이니깐."
조종석에서 내 주변을 맴도는 엘에게 전투 모드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모니터를 통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너무 엘에게만 의지하는 조종대신 직접 몰아보고 싶기도 했으니깐, 전투도 없을 지금이 딱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대지. 어느 생명도 허용하지 않는 극한의 땅. 그 곳이 바로 영구동토.
누군가는 세상의 모든 죄악이 사라진 정화의 대지라고 좋아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역시 나와 개발자군이 만들어낸 생명이 살아가는 곳이 좋았다.
"주변 지형을 스캔해줘."
주변 지형을 스캔해도 아무것도 없고 이따금 길이 끊긴 벼랑이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이런 곳에 정말 볼 일이 있는 것인가?>
조종석 안에서 조용하게 있던 탓에 아무런 미동조차 보이지 않자 틴달로스에게서 통신이 들어왔다.
"조금만 기다려."
붉은 철의 거인은 혹독한 땅에서 날리는 하얀 눈에 젖어가며 나를 기다려주었다.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직접 와보니깐 솔직히 어디쯤인지 감이 안 잡힌다.
스캔한 지형 좌표를 내버려두곤 모니터를 통해 하늘을 쳐다봤다.
생명이 허용되지 않는 대지이지만 저 하늘은 다르다. 대지에 사는 생명과는 관계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난다.
그 빛이 일렬로 늘어지는 곳... 찾았다.
"따라와."
이 극한의 땅에서 목적지를 찾아선 먼저 사도를 움직여 새 하얀 대지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앞 서 갔다.
도착한 곳은 다른 곳과 별 다른 게 없는 그저 새하얀 죽음의 땅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주시하면 밝게 빛나는 달과 별의 빛이 한 지점에 모여 내려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 하얀 죽음의 땅 위에 별들이 일렬로 내려오는 곳. 바로 이 곳이 내가 영구동토에 찾아온 이유가 담긴 곳이었다.
"틴달로스군 점프."
<뭣?>
"자 이렇게. 점프."
사도의 팔을 위로 머리 위로 올려 토끼의 귀 같은 모양을 하곤 제자리에서 뛰었다.
안 그래도 토끼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사도인데 이러니깐 아이러니하게 더 토끼 같은 느낌이었다.
- 쿵
사도를 조작해 제 자리에서 뜀을 뛰자 큰 소리가 울리며 대지가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힘을 주어 내려앉았기에 평소엔 사뿐했던 사도라도 크게 울린 것이리라.
<이..이렇게 말인가?>
어설프게 성체의 왼 팔을 올려 나의 행동을 모방하는 틴달로스.
유감이지만 틴달로스는 토끼라기 보단 한 손에 태도를 든 탓에 참수 집행자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 말은 내 입속에 삼켰다.
- 쿵
틴달로스도 그 자리에서 성체를 움직여 제자리에서 한번 뛰자 대지가 한 번 더 크게 울렸다.
"응 잘하네. 한 번 더"
- 쿵
나도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더 뛰었다.
- 쿵
- 쿵 !
- 쿵 ! !
- 콰자자작 ! ! !
그리고 새하얀 대지는 크게 갈라지며 백색과 적색의 거인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