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영구동토
새하얀 대지가 비명을 지르는듯한 커다란 소리와 함께 나와 틴탈로스는 갈라진 땅 안으로 떨어져갔다.
- 슈우우..
영구동토의 지하가 이렇게 깊었나 싶을 정도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러나 곧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아 사도의 몸을 돌려내자 공중에 정지해서 서 있는 것 마냥 안정적인 자세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외팔의 틴달로스도 괜히 교단의 간부는 아닌 듯 금방 자세를 고쳐서 안정적으로 하강했다.
한참을 떨어져 높이가 짐작되지 않을 무렵 저 깊은 아래에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 탁
나의 사도는 지면이 가까워지자 스스로 속도를 줄여 바닥에 가볍게 작은 발로 딛듯 내려왔다.
- 카가 가각.. 카각.. 각
그러나 외팔의 틴달로스는 속도를 줄일 수 있는 능력은 없는지 바닥이 가까워지자 태도를 옆의 벽에 꽂아 빙하를 전부 갈아내며 속도를 줄였다.
- 콰앙
곧 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붉은 거신은 나와 같은 영구동토의 깊은 지하의 땅에 발을 디뎠다.
<하아!..하아.. 이런게.. 있다면.. 미리.. 말해주는게..>
곧 이어 통신으로 지친 듯한 틴달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격납고 앞에서도 그렇고 깜짝 놀라는 거엔 솔직히 놀라는 타입인가 보다.
"그래도 결과적으론 둘 다 다친데 없이 도착했잖아?"
내 경우엔 예상해두지 않은 내구성 시험이나 다름없었지만 교단의 성체는 고작 이 정도 낙하로는 별 문제 없는 것 같았다.
모니터로 방금 우리가 떨어졌던 곳을 확인하자 정말 까마득하게 높은 곳이라 사도로 뛰어서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고민이 될 만한 높이였지만
지금은 틴달로스가 있으니 나중에 쉽게 돌아갈 수 있겠지
"조금 진정했으면 성체에서 내려와줘."
나도 사도를 세워두고 점퍼 주머니에 엘을 넣은 채 사도에서 내려 얼음 바닥위에 착지했다. 이거 잘못하면 걷다가 미끄러지겠네.
가장 추운 생명이 없는 땅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었지만 이상하게 춥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내던 격납고와 별 다른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혹시나해서 내리기 전에 모니터의 정보를 확인했을 때는 분명 극저온이었는데.
분명 이 몸은 인간과 2% 정도밖에 차이가 없다지만 점점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 탁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틴달로스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건지 성체의 조종석에서 내려와 땅을 딛었다.
아까 활주로에서 봤을 때와는 다르게 차콜 색의 정장 위에 정장과 어울려보이는 붉은 코트를 입었다.
본 시나리오에서는 여름 - 가을쯤 만나다보니 겨울 패션을 볼 일이 없었는데 겨울에는 저런 코트를 입는구나.
나도 돌아가면 내일 코트라도 사러 나가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어깨에 무언가 얹어졌다.
붉은 코트가 아닌 그녀의 차콜색 자켓.
".. 그대는 추위도 타지 않는 것 같지만, 보고 있는 내 쪽이 추워지는 것 같으니.."
나름 배려해준 것 같았다.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니깐.
어린자식과 장을 보고 돌아가는데 어린아이가 자기가 꼭 들어주겠다고 고사리 만한 손으로 짐을 들어주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틴달로스."
안 추운데? 라고 매몰차게 말하는 것 보단 이쪽이 좋을 것 같아서 그녀의 자켓을 양 손끝에 쥐곤 살짝 끌어안아서 품에 꼭 덮곤 웃어보였다.
그녀의 자켓에선 은은한 향수의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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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아무것도 없는 영구동토의 밑바닥까지 온 이유란 무엇인가. 바로 이 곳에 숨겨져있는 것을 회수하기 위해서다.
저번 피복창고때와는 다르게 내가 테스트를 위해서 임의로 만들어둔 요소가 아닌, 공식 시나리오에도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 아래에 잠들어있는 것은 영원히 잠들수 없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군소속의 연구 기관에서 신형 차원기의 화력 실험을 위해 아무것도 없는 영구동토에서 화력 실험을 하던 중 폭발로 인해 우연히 이 깊은 지점이 드러나게 되고 이 곳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곳에서 발견한 것을 인간의 어설픈 손으로 건드리다가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주인공군은 급하게 투입되고 그 곳에서 트라우마를 하나 겪게 되는데...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상 그런 사고는 막고 싶었다.
