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베타니아
베타니아.
타브하 기지에 자리를 잡은 독립 기관이다.
본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군이 만약 출격할 수 없게 될 경우.. 그러니깐 타브하가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를 위해 존재하는 백업 기관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설정상의 존재일 뿐, 실제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군은 무조건 승리하고 패배하더라도 다시 일어나니 실제로 등장할 일은 없었다.
그런 설정의 허점과 같은 곳에 내가 소속될 줄은 몰랐다.
나쁘게 말하면 예산을 빼돌리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고스트 컴퍼니나 다름없는 기관이었는데
먼저 떠나 간 부인의 뜻을 따라 세계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령관님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
그 역시 나와 개발자군이 만든 올곧은 캐릭터니깐 믿을 수 있었다.
사령관은 나와 사도를 극비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포장하여 타브하 내부에 침투시켰다.
사도는 현용 차원기들과는 다른 스펙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령관이 손을 써두었기에 그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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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이 되자 타브하의 사령관에게 미리 알려준 버려진 격납고에 마중이 나왔다.
거대한 수송 트레일러와 고급 관용차량 한 대.
사령관은 직접 데리러 오지 못해 아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말하며 나를 기지로 맞이할 준비를 해주었다.
수송 트레일러에 사도를 눕혀 격납시켰다.
그 동안 격납고에서 웅크려 두었는데 이제는 허리좀 펴고 격납할 수 있겠구나..
그 위로 거대한 천막이 덮어졌다. 이렇게 수송하면 의심을 살 일도 없겠지.
다른 사도의 그릇 파편과 여러 옷가지는 캐리어에 잘 넣어둔 채 캐리어를 끌고 관용차량 앞에 도착하자
사령관의 비서가 캐리어를 받아 트렁크에 실어준 뒤 좌석 문을 열어 리무진에 탑승했다.
우와... 이런 차 처음 타보는데.
세로로 긴 차. 다리를 뻗긴 커녕 그 사이에 대자로 누워도 될 만큼 넓은 리무진을 타자 조금 신기해져서 차 안을 둘러봤다.
기사랑 공간도 제법 떨어져있고 그 사이에 창문도 달린 게 이게 고급차량이구나 싶어 둘러보던 중 비서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앗 네."
차 한쪽에 있는 조그마한 냉장고에는 여러 음료와 고급져 보이는 술이 있었다.
일단은 미성년자니깐 여기서는 그냥 음료나 받는 게 낫겠지.
"물로 주시겠어요?"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모르니 그냥 물이 제일 낫겠다 싶었다.
내 주문을 들은 비서는 생수병을 따서 유리잔에 따라준 뒤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차 안인데도 흔들리지 않는 승차감 덕분에 물잔이 찰랑이는 일 없이 편하게 한 모금 마셨다.
물을 마시며 바깥 풍경을 살짝 보고 있자 곧이어 그녀가 서류가방에서 서류봉투와 플라스틱 카드를 건네주었다.
"기지 출입을 위한 ID카드와 행정처리에 필요한 서류입니다."
플라스틱 카드에는 아직 나의 사진이 없던 탓에 비어있었지만 이름과 소속만큼은 명백하게 써있었다.
[ 백 묘월 (Baek Myo Wol) .. TABGHA - BETHANYA ]
신경 쓴 적 없는데 영어로 표기하면 이렇게 쓰는 게 맞겠지?
소속기지인 타브하와. 기관명인 베타니아가 같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ID 카드 한 쪽 아래에 있는 보호 씰을 떼어낸 뒤 손가락을 얹자. 잠시 후 그 부분이 붉게 물들었다.
"역시 적색이군요."
적합자라는 증거. 저번 신분증도 붉게 나왔으니 딱히 이번엔 푸르게 나오거나 그럴 일은 없었다.
"묘월양이 속한 베타니아는 엄밀히 말하면 기밀사항은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ID카드에도 명시되어있지 않았겠지요."
비서는 내가 궁금해할법한 부분의 이야기를 잘 설명해주었다.
