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입학식
내가 알고 있는 프롤로그 시나리오상 오늘 오후 5시부터 도시 위에 거대 게이트가 열리게 되어있다.
이대로라면 도시는 혼란에 빠지고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예전엔 의미 없이 만들어둔 스크립트 이벤트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살고 있고, 주인공군과 히로인이 살아있는 세계. 적어도 내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 큰 파괴는 막고 싶었다.
오늘 예정된 이벤트는 다음과 같았다.
1. 주인공군은 학교를 마치고 하교를 위해 역에 간다.
2. 역을 포함한 도시의 위에 게이트가 열린다.
3. 차원수가 쏟아져 내린다.
4. 혼란 속에 방치된 타브하의 시작형 차원기를 발견한다.
5. 주인공군이 사명감을 느끼고 탑승한다.
6. 실수가 좀 있었지만 차원수를 격퇴한다.
일종의 튜토리얼 전투나 다름없는 이벤트였지만 4 ~ 6 사이의 과정이 애매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분명 타브하에서 관리하는 엄중한 기체인데 어떻게 아무렇게 방치되어 있던 건가.
일개 고등학생한테 탈취 당할 정도라면 현장은 아마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혼란으로 인한 기지 내부의 인원 손실도 막고 싶은 일이었다.
게임일 때와는 다르게 개발과 유지보수부터 많은 인력이 들어가니깐 유능한 기지 직원을 잃는 건 사양이다.
적어도 내가 현장에 있다면 일어날 사고 몇 개 정도는 막을 수 있지않을까.
어제 사령관에게 부탁했던 1호기 인계 작업의 참석이 그걸 위한 밑작업이었다.
데이트라는 명분으로 류하연을 끌어들인 것도 그녀를 내 눈이 닿는 범위 내에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주인공군과 히로인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듣고 있는거에요?"
나의 데이트 제안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이 쪽을 바라보는 류하연의 앞에서 나는 손을 펼쳐 눈앞에 흔들었다.
둘이 같이 놀러가자는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던 건가.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 급발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 묘월씨.. 우리는 친구지만 아직 그 이상은.. 거기다가 우리는 여자끼리인데.. 그래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하는 그녀.
다행히 내 걱정과는 다르게 무언가 혼자 착각이라도 하고 있던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하신거에요. 둘이 학교 끝나고 그냥 놀고 오자는 건데."
요즘 십대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건지 생각하는 범위가 남다른 것 같았다.
"아.. 응 그런거였구나!.. 그런 거라면.."
다행히 내 대답을 듣곤 올바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조금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말투로 말한 그녀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것 정도는 제가 사줄게요. 친구니깐요."
"친구.. 헤헤.."
친구라는 말에 곧바로 구슬려지는 그녀를 보니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모르는 아저씨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따라가면 안된다는걸 배웠을 텐데.. 아 지금은 아저씨가 아니니깐 괜찮나.
그녀와의 데이트 약속을 마치자 조회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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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담임에게 OT때 들었던 학교의 커리큘럼은 다음과 같았다.
첫 번째는 조종과.
파일럿과 라고도 부르며 코어를 통해 움직이는 각종 장비와 차원기를 다루기 위한 코스였다.
주인공군이 곧 속하게 될 곳이기도 하면서 뚜렷한 미래가 보장된 학과라 인기가 많다.
두 번째는 지휘과.
유능한 파일럿이더라도 현장 지휘관 없이는 그저 혼자 날뛰는 거인일 뿐이다.
히로인 중 한명인 서예린이 속한 곳이기도 하자 조종과와 비슷한 경쟁률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무래도 조종과는 현장직이고 지휘과는 안전한 곳에서 지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깐 안전한 곳이 인기가 많겠지.
세 번째는 정비과.
차원기와 그 장비에 대한 개발 및 설계, 분석, 정비에 대한 통합적인 커리큘럼을 배우는 곳이다.
현재 코어를 가공해서 만든 장비와 차원기에 대해 전반적으로 배우게 되는 과이며
산업자체가 그렇게 오래되지 못한 탓에 언제나 인력이 부족한 곳이다.
마지막으로 분석과.
게이트에 대한 생태 분석과 현장 지휘관을 보조하는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과다.
이렇게 말하면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흔히 말하는 그거다.
'전방에 고열원체 반응 발견! 패턴 블루 입니다!'
흔히 말하는 오퍼레이터 업무를 배우는 과 인데 이 곳에는 류하연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현장에서 싸우는 조종과, 전체적인 작전의 책임을 져야하는 지휘과, 정비고에서 죽어라 일만하는 정비과와는 다르게
전투가 발생했을 때만 오퍼레이터 업무를 하고 평소에는 전투결과에 대한 분석만 하면 되는 일이니 다른 과와 비교하면 안전하면서도 안정적인 직장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내가 저 4곳의 OT를 모두 들으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2학년이라면 정해진 과가 있으니깐 바로 수업을 들으러 가면 된다지만 1학년 1학기는 의무적으로 모든 과의 수업을 듣게 되어있다.
