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베타니아
베타니아 베이스에서 테스트 기동이 끝났다.
현세대 차원기 대비 말도 안 되는 성능에 정비관은 기체의 정밀분석을 요구하였으나
사령관은 그 부탁을 거절했다.
이 시험기는 필드 테스트를 위해 상부의 위원회에서 내려 보내져 온 기체이며
운용만 허가 될 뿐 기체의 분해 및 정밀분석은 금지되어있다는 설명을 하자 정비관은 마지못해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그의 처세능력은 한낱 연구원이었던 그가 어떻게 사령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만약 사령관이 정비관처럼 10년 전과 15년전의 사건을 모르던 사람이라면 아마 무리해서라도 기체를 강제로 분석하려 했겠지.
이 외에 가동시험 테스트를 해보았으나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이 사도는 에너지 팩과 활동시간제한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2월간 격납고에서도 항상 전원을 켜둔 상태였는데 밤만 되면 알아서 자체 회복이 되었으니 신경 쓰지 않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선 역시 기밀처리가 되었다.
테스트가 끝나자 어느덧 시간이 오후 2시를 훌쩍 넘겼는데
같이 식사라도 어떠냐는 사령관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어서 파일럿 슈트에서 일상복으로 환복을 마친 뒤
그와 함께 관용차량을 타고 시설 내 골프장 옆에 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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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쪽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개인 룸.
무엇을 먹겠냐는 그의 이야기에 아직 배가 별로 고프지 않으니 그냥 마실 거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식당에 자그마한 카페가 붙어있었기에 그리 어려운 주문도 아니었고, 적당히 골라보다가 망고 스무디를 시켰다.
자기가 사오겠다며 룸을 나서는 비서를 뒤로 하곤 둘만 남은걸 확인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 그래서 오늘 이렇게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뭘까요?"
사도 안에 테스트를 위해 있던 덕분인지 오히려 출발 전 보다 더 깔끔해진 어깨 옆으로 내려온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그에게 물었다.
"묘월양의 이름과 신분.. 우리 외에도 협력자가 있는 것 같더군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줄이야. 이렇게 직구로 물어볼지는 몰랐는데.
"네 맞아요. 사실 이 세계에 온건 얼추 한 달 전. 그 동안 의탁할 곳이 필요했거든요"
매만지던 머리카락을 놓곤 살짝 손을 모아 턱을 괴곤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 출처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인가요?"
나를 경계하는 듯 한 말투를 하는 그.
"이 땅에 왔던 차원 너머의 사람이 저와 사령관님의 아내 분 둘 뿐이었을까요?"
"!"
그 답변이 충격적이었는지 그의 눈가가 살짝 떠는 것을 보았다.
"차원의 균열은 종종 일어나요.. 그 때 이계의 마물들만 넘어오는 것이 아니라. 간혹 휘말려 넘어오는 분들도 있구요."
"그렇다면 어째서 여태 알려지지 않은 겁니까.."
"넘어온 분들이 보기엔 이 곳은 완전한 이방의 땅. 원래 살고 있던 세계와 비슷하더라도 이곳은 결국 집이 아니니깐요."
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 차원을 넘어온 경우는 조금이지만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교단 관계자이고, 정말 사고로 넘어온 사람들은 전이과정에서 같이 넘어온 차원수에게 살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아직까지는 차원에서 넘어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적은 것이다.
적어도 그의 부인은 차원기를 타고 넘어왔기 때문에 차원수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일 뿐
- 똑똑
'집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에 말을 멈춘 사령관.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듯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대화를 멈춘 그 대신 내가 말해주자 곧 문이 열리고 사령관을 위한 식사와 내 스무디가 도착했다.
"잘 마실게요 사령관님."
내 앞에 놓인 스무디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도 식사를 시작하며 아까의 이야기는 그 것으로 된 것인지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 묘월양의 신분과 다른 조력자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 다만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만 해주세요."
"네. 타브하를 배신할 일은 없어요."
