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인카운트
푸른빛에서 나타난 파란 차원기.
타브하의 베레시트 계획 시작 1호기
흑철색의 바디를 중심으로 외장에 푸른 광택이 도는 장갑이 장착되어 있었다.
군사목적 양산기인 케루브와는 다르게 투박한 느낌도 없고
복합소재를 이용한 경량화에 성공한 것인지 기체의 두께도 전체적으로 줄어들어 날렵한 이미지를 가졌다.
특이한 것은 무장을 거치할 수 있었던 하드 포인트가 달려있던 케루브와는 다르게 어깨에는 자그마한 미익 같은 것이 달려있었다.
등과 다리 쪽에 추진을 위한 버니어도 없다니.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간단한 점프조차 하지 못하는 실패한 디자인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저 기체는 어떻게 된 것인지 버니어도 없는데 공중에 살짝 뜬 채 부유하고 있었다.
역시 설정화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보니깐 느낌이 다르구나..
케루브의 조종석 모니터로 비춰지는 베레시트 1호기의 화상 위에 UNKNOWN 이라는 문자가 지나갔다.
정식인계 전인만큼 아직 정보가 등록되어있지 않은 건가.
<소속 불명기를 발견.. 이건 적..?>
기체의 통신모듈 너머로 하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전장에 끼어든 소속불명의 기체라니. 보통은 증원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 당연한 판단이다.
"아니에요 하연씨. 저건 우리의 편."
한 손에는 범용 라이플을 들고 있는 1호기는 점차 고도가 낮아지더니 나의 앞을 지키듯 내려왔다.
<도망쳐 주세요. 그 기체로는 상대하기 힘들거에요.>
곧이어 1호기에서 주인공군의 통신이 들려왔다.
호오 처음 전장에 나선 주제에 저런 말을 하다니.
주인공답다면 주인공다운 대사였지만 왠지 생초짜 주제에 폼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아니꼬왔다.
"소속불명기 주제에 명령인가?"
일부러 통신모듈에 보이스 체인저를 넣은 채 1호기의 통신에 응답했다.
<아니에요! 저는 단지 후퇴하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조금 장난을 쳐봤을 뿐인데 당황하며 진지하게 대답하는 주인공군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 웃음이 나왔다.
"하하. 장난일세. 그래도 후퇴는 하지 않겠네."
어차피 보이스 체인저를 켜뒀으니 일부러 노련한 아저씨 마냥 주인공군에게 말했다.
<어째서죠.. 그 기체로 교전은 불가능하실 것 같은데..>
지금 상태라곤 기체 전신에 차원수의 피를 뒤집어쓴 팔 한쪽도 없고 무장도 없는 기체였으니 이 자리에 남겠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자네. 전투경험은?"
<... 없습니다.>
"방금 출격 때도 말일세, 손에 라이플이 들려있는데 어째서 차원수를 제압하지 않은 것인가?"
1호기의 첫 등장은 멋지긴 했지만 나 같으면 그렇게 폼을 잴 시간에 동시에 두 마리의 머리 정도는 터뜨리면서 나타났을 것이다.
<...>
베테랑처럼 보이는 상대에게 정론을 찔리니 할 말이 없나보다.
"그런 초보를 두고 전장을 떠날 수는 없지. 전투는 힘들어도 어드바이스 정도는 해주겠네."
<.. 감사합니다!>
그래도 방금 전의 핀잔이 호의에서 온 것임을 알아서 그런 것인가 조금 기운을 차린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 샤아아아악 !!
"온다!"
전장에 새로 나타난 푸른 거신을 견제하듯 노려보고 있던 차원수들의 경계가 끝난 것인지 이 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 파아아..
"우선 라이플을 그렇게.. 앞에 보이는 목표에 겨누면 서브시스템이 보정을 해줄테니 겨눠보게."
달려오는 소형 차원수 세 마리를 피해 케루브의 등에 달린 버니어를 분사해 뒤쪽으로 몸을 뺐다.
- 철걱..
나의 지시를 들은 1호기가 범용 라이플을 한 손에 들고 달려오는 세 마리의 차원수를 향해 겨눴다.
파지는 하지 않는 건가. 정말 겨누기만 하고 있네.
"그대로 쏴보게."
- 탕! 탕! 탕! 탕! 퍼억!
한발만 쏘라는 거였는데 연발로 갈기다니 그래도 한발은 맞았네.
뭉쳐서 달려오던 세 마리의 차원수 중 가운데 한 마리의 머리가 터지며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맞았어요!>
"고작 한발 맞았다고 신날 때 가 아니지 않은가. 남은 두 마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가운데 있던 한 마리의 머리가 터지자마자 다른 두마리는 양 옆으로 산개해서 케루브와 1호기를 노리듯 옆으로 돌아왔다.
<다시 라이플로 쏜다면..>
- 슈파악! 퍼억!
기체의 페달을 내려밟아 공중으로 살짝 뜬 채 옆으로 빠지고 기체의 발을 움직여 달려오는 소형 차원수의 어깨를 걷어찼다.
- 가아아아악 !!
병든 것처럼 보이는 사냥감의 다리에 맞아 밀려나자 잠시 주춤한 차원수는 이 쪽을 향해 울부짖었다.
- 까가악! 철퍼억..
어림도 없지. 곧바로 기체를 위에서 강하해 차원수의 목뼈를 밟아 으깨 뭉개버렸다.
곧바로 힘이 빠진 건지 목이 부서진 차원수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과연 주인공군은 잘 대처하고 있을까.