정말 귀찮지만 그래도 주인공군과 히로인들을 마킹하려면 꼬박꼬박 수업엔 들어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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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전동안은 가장 인기가 많은 조종과와 지휘과의 OT를 들었다.
둘 다 현장 필드에서 하는 강의가 아니라 OT인 만큼 교실에 담당 교사가 들어와서 설명회를 해준 게 전부였지만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의 관심을 사긴 좋았나보다.
아무래도 본인들이 희망해서 들어온 학교인 만큼 그저 임무를 위해 들어온 나와는 성실함이 다르겠지.
오전 수업이 끝나고 식당으로 이동해 점심식사도 금방 마쳤다.
요즘 애들 급식 좋아졌다고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좋아졌을 줄은 정말 몰랐다.
후식으로 나온 디저트도 달달한 게 참 좋았고.
점심을 먹으니 조금 졸음이 오긴 했지만 점심먹고 바로 엎어져 자는 생활은 옛 학창시절로 족하다.
계속 동행하게 되는 류하연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잠도 제법 달아났고 오후 OT도 금방 끝났다.
오후 OT가 끝나고 종례가 끝나니 시간은 겨우 오후 4시가 되어가는 참이었다.
원래 세계의 고등학교라면 아마 오후 6시가 지나야 학교가 끝나겠지.
요즘은 정말 선택으로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야간자율학습도 있으니 이런 시간에 하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주인공군이 학생인 만큼 활동 시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설정이었는데 그 설정의 도움을 내가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돌아갈 채비를 하며 어제 산 가방을 등에 매고 짐을 챙기는 류하연에게 말을 걸었다.
"슬슬 가볼까요. 데이트."
"어디로 갈 거야..?"
"들려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괜찮을까요?"
"이상한데만 아니면.. 괜찮아."
내가 주인공군이었다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애목적으로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니깐 상관없겠지.
그녀와 함께 학교를 나서 사건의 중심지가 될 역을 향해 걸었다.
주인공군은 알아서 먼저 돌아간 것 같으니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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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역 근처에 있는 카페 앞에서 버블티를 두개 샀다.
자기 몫은 자기가 사겠다고 말하는 류하연 이었지만. 내가 불러냈으니 오늘은 내가 사겠다는 말하자 수긍하곤 받아들였다.
나이 반 정도밖에 안 오는 애한테 뭐 얻어먹기엔 양심도 찔리고.
어제 받았던 돈이 액수가 제법 된 덕분에 여유도 있다.
다만 아직까지도 지갑을 사지 않아서 어제 받은 종이봉투째로 들고다니면 현금 결제를 하는건 좀 그랬지만..
시간은 오후 4시 30분.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앞으로 30분 정도 남았다.
".. 들려보고 싶단 곳이 여기야?"
한 손에 음료를 들려 준 그녀와 도착한 곳은 열차의 대형 화물이 도착하는 곳이었다.
데이트장소라기엔 투박하고 보통 사람들은 올 일도 없는 장소였다.
만약 연애목적의 데이트라면 호감도가 쭉쭉 깎였겠지만. 나와 그녀의 사이는 그냥 친구니깐 괜찮을 거다.
"조금 보고 싶은게 있거든요."
"..여기에?"
각종 컨테이너와 수송물자가 가득한 이 곳에 여고생이 흥미를 가질만한게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나와 류하연을 발견한 군복을 입은 군인이 이 쪽으로 다가왔다.
"이 앞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기지로 인계될 물품은 기밀이니 민간인한테 노출 되선 곤란하겠지.
하지만 나는 민간인이 아니다.
"들여보내주세요."
제지하려는 듯 막아서는 그의 앞에 교복 주머니에서 타브하의 ID카드를 꺼내서 보였다.
내가 건넨 ID카드를 받고 ID카드의 사진과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본 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사..사령관님께서 말씀하셨던.. 알겠습니다."
나에게 ID 카드를 돌려주곤 그는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동행인이에요."
"아.. 알겠습니다."
동행인이라고 그냥 들여보내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귀찮게 막지 않아서 좋았다.
여차했으면 막혔을 때 사령관에게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럴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 묘월씨 방금 보여줬던 거 뭐야? 어떻게 군사구역까지 들어온 거야..?"
학교에서는 마냥 맹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그런 그녀라도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은 깨달은 것 같았다.
"하연씨"
"응.."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프롤로그가 시작 되려는 자리에 조언가에 불과한 히로인인 그녀를 내가 이 장소에 데려온 이유.
베타니아 베이스의 두 번째 요원 영입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