어차피 사라지게 되는 것이니 교단의 손에 넘겨주어도 별 문제는 없는 물건이니깐. 여기서 그냥 틴달로스에게 넘겨주는 것도 좋았다.
물론 틴달로스라서 넘겨주는 것이지, '노란 옷의 왕' 같은 녀석이었다면... 그냥 내가 조용히 와서 전부 박살내놓고 돌아갔을 거다.
잡생각이 길었다.
틴달로스의 앞에 앞장서서 갈라진 빙하 사이로 작게 자리 잡아 차원기는 지나가지 못할테지만 사람은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사이즈의 구멍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그대가 구태여 이런 곳에 온 이유가 있겠지."
출발하기 전 까지만해도 나를 의심하는 듯 한 틴달로스였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런 장소를 찾아내자 신뢰가 가는 건지 믿고 따라와주었다.
가장 깊은 바닥이지만 이상하게 그리 어둡지 않고 앞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별빛이 비치는 빙하의 틈 이었다.
"틴달로스군은 왜 자신의 능력이 가본 곳만 갈 수 있게 된 건지 알고있어?"
길이 좁은 탓에 일렬로 나란히 내가 먼저 앞서가면서 뒤를 따라오는 그녀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런건... 교단의 세례를 통해 받게 된 힘이라 당연한 것으로 믿기에 의심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음.. 모르고 있는 거구나. 교단 사람들도. 아니.. 계승되면서 잊혀진 건가."
그녀의 능력에 제약이 있는 이유. 어째서 가본 곳만 갈 수 있고, 미지의 간섭으로 인해 갈 수 없는 곳이 존재하는 걸까.
분명 차원을 찢어 원하는 곳은 거리와 상관없이 어디든지 도약할 수 있는 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그녀일 텐데
"..."
교단의 옛 이야기를 얼핏 이야기하자 조금 침묵하는 그녀를 두곤 생각에 잠겨 걷다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줄게."
곧 도착한 곳은 방금 지나온 작은 입구와는 다르게 넓게 펼쳐진 달빛이 내려오는 공동.
그리고 그 공동의 한 구석 벽에 푸르게 얼어붙은 빛이 바랜 은색의 차원기가 있었다.
"성찬식을 받았지만 곧바로 사라져버려 교단 생명의 서에 남지 못한 자. '비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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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군과 같이 일을 시작했을 무렵 자기 턴이 되면 정해진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의 위치에 등장해서 혼란을 주는 적을 만들고 싶었다.
개발자군이 디자인한 은빛의 차원기. 은익의 비야키 라고 불리는 차원도약 시작형 기체였다.
멋있게 디자인하고 도트까지 찍은 비야키를 교단의 맵 한 가운데 배치하고 테스트를 해보자 비야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나와 개발자군은 로그 파일을 읽어가며 비야키의 실종지점을 찾았더니 왠지 모르게 맵에서 이탈하지 말라고 만들어둔 지형의 끝에 처박혀있었다.
당연히 현재 있는 위치를 기준으로 랜덤 이동을 해야 하는데, 정말 모든 맵을 기준으로 랜덤 이동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 처박혀서 오류만 내뿜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길래 둘이서 한참이나 웃었던 기억이 났다.
웃고나서 모처럼이니 그럴싸한 설정을 붙여보면 어쩌냐고 붙여본 것이 교단이 차원을 넘나드는 힘에 제약을 둔 이유였다.
이런 사고가 있었으니 여러분은 아무 곳으로 이동하려는 시도 (랜덤 엑세스) 를 하지마세요 라고.
그런 옛 추억이 담겨있던 은익의 비야키를 다시 보자 반가운 마음에 조금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덧 나의 옆에 서서 그 잊혀진 성체를 바라보는 틴달로스의 눈에는 순교자를 보는 듯한 경건한 눈빛이 서려있었다.
"이것이 바로 교단에서 차원을 찢는 능력에 제약을 둔 이유. 사라진 순교자야."
점차 걸어 나가 은빛의 기체 앞에 섰다.
