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인카운트
만신창이가 된 케루브를 자폭시키곤 베레시트 1호기의 조종석으로 뛰어들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옵션은 1인 좌석일 테니 서브 파일럿을 위한 좌석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조종간을 붙잡고 있는 주인공군의 무릎 위로 엉덩이부터 떨어져서 앉게 되었다.
기체의 조종석이 서로 가까웠던 덕분에 세게 떨어지진 않았는데, 몸이 가벼우니깐 아프진 않겠지..
"여자..애?"
자기 무릎 위에 누군가가 떨어졌다는 사실 보다 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듯 했다.
아. 아까 장난친다고 보이스 체인저를 켜놨지.
그가 상상하던 나의 이미지는 아마 베레모를 쓴 댄디한 아저씨 파일럿이겠지.
아 원래 기체의 주인은 조금 그런 이미지가 맞긴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기체를 버려가면서 중형 차원수 한 마리는 잡았지만 아직 다른 한마리가 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가르르르륵....
이제는 기체의 서브시스템이 없어도 차원수의 모습이 눈으로도 확인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단 뒤로 빠져."
"아.. 알았어."
그가 다리를 움직여 기체 아래의 페달을 가볍게 밟자 시야가 뒤로 빠지는 게 느껴졌다.
직접 컨트롤 할 때랑은 또 시야가 달라서 신선하네.
"남은 탄환은.. 뭐? 2발?"
기체 모니터 상단에 표시되는 잔탄수를 보자 바로 한숨이 나왔다.
기본 옵션이 스무발일 텐데 대체 뭘했길래 이렇게 .. 아 연사로 갈겼지 얘.
이 남은 탄환을 활용할 방법이..
- 탕! 탕!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그의 오른손이 움직여 조종간의 버튼을 누르더니 탄환 두발이 중형 차원수의 아래턱을 스쳐갔다.
"바아아아아보야아아아!!!!"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를 내버렸다. 뭐? 잔탄을 전부 써버렸다고?
내 일갈을 들은 그는 잠깐 주춤하고 놀란 듯 했지만 이내 변명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게 두발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
- 띠 띠 띠
곧 이어 모니터 상단에 표기 된 라이플에 EMPTY 라는 메세지가 뜨며 붉은 대각선이 그어졌다.
- 카아아아아 !!
그 틈을 기다려주지도 않는 듯 중형 차원수의 거대한 턱이 1호기의 왼팔에 다가오는 것을 확인했다.
"으랴앗!"
방금 혼난 탓에 주춤하던 주인공군을 대신해 조종간을 쥔 그의 왼 손 위로 손을 겹쳐 잡고 조종간을 뒤로 확 당겼다.
- 샤아아악..
기체가 몸을 왼쪽 뒤로 빼자 차원수의 턱은 허공을 지나 아래로 흘려 지나갔다.
"조종 중에는 항상! 집중! 하라고!"
이 기체의 강도라면 저런 공격 따위 가볍게 스치는 정도겠지만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나쁜 전투법이다.
아예 페달까지 내가 밟으려 했지만 그의 사이즈에 조종석이 맞춰져있던 탓인지 발이 닿지 않았다.
"뒤로!"
"알았어!"
그래도 이번엔 정신을 차리고 있던 것인지 내 지시를 듣자마자 바로 페달을 내려 밟아 뒤로 몸을 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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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의 남은 무장은..
라이플은 탄창을 전부 써버렸고 예비용 탄창도 없으니 사격은 무리다.
지금 시험사양이면.. 장비되어 있을까? 근접장비.
모니터 상단을 살피자 근접장비 슬롯에 녹색 불이 들어와있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 저거라면 할 수 있어.
"근접전으로 갈 거야."
"그.. 근접전? 설마 아까처럼 격투로?"
"바보야. 그건 초보의 실력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야."
"바..바보 두 번이나.."
그런걸 신경 쓸 때냐.
"베레시트 1호기에 달린 근접장비를 쓰겠어."
"근접장비? 처음 기동할 때 옆에 라이플 밖에 없었는데.."
"조금 비켜봐."
조종석이 전체적으로 높고 긴 탓에 한 번에 팔이 닿지 않아 살짝 허리를 올려 머리 위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조종석이 조금 좁은 탓에 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히는 꼴이 되어 조금 미안해졌다. 조금만 참아.
