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도서관 (23/152)



〈 23화 〉도서관

다시 꿈을 꿨다.

여전히 새하얀 대지, 벼랑 아래에는 푸른 지구가 넓게 펼쳐져 보였다.

내가 깨어난 곳은 사도의 혼이 담긴 그릇. 흑요석 빛의 이음새 없는 관이다.

하지만 이번 꿈은 저번과 같은 꿈이 아니었다.

나란히 있어야 할 검은 관들 중, 내가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첫 번째 관과, 두번째 관이 열려있었다.

이음새도 없이 하나의 구조물과도 같던 관이 열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나는 첫 번째 관에 다가갔다.


비어있는 관의 모서리에 손을 얹고 그 관의 주인을 추측해보았다.

멸망하는 세계에서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희생해 나누어준 사도..

 번째 관의 주인은 아마도 교단의 성자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관은 역시 비어있었다.

 관도 역시 사도의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비어있는 두 번째 관 위에 손을 얹자

관이 무너져 내리며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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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흐윽!"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나는 잠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떨어지는 꿈을 꾼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10대 이후로 아마 꿔본 적 없을 꿈.


꿈에서  번째 관을 확인하기 위해 손을 얹자마자 관이 무너지면서 나는 어디론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이거 아마 키 크는  같은 게 아닐까.

본래도 큰 키는 아니었지만 지금의 키는 솔직히 너무 작으니깐.. 조금 컸으면 싶긴 하다.

일어나 격납고 밖으로 나서니 이미 시간은 아침을 넘긴지 오래되었는지 해가 높게 이동하고 있던 것을 알았다.


아마 열한시쯤이겠지.. 인간이 아닌 사도라는걸 알게 되었는데 어째서 내 수면시간은 이렇게 긴 걸까.

인외의 존재라면 잠도 안자도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 속에 찔러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10시 17분.



의외로 그렇게 늦게까지 퍼잔것은 아니었다. 10시면 어느 정도 선방한 것이리라.


저번  토요일에 영구동토를 다녀오고 나서 조금 신중하게 행동하기로 마음을 먹고 일주일간 격납고에서 나가지 않았다.

이른바 그거다. 폐관수련.


내가 알던 세계와 부분적으로 달라져있으니 세계와의 차이점을 알기 위해 스마트폰과 엘을 통해 조사해봤는데 다행히 역사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만약 내가 알고 있던 기본 설정과 너무 달라져있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지만 역사는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았다.


1.게이트가 열렸고
2.괴물이 나타났으며
3.코어를 추출해서
4.차원기를 만들었다.


심플한 설정 그대로였다.

완성하지 못했던 설정에 사도가 들어가면서 매꿔진 것이지  스토리가 변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이 일주일간의 조사를 통해 알게 된 결과다.



그리고 일주일간 틴달로스가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인데, 내가 교단의 적이 아니라는 알게 된 이상 굳이 찾아올 이유는 없겠지.

영구동토에서 발견한 비야키의 처리로도 충분히 바쁠 것이다.


당분간은 내버려두도록 하자.



어찌되었건 오늘의 일과는 정해져있었다.


우선 영구동토의 깊은 곳에서 가져온 다른 사도의 부서진 혼의 그릇을 마저 확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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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분석 결과는?"


내가 잠든 동안 엘에게 사도의 부서진 혼의 그릇.. 기네 그냥 파편이라고 해야겠다. 파편을 분석 시켰었다.

[성분은 예상대로... 이 별의 것과 일치하지 않아요.]


아마 사도들은 우주에서 온 것일 테니 이 곳의 성분과 일치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그러면 틴탈로스와의 대조결과는?"


[3% 정도 일치하지만 정확한 성분은 알 수 없어요.]

3%. 애매한 숫자다 그래도 이 정도면 엄청난 성과였다. 적어도 지금 나의 존재와 교단의 성체 사이에 연결점이 밝혀진 것이니깐.


교단 성자와 나는 3% 정도 일치하는 거겠지.




"마지막으로 파편과 나의 대조는?"

[13%에요.]

"그건 사도.. 아니 내 육신도 결과가 똑같지?"

[네 마스터.]

아직까지도 백색의 사도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긴 조금 어려웠지만. 이제는 나라고 어느 정도 인지할  있게 되었다.


성자의 육신으로 만든 성체는 역시 사도 그 자체에선 조금 떨어져있다는 걸까. 10%씩이나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지금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이 숫자뿐이었다.

혹시 나해서 지난 일주일 간 사도에 탑승해 관의 조각을 살살 긁어보거나 주먹으로 내려찍거나 창으로 후벼보거나 심지어는  까지 쏴봤는데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았었다.