- 탕! 탕! 탕! 파각!
곧바로 돌아서 확인해보니 탄을 세발이나 낭비하긴 했지만 완전히 접근하기 전에 처치한 모양이었다.
<굉장해.. 한쪽 팔이 없는데도 차원수를 제압하다니...>
그 말 어딘가의 무인이 들으면 분명 화낼 거다.
"항상 쏘겠다는 말을 하기 전에 미리 쏴버리게."
- 뻐어억!
이쪽을 향해 감탄한 듯한 말을 하는 주인공군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놓듯 한마디를 말하며
발아래에 깔린 차원수의 머리를 밟아 터뜨렸다.
요즘 애들은 행동대신 말만 앞서서.. 으잉
- 그르르르륵..!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인지 지네와 닮은 중형 차원수 두 마리가 이 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모니터에 뜨는 기체 정보에선 무릎 부분이 노랗게 변해있었다.
역시 이 무게로 자주 뛰어다니고 짓밟는 것은 무리였나.
일대일의 교전 상황이라지만 내 쪽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봐 초보군."
<네!>
"날 도와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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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쪽의 실력을 보여주자 나를 신뢰하고 있는 것인지 곧바로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저 큰놈에게 한방 먹이고 싶어서 말이야."
저 사이즈의 거체로는 아까처럼 다리로 밀쳐 내거나 목뼈를 밟는 전략은 통하지 않겠지.
"자폭 하겠네."
<자..자폭이라니! 같이 죽으실 생각인가요!>
자폭이라는 대답에 엄청 당황한 듯한 통신이 돌아왔다.
"누가 죽는단건가. 아직 연금탈 날도 멀었는데.."
원래도 연금 타려면 30년 정도 더 남았는데.. 지금 나이라면 50년은 기다려야겠지.
"저 녀석의 안쪽에서 자폭 시퀀스를 가동시키고 도망치겠네. 도망칠 때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같이 죽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자 안심한 것인지 이 쪽의 작전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걸레짝이 되어있으니깐 이 기체는 수리해도 무리일 것이다... 아마도.
"5시 방향으로 1500M 후퇴 해주게."
페달을 내려밟고 스틱을 뒤로 당겨 움직이자 기체가 뒤쪽을 향해 여러 번 뛰어 재개발 예정지인 듯한 빈 공터에 도착했다.
이쪽이라면 주변 건물에 피해도 없겠지.
- 삐이이 !
공터에 도착하자 결국 무릎 부품이 맛이 간 건지 모니터에 나타나는 기체의 오른쪽 다리가 빨갛게 표시되었다.
내 뒤로 도착하는 1호기. 그리고 300M 떨어진 곳에 있던 중형 차원수가 이 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 타닥 탁 찰각.
- 삐이이이이이 !
조종석 위쪽의 버튼을 몇 개 눌러 열 배출용 모듈을 정지시키고 조종석 아래의 레버를 당기자 모니터가 붉게 변하며 경고음이 울렸다.
주 모니터 아래의 모듈에서 자그마한 메모리 스틱이 나왔다.
이것만 챙기면 나중에 문책당할 일은 적겠지..
그 스틱을 교복 블레이저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제 여유롭게 도망치기만 하면..
- 파가아아아악 !!
"꺄아악!!"
달려올 것이라 생각한 중형 차원수가 몸을 던져 이쪽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왔다.
탈출을 준비하던 케루브의 왼쪽 허벅지가 뭉개지며 조종석 안에서 나는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 가르르르륵... 가르륵
중형 차원수의 튼튼한 턱에 케루브의 허리가 끼인 채 으깨지기 시작하며 공터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차원수에게 끌려가는 나의 옆에 바싹 붙어 달리던 1호기는 중형 차원수의 아래에서 이쪽을 향해 뛰어올랐다.
- 파시이이..
"이 쪽으로 뛰어주세요!"
1호기의 조종석이 열리며 안에서 조종 모듈을 잡은 교복차림의 젊은 소년.
주인공군이 이쪽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공중에서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나의 조종석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으니 잘만 뛴다면 저기로 옮겨 탈 수 있을 것이다.
고작 해봐야 거리는 사선으로 3M 정도.
기체의 모니터에 남은 시간은 앞으로 15초.
망설일 틈은 없었다. 뛴다.
"지금부터 그 쪽으로 가겠네!"
"네! 와주세요!"
- 파아아.. 깡!
케루브의 조종석 커버가 열리다가 차원수가 물고있는 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듯 개폐 실린더가 터지며
두꺼운 조종석의 문이 바닥을 향해 뒹굴었다.
"하나! 둘!"
- 콰아아앙..!
흩날리는 바람을 넘어 열려있는 1호기의 조종석을 향해 뛰자 차원수의 턱 아래에 붙잡혀있던 기체가 폭발했다.
- 가그윽... 빠악!
소폭발의 여파로 중형 차원수는 머리와 가슴 부분이 터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후폭풍을 등으로 살짝 느끼며 1호기의 조종석 안으로 들어오자 자동으로 조종석의 커버가 닫히고 실내 내부에 조명이 들어왔다.
"아저..씨? 아니.. 여자애?"
조금은 넓은 듯한 베레시트 1호기의 조종석.
나를 보자 당황하는 듯한 표정의 주인공군.
그 시트 위를 점거하듯 공중에서 내려온 나는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타 앉게 되었다.
그리고 무릎 위에서 폭발의 여파로 날린 나의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그를 향해 웃었다.
"안녕. 초보군."
그렇게 나는 주인공군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