제법 달달하고 새콤한 게 들어가자 조금 기분이 좋아져서 눈웃음이 나왔다.
".. 그런데 학교는 왜 들어가는 건가요?"
나의 신상을 찾다가 나온 하나의 정보. 내일이 되는 3월 2일에 제 1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는 것.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그를 향해 웃어보이자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없는지 식사를 계속했다.
".. 아내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저보다 이야기를 더 잘 풀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사령관님의 대화도 나쁘지 않았어요. 왠지 모르게 배려해주시는 느낌도 받았구요."
"묘월양의 머리색이.. 제 아내와 닮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설정으로만 지나가는 부인이었는데 나와 같은 은발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좋은 사람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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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자 그는 나를 독신자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네 시가 가까워졌고. 내일 첫 등교를 위해 사람을 보내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설마 직접 오시진 않겠지..
입학식날 관용 리무진을 타고 등장하는 신입생이라니 그건 좀..
내 숙소에 들어오고 주머니 안에서 나오는 엘을 보고 말을 걸었다.
"그 뒤로 사도는 어때?"
[감시결과 딱히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은 없어요. 나올 때와 똑같았어요 마스터.]
"누군가 건드리려고 한다면 알려줘."
[네 마스터.]
아무리 사령관이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더라도 그 밑의 사람들은 아닐지 몰랐다.
만약의 일에도 대비해두는 것이 좋겠지.
샤워를 마치곤 속옷만 걸친 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졌다.
어차피 추위나 더위를 타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자도 별 문제는 없다.
애초에 편하게 입는 옷도 없으니 다시 입어봐야 청바지인데 내 침대 위에서까지 굳이 청바지를 입고 싶진 않았다.
- 타악 탁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려 살짝 창을 열고 고개만 내밀어 밖을 보았다.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아래에 있는 운동장.
그 곳에서 간부 몇이 족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아저씨들 족구 많이 좋아하시네. 어제도 분명 김 하사와 송 상사도 족구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생각을 하며 아래를 내려 보니 정말 그 아저씨들 사이에 김 하사와 송 상사가 있었다.
그냥 심심해져서 창틀에 팔꿈치를 괴곤 아저씨들의 스포츠를 지켜봤다.
내가 본 것은 후반부였는지 경기가 종료되었고 한 쪽이 이긴듯했다.
"야 현진아! 바로 밥 먹으러 가자! 우리 회비 잘 갖고있제?"
송상사가 땀이 가득한 이마를 닦으며 김 하사를 불렀다.
"넵 상사님. 잘 갖고 있습니다."
"그려 또 옛날처럼 잊어먹지말구"
"아니..상사님 그게 벌써 4년 전 일인데.."
"똑바로 관리 하라는 소리여!"
"넵.."
"아...아앗..."
나는 그 대화를 듣고 실없는 목소리를 내버렸다.
족구.. 제 2 정비대대.. 김 하사.. 회비... 4년 전..
내가 이 기지에 오고나서 갖고 있던 모든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피복창고에서 발견한 50만원은 그들의 사라진 회비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침대로 달려가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파일럿 급여 나오면 꼭 갚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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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죄책감에 살짝 마음이 무거웠지만 다행히 잘 잠들었고
관이 나오는 의문의 꿈도 꾸지 않은 채 아침이 밝았다.
어제 아침은 창문을 좀 열어두고 자서 그랬던 건지 그 악몽 같은 나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길래
창문을 꼭 닫고 잤더니 미미하게 들리긴 해도 어제처럼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크게 들리진 않았다.
'2022년 3월 2일 수요일'
오늘은 제 1 공업 고등학교의 입학식이자 메인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하루 전..
주인공군이 학교에서 히로인을 마주치며 앞으로의 이야기에 대한 서막이 시작되는 일종의 프롤로그격인 날이다.
동시에 그의 활동을 감시하고 도와주기 위해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고등학교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 할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이야기지. 이렇게 직접 고등학교를 다시 들어가게 되는 처지가 되자 기분이 참 묘했다.