"베타니아는 기본적으로 작전에서 독립 의사결정권을 가지는 기관입니다. 하지만 사령관님의 아래에 있는 만큼 사령관님의 지시는 따라주셔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출격이나 여러 업무에 타브하의 사람들은 나에게 명령할 수는 없지만 최고 사령관의 명령은 꼭 따라야만했다.
"묘월양의 차원기는 임시로 3번 격납고에 보관 될 예정입니다."
"1호기는 테스트. 2호기는 롤아웃중이니깐요?"
"..! 네. 맞습니다."
기밀사항인 타브하의 테스트 중인 1호기와, 건조중인 2호기. 그 이야기를 가볍게 꺼내자 비서는 놀란 게 보였지만
결국 사령관에게 미리 전달받은 거라 생각한건지 납득했다.
"정비관에겐 미리 준비 된 자료가 제출되었으니 기체의 출처에 대해 의심 받으실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별의 기술로 만들어지지 않은 사도. 그런 차원기가 격납고에 있다면 이상한 의심을 사기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사령관의 기밀사항이라는 것으로 무마가 가능했다.
타브하는 독립 조직이 아니라 하부에는 여러 파생조직이 있고, 그 위에는 위원회가 존재한다.
그러니 타브하의 정비관이라고 해서 기체의 출처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계속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올해 안에 들키진 않겠지.
"생활하실 곳은 일단 시설 내 관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만 사령관님께서 자유롭게 정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생활도 배려를 해주는 건가.
시설 내 관사라면.. 고급 숙소라면 조금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군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BOQ 느낌이 물씬 날 것 같아서 왠지 꺼려졌다.
혹시나 나중에 히로인을 만나려고 해도 기지 내 관사라면 만나긴 힘들 테다.
예를 들면 틴달로스 같은 경우는... 시설 내에 들어오면 정말 큰 일 나겠지.
"마지막으로 베타니아에 필요한 인재를 직접 결정하실 권한까지.."
서류를 읽던 비서는 그 권한에 대해 말도 안 된다는 듯 잠깐 말을 멈췄다.
앞에 있는건 17세 소녀.. 실제 신체 나이는 15세지만.
어린 소녀가 적합자라 해도 무슨 능력이 있다고 인사권한까지 주었단 말인가.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선 필요할 때 제출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사령관의 비서다운 유능한 일 처리였다. 언뜻 보기엔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사령관의 지시라면 의미가 있는 거겠지.
그녀의 안내를 전부 듣고 서류봉투를 다시 건네받자 어느 새 관용차량은 기지 입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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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에 도착해서 트레일러 위에 엄중하게 가려진 사도가 제 3번 격납고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기지의 인계 서류에 서명을 했다.
인계 절차를 마치자 비서는 다음 업무를 위해 가봐야 한다며 떠났고 나는 관용차량에 다시 타고 이동했다.
기사는 사령부 근처의 행정계에 나를 내려다 주었다.
이 곳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임시로 지낼 숙소를 안내 받으면 된다고 말해주며 캐리어를 내려주었다.
명백히 군 소속은 아닌 타브하지만 기본적인 운영 체계는 군과 유사하긴 한 것 같았다.
실제로 군과 협력도 하기 때문에 기지 내에 군인들도 제법 보였다. 정비 담당 쪽이 주로 군에서 다루는 부품이 많기 때문이라 들었다.
자그마한 캐리어를 돌돌 끌고 행정계 앞에 도착해서 노크를 두 번 했다.
신병받ㅇ.. 아니지.
"네 들어오세요."
노크를 마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양복을 입은 사무원과 군복을 입은 군인 몇이 보였다.
몇몇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업무를 위해 시선이 흩어졌다.
"어떤 일 때문에 오신건가요?"
기간병으로 보이는 행정계원이 나에게 방문 목적을 물었다.
"전입 절차 때문에 왔는데요.. 사진 여기서 찍으라고 하셔서."
"아, ID카드 때문에 그러신가요? 이 쪽에 앉아주세요."