- 파샤앗
버튼을 누르자 1호기의 허벅지 앞부분이 열리며 그 안에서 짧은 손잡이가 나왔다.
"손잡이..?"
"근접 무장이야."
무장을 꺼내는 것과 손에 쥐는 것이 자동 시퀀스로 구성되어있는지 1호기의 오른손에 손잡이가 쥐어졌다.
"이거로 뭘 어떻게.. 날도 없잖아."
"너.. 메뉴얼도 안 읽고 탔니?"
나 때 주인공은 아무리 바빠도 메뉴얼은 한번 읽고 조종했어.
항상 제품을 구입하면 메뉴얼부터 읽어보고 쓰라구!
그의 얼빠진 말에 작게 한숨을 쉬곤 살짝 오른쪽 어깨 아래로 붙은 뒤 팔을 뻗어 오른손의 조종간을 겹쳐 쥐었다.
"검지 쪽에 있는 큰 버튼 눌러봐."
이쪽 이라고 말해주며 검지손가락으로 그의 검지를 툭툭 쳤다.
- 기이이이잉 !!
그가 버튼을 누르자 무언가 갈리는 소리가 나며 비어있는 손잡이의 위에서 가느다란 프레임이 솟아나고 불꽃처럼 푸른빛을 띄었다.
"단검..?"
"파랑.. 역시 1호기랑 잘 맞는 모양이네."
베레시트의 코어와 공명하는 파란색의 칼날. 비록 길이는 짧지만 이건 강력한 무장이었다.
"이대로 저 차원수의 품 안에 파고들어."
"..알았어!"
무기가 하나 생기자 자신감이 생긴 걸까 주인공군은 페달을 내려밟아 1호기의 방향을 앞으로 돌렸다.
- 쾅! 쾅! 쾅!
"두 발로 달리는 게 아니야. 조금 더 부드럽게. 몸을 앞으로 내리고."
일반적인 기체라면 이렇게 달리거나 버니어를 점화해 호버링하는게 보통이지만.
"이렇게..?"
기체의 몸을 숙인 채 그가 페달을 부드럽게 밟자 기체의 몸이 앞으로 넘어질 듯 기울었다.
하지만 기체는 앞으로 넘어지지 않고 바람을 타듯 앞으로 날며 푸른 기류를 주변에 흩뿌렸다.
"감이 좋네."
역시 주인공군의 전용기 라는 건가.
"저 차원수의 코어는 턱 아래에. 가슴보단 조금 위에 있어."
대지를 낮게 비행하던 1호기가 공중으로 올라 차원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 가르릇!
1호기보다 조금 더 거대한 차원수가 1호기의 출력을 이기지 못하는 것인지 점점 밀려났다.
"그대로 코어를 노려!"
"하아아앗..!!"
기합과 함께 1호기의 손에 쥐어졌던 단검이 차원수의 붉은 코어 위에 꽂혔다.
- 파키이이이익!!!!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차원수의 코어와 단검 사이에 붉은 코어조각과 푸른 불꽃이 튀었다.
- 가라라라락 !!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는 건지 차원수의 거대한 턱이 1호기의 팔을 물었다.
- 키이이이익..!!
1호기의 팔 위로 덮인 푸른 장갑의 도장이 갈려나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버틴다면..
- 파칵!
차원수의 코어에 균열이 생겼다.
"이걸로 라스트!"
그의 오른손 위로 겹친 손을 뒤로 당겼다가 단검을 손에서 풀고
다시 레버를 앞으로 강하게 밀어 주먹을 쥔 손이 단검의 자루를 후려쳐냈다.
- 까악! 캉!
- 그륵.. 극..
곧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차원수의 코어가 덩어리째 깨져 바닥으로 툭 툭 떨어졌다.
"임무 완료.."
중형 차원수 3마리, 소형 차원수 7마리.
전부 격파했다.
- 샤아아아아...
차원수를 전부 쓰러뜨리자 역 위에 펼쳐져있던 십자열로 찢어진 붉은 게이트가 아물기 시작하며 원래의 푸른 하늘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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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더워.. "
군용기인 케루브의 조종석보다는 쾌적하지만 사람 둘이 붙어 있다보면 덥긴했다.