분명 고등학교를 졸업한 게 거의 12년쯤 되어갈텐데..
그래도 이번엔 여고생으로 입학이라는 특별한 경험이다.
군필이기도 하니깐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군필여고생인가 하고 거울 앞에 서서 교복 매무새를 다듬었다.
치마는 좀 짧긴 해도 개발자군의 디자인답게 나쁘진 않았고. 갑갑한 타이 대신 맬 수 있는 리본 끈이 마음에 들었다.
아 그런데 이제 알게 된 거지만 교복은 샀는데 가방이랑 학용품 아무것도 안샀다..
첫날이니깐 뭐 중요한거 안하겠지..
교복 블레이저 주머니에 대외용 스마트폰 하나만 넣고 반대 주머니엔 엘을 넣었다.
이쁜 핏에 블레이저 주머니가 두둑해지니깐 별로 안이쁘긴한데.. 내일부터 가방은 꼭 들고 다녀야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독신자숙소를 나서자 그 앞에는 검정 세단이 한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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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관님. 어제 분명 사람을 보내주신다고.."
"직접 오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한 적 없지 않았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람이 본인일거란 이야기는 안 해서 그렇지!
사령관은 직접 세단을 몰고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기지에서 운전수를 붙여주더라도 가끔씩은 이렇게 직접 차도 몰아봐야 합니다."
자기도 가끔 숨을 돌릴 겸 이렇게 외출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매일 일에 붙잡혀 살 수는 없으니깐.. 특히 아직까지는 큰일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여유나 다름없었다.
졌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보며 조금 웃자 그가 마저 이야기를 꺼냈다.
"주변 친구들이 자기네 딸을 가끔 차로 학교에 데려준다고 하는데..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젊은 나이에 사별을 했는데도 재혼은 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사령관에게 자식은 없었다.
"그러면 아빠라고 불러드릴까요? 아빠~ 용돈주세요"
이야기에 맞춰주듯 장난스래 사령관에게 아빠라고 불렀다.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절대로 할 수 없을 장난이지만 지금의 나는 10대 여학생이니 그 정도 장난은 용서받겠지.
- 끼익
갑자기 브레이크가 살짝 밟아져서 몸이 조금 흔들렸다.
"하하.. 아마 이런 느낌이었나 보군요."
전방에 뭔가 있던 것도 아닌데 빈 도로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그가 잠깐 웃더니 다시 주행을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사령관에게 한방 먹인 느낌이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어느새 학교가 가까워진 것을 보았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저기까지 가면 차 돌리기 나쁠거에요"
불법주정차가 사라진 세계라해도 입학식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다. 분명 한번 차를 몰고 들어가면 빼서 나오기 힘들겠지.
"저.. 사령관님?"
그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차를 끝까지 몰더니 결국 학교 정문 앞까지 도착했다. 미안해지네..
"입학식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 시간이 없군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던 중 그가 나의 입학식까지 따라가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해주었다.
"대신 딸에게 줄 용돈 정도는 있습니다."
- 딸각
그렇게 말하며 그는 미리 준비했던 건지 조수석의 수납함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어..어어..사령관님.. 아까 진짜 달라고 했던 건.."
이미 받은 게 많고 오늘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받을 염치가 없는데..
"아직 정식 계약서를 쓰시기 전이니 활동비도 없지 않습니까. 어제 테스트의 보수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결국 사령관이 건네는 조금 두툼한 봉투를 살짝 반으로 접어 블레이저 안주머니에 넣고 차에서 내렸다.
"잘 다녀오세요. 이쪽 세계의 학창시절은 즐거울 겁니다."
그의 배웅을 뒤로하고 세단에서 내려 그가 사라지는 방향을 향해 손을 한번 흔들어주었다.
조금 언덕 위에 지어진 제 1 공업 고등학교.
시나리오의 주인공과 히로인이 모이는 구심점이 될 장소에 나는 첫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