인간형의 모습을 갖춘 차원기들과는 다르게 네발로 걷는 짐승처럼 생겼으며 기다란 갑주가 달린 은색의 꼬리가 있고
등에는 얼어붙은 은빛의 날개가 달려있었다. 살짝 열려있는 조종석 안으로는 이름 모를 세례자가 백골이 되어 은색의 성의를 입고있었다.
"그를 위해서 잠깐 기도해줄래?"
미숙한 개발자의 사죄를 담아 기도 드립니다.. 뎨성해여엇..
나의 이런 속 사과를 모르는지 틴달로스는 나의 옆에 서서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하곤 작은 기도문을 읊었다.
"하늘 너머에서 찾아온 자의 성찬을 나누어 받은 형제여.. 부디 그분을 따라 하늘로 돌아가셨길.."
짧은 기도가 끝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비아키의 아래로 가 조종석에 위태하게 걸쳐있는 순교자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 이 일을 위해 나를 여기에 불러준건가."
"응. 아무것도 모르는 이 별의 인간에게 성체를 넘겨주는 것 보다 너에게 인도해주는게 좋다고 생각했어."
"그대는... 우리의 편이 아님에도 말인가?"
"내가 일방적으로 편의만 받아가는 관계라고 했었지?"
"... 나는 그대가 정말 .."
뭐라고 더 말하려던 틴달로스의 입이 멈췄다.
"교단의 세례자 틴달로스. 교단을 대표해 우리의 사라진 형제를 찾아 인도해준 그대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나를 향해 크게 감사를 표했다.
"아니야. 교단에는 내가 아직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지만.. 그 대신이야. 초콜릿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줘."
"정말.. 그대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양 손으로 살살 쓰다듬어주던 중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뭐야.. 울어?"
차가운 생명이 없는 대지에 생명의 증거를 남기는 듯 한 그녀의 따뜻한 눈물이 땅에 떨어져오는 것을 보고 나는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아주자
힘이 풀린 것인지 무릎을 꿇어 나의 가슴에 안기는 꼴이 되었다.
"슬퍼서 우는 거야?"
"아니.. 기뻐서 우는 눈물이다.. 한명이라도 더 우리의 형제를 찾게 되어서.."
"눈물을 흘리는 건 너가 착한 아이라는 거니깐. 그렇게 숨죽여서 울 필요는 없어."
누구보다 강해야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여린 울보 틴달로스.
결국 입혀주었던 자켓 위로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머리를 한참이곤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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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물을 그친 뒤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일어서자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이제 여길 향해 공간을 열 수 있겠어?"
"이 정도의 공간이라면.. 성체를 불러올 수 있겠지."
"그러면 가지고 교단으로 돌아가. 아, 가기 전에 나 먼저 데려다주고."
"알겠다."
- 샤악
그녀가 태도를 꺼내 공간을 베어 아까 우리가 차원기를 두었던 곳에 간 뒤, 다시 차원을 열어 공동으로 돌아왔다.
"조금 약해졌을지 모르니깐, 조심히 꺼내."
내가 도와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사도의 손바닥 위에 앉아 비야키의 인양작업을 구경했다.
- 쿠구구..
날개만 벽에 붙은 꼴이라 살살 떼어내자 파손 없이 얼음이 뭉텅이로 같이 떨어지며 공동 안에 조금 시끄러운 소음이 울렸다.
은익의 비야키의 날개가 안전히 떨어져 자세를 고쳐준 뒤 관절을 접어 옮기기 쉽게 두는 작업을 마치자 벽 너머에 무언가가 보였다.
"잠깐만 틴달로스. 저건 뭐야? 저 까만 건.."
비야키가 빠져 나온 곳의 구멍 안에 무언가 검은 물체가 남겨져있었다.
"아아.. 이것은. 이런 곳에서 찾을 줄이야.. 정말 그대에게 얼마나 은혜를 받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빙하 속에서 발견 된 그 물건을 보자 나는 처음으로 얼어붙는 듯 한 추위를 느끼는 듯 싸한 느낌이 등을 타고 올랐다.
그 곳에 있던 것은 흑요석처럼 검게 빛나는 것.
꿈속에서 본 이음새 없는 관.
관의 부서진 조각.
"저것은 하늘 너머에서 온 자. '사도'라 불리는 위대한 자의 혼이 담긴 그릇이다."
틴달로스는 사도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