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이중계약
도서관에서의 해프닝이 끝난 뒤
격납고로 돌아가기 위해 도서관을 나서자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 따로 가져온거 없는데 그냥 이대로 가도 괜찮으려나.
예전 같았더라면 집에 도착해서 그냥 바로 샤워만 하면 되는 건데 아쉽게도 격납고에는 샤워시설이 없었다. 갈아입을 옷도 한정되어 있었고..
우산도 없는 지금은 그냥 이 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맞겠지.
도서관의 지붕 아래에 서서 땅을 가득 적시는 비를 바라보다가 스마트폰을 통해 날씨예보를 확인하자 비가 그렇게 오래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하기까지 앞으로 11일. 길다면 길지만 짧다고 생각하면 금방 지나갈 시간이었다.
보너스로 주어진 4주간의 시간이었는데 교단과의 연결점도 잡았고. 히로인 중 한명인 무인 틴달로스와도 많이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정체와 이 세계의 달라진 점을 알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
모든 히로인을 구하고 배드엔딩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잡은 이상, 일찌감치 지금 나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주어진 사도의 힘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사도는 완전한 상태가 아닌 틴달로스도 압도할 수 있었고, 잡졸 차원수 상대로도 문제가 없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주인공군이 겪을 불필요한 시련을 대신 해결해 줄 정도는 될 수 있었다.
물론 메인 시나리오는 주인공군이 해쳐 나가야 할 사명인 만큼, 전부 대신해 줄 생각은 없었다.
여긴 어디까지나 주인공군의 세계고 나는 그저 끼어든 사람이니깐.. 그래도 나는 그 올바른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련 없이는 성장도 없다'가 개발자군의 모토라면
'아픔만 남는 시련은 굳이 겪을 필요 없다' 가 나의 모토였다.
만약 개발자군이 이 세계에 왔더라면 아무것도 손대지 못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말이 있었다.
'신은 그의 나라에 계시며, 세상은 변함없이 평온하였다.'
세상은 전능한 자의 개입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으니 전능한 자는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자식들이 행복했다면 좋겠다. 그걸 위해서라면 기꺼이 간섭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다잡고 있자 어느새 비가 그친 듯 하늘의 먹구름이 점차 흩어져가고 밝은 햇빛이 내려왔다.
그러니 빨리 나타나줘. 주인공군.
이 이야기를 너와 내가 유래 없는 해피엔딩으로 다시 써보자.
나는 자그맣게 생긴 비 웅덩이를 밟으며 격납고로 돌아갔다.
---
도서관을 다녀오고 5일이 지난 금요일.
도서관을 다녀온 덕분에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 되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계획을 하느라 또 격납고에 쳐박혀있었지만
류하연은 본가를 다녀온다고 했으니... 토끼사냥 같은 일은 없겠지... 아마도.. 진짜로..
그렇게 격납고에서만 지내다가 어제는 간만에 옷을 사기 위해 외출을 다녀왔다.
이제는 금전적 여유로움도 어느 정도 생겼으니 저번처럼 구질구질한 예산에 쫒기는 쇼핑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쇼핑을 위해 나선 도시는 앞으로 전장이 될 것이라는 게 예상도 가지 않을 만큼 평화로웠다.
아직까지 게이트는 자주 열리는 곳에서만 열리는 일종의 현상이니만큼 사람들의 삶은 위험지역을 제외하면 평온했고
오히려 게이트가 열린 덕분에 코어를 이용한 산업이 성장한 덕분에 일자리가 늘었다는 평가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밖을 나서 구매한 옷은 평소처럼 저렴한 브랜드가 아닌 조금 가격이 나가는 옷이었다.
아랫단이 긴 검은 원피스, 살짝 챙이 넓으며 모자 색과 같은 면사포가 덜란 검은색 모자, 검정 단화.
마지막으로 그 위를 덮는 검정색의 코트.
올 블랙의 패션이 밝은 은백색의 머리와 대조되어 나름 신선한 컨셉이었다.
귀중한 시간을 써서 굳이 옷을 사러 갈 필요가 있었나 싶었지만. 예의를 갖추고 가야 할 곳이니 어디까지나 필요한 경비였다.
늘 운동화만 신고 다니느라 조금 어색한 단화를 고쳐 신고 나는 격납고를 나섰다.
지금부터 갈 곳은 떠나간 이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공원 이었다.
---
도시 밖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추모공원.
십년 전 이 세계에 열린 첫 번째 게이트.
그 사고로 인해 숨진 사람들과, 그 게이트를 닫기 위해 희생한 영웅들을 추모하는 곳이 이 곳이었다.