파괴도 불가능했던 물건인데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조각으로 남은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당장의 쓰임새나 용도는 없지만 아마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정도다.


처음 나타났을 때 내 멘탈을 무너뜨리는데 큰 효과가 있던 물건이었으니깐..


내구 실험을 넘기고 시작한 성분 분석은 더 오래 걸릴  알았던 작업이었지만 엘이 유능한 덕분에 일주일 만에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이 별의 모든 물질 정보를 얻느라 시간이 더 크게 소요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엘은 유능했다.


성분 분석이 생각보다 일찍 끝난 덕분에 여유시간이 생겼다.

아직 시나리오가 시작하기 전 까지 1주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1주간을 알차게 보낼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만약 내가 알던 세계와 일치했더라면 알던 그대로 흘러갈 테니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세계가 되어 있었다.


격납고의 휑한 풍경을 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집중이 되지 않아 생각을 떨쳐냈다.


집중하기 좋은 곳... 카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사업장에 계속 죽치고 있는건 좀 그렇겠지

일주일동안 격납고에 틀어박혀서 분석만 하고 있다 보니 좀이 쑤시기도 했다.

틴달로스가 가져다주었던 과자도 어느새 다 먹어 버렸고.



도서관이라도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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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마치자마자 격납고의 문을 닫고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창고부지 밖으로 걸었다.


예전부터 집중할 일이 생기면 도서관을 종종 들리곤했다.

현대에 와서 도서관은 정말 책을 읽는 사람들 보다는 개인공부를 하기 위해 더 많이 모이는 곳이었지만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조용히 무엇을 한다는 것은 은근 압박이 되어서 의외로 집중하기 좋은 곳 이었다.


도서관은 다행히 버스까지 타고 갈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인간이 아니라면 혹시 엄청난 속도로 달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자리에서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해봤다.


양 손을 바닥에 살짝 얹고 무릎을 굽혀 앞으로 튀어 나아갈 준비를 한  달려보았다.

- 타다다다닷


 잘 달린다.

- 타닷

이게 사도의 힘? 가볍고 빠르다.


- 닷..


어라


뭔가 지치진 않았지만 인간을 상회하는 속도는 아닌 그냥 여자애가 뛰는 정도였다.


나 인간이 아니라면서. 우주 너머에서 온 위대한 자 라면서?


잠깐 빠르게 달릴  있었던 이유는 그냥 몸이 가벼워서 그럴 것이다.  몸 50kg도  되는 것 같던데..

달리기는 그냥  그 나이대 여자애 같은 느낌이었다.


왠지 허무해진 느낌이 들어서 달리기를 포기하곤 그냥 여느 때 처럼 천천히 걸어서 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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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도착하기  앞에 있던 자그마한 문구점에서 노트와 샤프를 한 자루 샀다.


책도 펼치지 않고 빈손으로 가서 열람실 책상에 멍하니 앉아있으면 어딘가 마음이 아픈 애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런 아이로 소문나는 것은 싫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는 메모를 해보는 게 도움이 되어서 산 것이다.

2층 서고에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시립 도서관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양의 서적을 보유한 곳 이었는데 아쉽게도 책을 읽는 사람은 손에 꼽았고 대부분은 이어폰을 낀  강의를 듣고있거나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이쪽 세계도 공무원 준비 하는 사람이 많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장서 사이사이 있는 6인용 테이블.  명쯤 앉아있는 곳에 비집어 들어가 빈 노트를 펼쳤다.


'사도', '꿈', '파편', '관'


여러 키워드를 적으며 그 사이의 관계도를 그리듯 줄을 그려 연결해주고 물음표를 쓰기도 했다.


'3%? 13%?', '추위를 느끼지 못함.', '지치지 않음.', '심리적 충격이 몸에도 영향을 미침'


 다음은 지금의 나의 몸에 대한 정보를 적었다.

인간이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충격은 그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  같았다.

혹시 내가 사도를 조종할  무언가 정신적인 영향을 받으면 그에 대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역시 혼자 생각하느라 일주일간 처박혀있는 것 보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오히려 더 집중이 잘 되었다.


' 코어 = 나 '

이건 조금 더 고민이 깊어지는 문제였다. 사도의 코어가 없던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이 코어였기 때문이라니.


혹시 인간과 2% 다른 부분이 이 것이 아닐까.. 하고 눈 옆으로 길게 내려온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노트에 낙서를 하던 중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두들겼다.

혹시 내가 낙서하던 소리가 시끄러워서 주의를 주러 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사과를 하기 위해 뒤를 돌아봤다.

나의 뒤에서 어깨를 두들기던 사람은

 손에 두꺼운 장서를 들고 있던 갈색 머리의 소녀.

류하연이었다.




이건 오늘 예정에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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