신분증도 사진이 필요 없게 된 시대에서 기지 내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 ID카드에 필요하다니.
역시 군은 어느 세계에서도 비슷하구나..
계원이 자기 책상 맞은편의 천장 위에 달린 끈을 내리자 증명사진용 배경지가 내려왔다.
검은 그라데이션에 낡은 게 딱 군용 물자답게 생겼네..
"여기 앉으신 다음 이 쪽을 봐주세요"
"네."
배경지 앞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은 뒤 그가 들고 있는 PC용 캠을 바라보며 시선을 맞췄다.
"조금만 웃어주시겠어요?"
"이렇게 하면 될까요?"
예전이면 입만 웃는 미소가 나왔을 텐데, 이 세계에 오고나서는 표정이 제법 부드럽게 잘 지어졌다.
역시 아름다운 신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드는 법일까.
"찍습니다."
PC에서 짤깍 거리는 미디 소리가 들리더니 그는 모니터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나왔네요. ID카드 주시겠어요?"
"네 여기.."
아까 비서에게서 받았던 ID 카드를 건네주었다.
"성함이 백묘월씨... 소속은... 베타니아??!!"
사진 인쇄를 위한 프린터 위에 내 ID 카드를 올리던 계원은 내 소속을 보고 놀란 듯 소리쳐버렸다.
계원의 놀란 듯한 소리를 듣자 행정계 내부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아..네.. 그런데요.."
뭐지 혹시 이상한 취급이라도 받는 덴가.. 그러면 좀 슬픈데.
"아.. 아뇨. 오늘 새로 파일럿이 오신다곤 하셨는데.. 그.. 이렇게 젊으실 줄은 몰랐네요.. 여기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긴장되어 보이는 그는 나에게 사진이 인쇄 된 ID카드를 건네주었다.
"고.. 고맙습니다아.."
계속 사람의 시선이 꽂히는 느낌이길래 조금 말이 쭈뼛거리며 나왔지만 ID 카드를 받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다행히 사진은 잘 찍혔다. 구린 카메라로도 이렇게 잘 찍히다니. 미소녀 무서워.
"관사는.. 제 2 격납고 분이 마중 나오신다고 하셨으니 안에서 기다리시면 될 거에요. 그 동안 여기서 대기해주세요."
이 계원이 계속 안내해주는건 아니었나보다, 행정계원이면 행정계의 일 만으로도 바쁠 테니 어쩔 수 없지.
그가 가리키는 곳은 손님용 소파와 낮은 테이블이 있는 곳이었다.
우와 왠지 전입신병이 된 느낌인데.. 뭐 비슷하긴 하지만 지금은 미소녀 전입신병쨩이니깐 쫄아 있을 필요는 없겠지.
무려 사령관 직속이라구.
소파에 앉아있자 간단한 다과와 음료수가 접시에 내어져왔다.
커피 맛이 나는 비스킷 과자와.. 병에 든 오렌지 쥬스인가. 딱 손님용이란 느낌이었다.
조금 출출한 느낌에 한 개를 까서 입에 오물거리고 있자 다른 계원들의 시선이 조금 느껴졌다.
뭐라도 묻었나?
시선을 보내온 계원 한명과 시선이 맞아버려 왠지 어색해져서 살짝 미소를 지어주자 왠지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왜 저런 걸까. 예전 외출할 때도 그렇고 종종 시선을 느끼곤 한다.
그렇게 간단한 다과를 먹고 나서 십분정도 지나자 행정계의 문이 열렸다.
"필씅.. 제 2 정비대대 김현진 하삼다.."
조금 지쳐 보이는 눈을 한. 위 아래로 정비복을 입고 정비화를 신은 정비원이 들어와 아마 행정계쪽 간부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경례를 올렸다.
그 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내 쪽을 보곤 이 쪽으로 와주었다.
"안녕하심까.. 제 2 정비대대 김현진 하삽니다.. 베타니아 분이시죠?"
꾸벅 고개를 숙여 나에게 인사를 하는 정비복의 하사.
제 2 정비대대..
왠지 낮이 익은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