블레이저의 단추를 풀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이마에 엉긴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겼다.
"그 교복.. 혹시."
"혹시는 무슨. 같은 반인데도 몰라보는 거야?"
전투가 끝나자 얼빠진 소리를 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올려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누구인지 기억 못한다고?
"입학식때.. 내 뒤에 있던.."
"잘 알고 있네 뭐."
어제 OT때도 있었는데 기억 못하는 건가.. 이 쪽은 너 때문에 두 번째 학창시절을 보내는 중인데.
그래도 입학식때 봤던 건 기억하고 있나보다.
정말 누군지 모른다고 했으면 단화로 저 발을 밟아줬을거다.
<들리시나요. 1호기의 파일럿.>
전투가 끝나자 들려오는 오퍼레이터의 목소리.
아까 케루브를 버리고 가면서.. 통신을 미처 재연결 하지 못한 덕분에 류하연은 아닐 것이다.
"네 들려요."
내가 조금 생각하는 사이 그가 먼저 오퍼레이터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대로 기체를 처음 탔던 곳 까지 가져와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게 전부였는지 곧 통신회선이 닫혔다.
"할 이야기는 많지만.. 일단 도착해서 내려줘. 너무 더워 여기.."
"아.. 응."
이 세계에서 두 번째 전투는 생각보다 험했던 탓에 등이 축축하고 지쳤다.
몸을 앞으로 숙여 당장 쓸 일 없는 패널 위에 조금 엎드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분명 땀 냄새 날텐데.. 얼른 내려서 좀 씻고 쉬고 싶다.
차원수의 코어에 꽂힌 날이 사라진 단검 자루를 회수하고 1호기는 다시 역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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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 도착하자 어느 정도 현장이 정리된 것인지 건물 파편이 작업용 워커에 의해 치워지고 있었다.
원래 기획에선 이 역이 반 이상 부서지는데 내가 처음에 잘 활약한 덕분인지 피해는 경미한 수준인 것 같았다.
기체의 모니터 아래로 보이는 정비복을 입은 정비원이 양 손에 경광봉을 들고 착륙 장소를 안내해주었다.
아래에 보이는 건 ... 아.
류하연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품에 은색 작전 모듈을 쥔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라고 사과해야하지.. 이번엔 울어도 안 통할 것 같은 얼굴인데..
그 외에 군인이나 작업원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 슈우..
버니어의 분사음과는 다른 소리를 내며 1호기가 천천히 지상에 내려왔다.
한쪽 무릎을 내린 1호기의 조종석이 열렸다.
일단 먼저 내릴까.
"먼저 갈게. 나중에 봐."
- 툭
2m 가까이 되는 높이에서 뛰었지만 가벼운 소리를 내며 지상에 먼저 내려왔다.
".. 수고하셨습니다. 베타니아의 파일럿."
베레시트의 운송작전을 담당하던 현장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민간 협력자 상대니깐 경례는 딱히 없었다.
"마중 고마워요. 아 이쪽이 케루브의 전투 데이터. 사령부로 전달 부탁드릴게요."
블레이저 윗 주머니에 꼽아두었던 메모리 스틱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협력 감사합니다."
나에게서 메모리 스틱을 받은 그는 살짝 목례를 하곤 그것을 자신의 손에 쥐었다.
- 안에서 내려라!
정비원에게서 마실 것을 받아 한 모금 마시며 이마의 땀을 닦는 도중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군복을 입은 요원 몇이 1호기의 조종석을 기관단총으로 겨누며 소리치고 있었다.
-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얼른 안에서 내려!
거친 목소리가 들리며 곧바로 사격이라도 할 듯 타브하의 요원은 큰 소리로 외쳤다.
- 내..내리겠습니다! 쏘지 말아주세요!
그 뒤로 얼굴이 새하얘진 주인공군이 내리자 곧바로 요원 몇이 달려들어 그를 바닥에 때려눕혔다.
어쩔 수 없나.
그는 타브하의 최고 기밀 사항을 탈취한 민간인이니깐.
요원들이 그를 결박하고 머리에 천을 씌운채 끌고가는 것을 보며
음료를 마저 목으로 넘겼다.
이제부터 더 힘들어질 거야. 주인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