이제는 십년도 더 지나버린 사고가 돼 버린 탓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려 어린아이들은 이 곳이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주말이면 모를까 오늘 같은 평일은 정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이 곳에 오기 전 도시의 꽃집에서 국화꽃을 한 송이 사서 들곤 추모공원의 입구를 지나 바로 보이는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의 한 가운데에는 마치 차원기와 비교 될 정도로 거대한 석조물이 보였다.
첫 게이트가 발생한 뒤 사고에 휘말려 사망한 명단들이 빼곡하게 새겨진 비석이었다.
'2012. 03. 03'
가장 마지막에 새겨진 연표가 이 사건이 벌써 십년이 되어 감을 나타내주었다.
그 앞에서 잠깐 묵념을 하곤 마저 걸어 조금 더 안쪽으로 향했다.
광장을 지나쳐오자 사고에서 유해가 수습 된 개개인의 무덤이 늘어져있었다.
그 무덤들을 지나 점점 안으로 들어가자 넓게 탁 트인 언덕 위에 다섯 개의 비석이 보였다.
이 곳은 첫 번째로 열린 게이트를 닫은 다섯 명의 영웅을 기리는 곳이다.
그들의 유해는 비록 찾을 수 없었지만 그들을 추모하는 마음만큼은 이 곳에 남았을 것이다.
이곳에 온 것은 나만이 아닌 듯 먼저 찾아온 선객이 있었다.
아무도 이 곳을 찾지 않게 된 오랜 사건이 되어버린 시대에 그 남자는 마치 몇 번이고 이 곳을 방문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머리가 중간 중간 허옇게 새버린 남자는 비석들 앞에 마련된 단상에 흰 꽃다발을 내려놓곤. 한 비석 앞에 서서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단상에 헌화를 한 뒤 그 남자의 옆에 서서 잠깐 추모하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옆에 있던 남자의 시선을 느꼈다.
".. 자네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건가?"
시선 속 어딘가에 슬픔이 가득해 보이는 눈으로 그는 나에게 물었다.
"아뇨.. 그런건 아니지만 그냥 꽃을 올리고 싶었어요."
이야기를 듣곤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그녀도.. 분명 기뻐하겠지.."
조금은 핼쑥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헌화를 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감사를 표하는 그의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장님. 아니.. 이제는 사령관님 이라고 불러드리면 될까요?"
"나를 알고 있나?"
나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그는 조금 놀란 듯 내 쪽을 돌아보며 질문을 했다.
"게이트 관련 연구기관의 연구소장이셨죠? 이제는 전 연구소장님 이시지만요."
능청스럽게 그의 질문에 답하며 그가 속해있던 기관.
게이트에서 넘어온 것들을 연구하는 기관의 연구소장임을 알고 있음과, 곧 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학술지라도 읽어본 건가..? 아니.. 내 전속은 어떻게..?"
2급 기밀에 속하는 내용을 알고 있자 그는 조금 물러서서 나를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정부나 다른 기관에서 온 직원처럼 보이지도 않는 어린 학생이 자신의 프로필을 알고 있다면 충분히 수상해보이겠지.
"저는 차원 너머에서 왔어요."
"...!"
나의 발언에 그는 당황하며 품속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빼앗으려는건 아니에요. 사령관님의 아내분이 이루시려던 일을 마저 돕기 위해.."
"그녀를.. 알고 있나?"
"네. 비록 엇갈리긴 했지만 그녀와는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니깐요.. 이렇게 돌아가셨을 줄은.. 몰랐네요.."
나의 붉은 눈에서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지키려던 세계가 다시 부서져 버릴거에요."
"게이트는 더 이상 깊게 열리지 않는게 아니었나..?"
세계가 부서져 버릴 것이라는 이야기에 그의 시선은 조금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곧 깊은 곳 너머의 문이 이 세상에 다시 열릴거에요"
"십년 전 처럼.."
그는 마치 믿지 못할 일을 들은 것처럼 목소리가 점점 타들어 가듯 갈라져갔다.
"그러니 부탁드릴게요."
- 슈우우..
나의 말이 끝나자 나의 뒤에 있던 빈 공간에서 백색의 사도가 모습을 드러내 큰 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비어있던 공간에서 사도가 나타난 덕에 나의 모자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버려 모자 속에 감춰져있던 은발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이 백색의 기체는 저와 같이 싸워줄 나의 투사."
나의 뒤에 한쪽 무릎을 꿇은 사도의 팔에 한 손을 기대어 선 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당신을, 아니 이 별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그의 수척해진 뺨을 타고 내렸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낸 것만 과도 같은, 기적을 영접한 것과도 같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내가.. 무엇이든 도와주겠네."
이렇게 나는
인류를 차원 너머의 존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불가능한 기적과도 같은 일을 행하려는 프로젝트.
타브하에 참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