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막간 : 위원회, 배신의 장소
방금 전까지 소녀와 사령관이 머물고 있던 타브하의 사령관실.
소녀는 사령관을 뒤로 한 채 이 곳을 떠나버렸다.
소녀가 떠나 사령관 홀로 남은 곳.
그 안쪽에는 사령관을 제외한 타브하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
아니 그녀라면 이 곳조차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브하의 사령관은 방금 이 방을 떠난 소녀를 생각하며 책상 아래에 숨겨진 생체인증 단말 위에 손바닥을 올리자 자신의 뒷편에 있던 벽이 열렸다.
그 벽 너머로 들어간 사령관은 계단을 타고 걸어내려갔다.
걸어내려간 곳 끝에 있던 것은 작은 난간이 달린 리프트.
고작 사람 한명이 설 수 있을만한 작은 철로 된 발판.
그가 자그마한 리프트 위에 올라타자 리프트는 점점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내려갔을까 그 아래에는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검고 넓은 공동.
공동의 벽을 따라 꺼져있는 조명과 여러 배선들이 널려있었지만 모두 꺼져있었다.
사령관의 리프트 아래에 달린 자그마한 조명장치가 지금 이 곳에서의 유일한 조명이었다.
아래를 향해 계속 내려가던 리프트는 플랫폼과 같은 곳.
다른 리프트들이 거리를 유지한 채 멀리 떨어져 교차하는 곳에서 리프트는 멈추었다.
< 예정보다 늦었군. 사령관. >
어둠의 너머에서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공동을 울리듯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비어있는 리프트가 정지해 있는 곳. 그 위에는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의 실루엣이 있었다.
사령관과 비슷한, 혹은 더 많은 나이인 것 같은 남자의 실루엣.
"바깥의 혼란을 수습하느라 늦게 되었습니다."
사령관은 목소리가 들려온 공동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깥의 혼란이란 오늘 열린 대규모 게이트와 교단의 등장을 말하는 것일까.
< '교단'의 등장도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늦은 것이지? >
방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과 다른 곳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먼젓번 남자와는 다른 조금 작은 체격을 가진, 왜소한 실루엣이 다른 리프트 위에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올바르게 일치하는가에 대해 검증을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 시간낭비로군 사령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언과는 한 점도 달라진 게 없었다. >
다른 리프트에서 들리는 세 번째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있는 리프트 위에는 다른 두 남자와는 다르게 어린아이 정도의 실루엣이 보였다.
< 자네가 만든 장난감이 충분히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군. >
이 곳을 찾은 손님은 사령관을 포함한 네 명이 끝인 듯, 다시 첫 번째로 들려왔던 남자의 목소리가 비웃음과 함께 들려왔다.
< 그래. 베레시트 계획에 사람을 닮은 장난감을 쓴 주제에, 창세의 이름을 가져다 쓰다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
비아냥이 담긴 듯한 노인의 목소리. 마른 웃음소리가 비어있는 공동을 울렸다.
< 그만. 예언에서 주어진 이름을 부정하는 행위는 이 자리에서 용서받지 못할 중죄. >
노인의 말을 부정하듯 소년의 목소리가 그 발언을 지탄했다.
< 농담일세. 예언에는 계획의 이름만 적혀 있지 않았는가? 나는 어디까지나 그의 인형놀이에 유감을 표한 것 뿐이네. >
< 신성의 모조품인 인형을 가지고 무엇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인지.. 결국은 진짜가 되지 못한 '위작' 이다. >
소년의 지탄을 넘기듯 노인은 베레시트 계획을 부정한 것이 아닌 사령관의 방식.. 1호기를 부정했다.
"저는 그 예언의 수행을 차원기로써 나타낸 것뿐입니다."
< 그렇다. 예언은 예언대로 흘러가면 되는 것. 그 역할을 수행할 형태는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다. >
남자의 목소리가 사령관의 말을 지지해주듯 말해주었다.
"이미 2호기도 생산완료에 가까워졌습니다. 적합자 또한 준비되어 있습니다."
< 벌써 2호기라. 너무 자신의 계획을 맹신하는 게 아닌가? >
사령관의 입에서 2호기와 적합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감탄한 듯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예언에 명시된 때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 운이 좋은 줄 알게 사령관. 오늘의 실적이 없었으면 자네가 만든 베레시트 계획의 형태는 폐기 될 예정이었다. 자네의 직위도 마찬가지로 말이야. >
소년의 목소리가 사령관에게 경고를 하듯 말해주었다.
오늘의 실적이 없었으면 베레시트 계획은 그대로 폐기. 사령관 또한 직위해제 되었을 것이라고.
그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오늘 그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시작한 덕분이었다.
< 1호기의 파일럿도 예언을 따라 소년으로 정해졌군. 자네가 의도한 것인가? >
"소년의 감시는 오래 전 부터 해왔습니다. 하지만 우연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 결국 예언은 정해진대로 흘러간다는 것인가.. 하지만 예언에 정해져있던 제물의 수는 다섯. 그 곱절이 나타났는데도 완벽한 임무의 완수라.. >
노인의 목소리는 1호기가 쓰러뜨린 수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 조금 미심쩍은 일면이 남아있긴 하지만 1호기는 혼자서 일십을 상처 없이 쓰러뜨렸다. 그렇다면 사령관의 장난감에 조금 투자해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
소년의 목소리는 그 의문을 덮듯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 예언을 믿고 그 첫 형태를 성공으로 이끈 것은 인정해주지. 2호기의 건조 또한 허가해주겠다. >
"감사합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2호기의 건조를 허가하자 사령관은 조금 긴장이 풀린듯 난간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이 조금 덜어졌다.
"예언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한 백업.. 베타니아의 조력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 예언에는 이름만 언급되었던 베타니아 말인가.. >
< 괜찮지 않은가. 결국 예언의 수행을 돕기 위한 조력일 뿐이다. 예언 본편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해. >
목소리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베타니아를 가볍게 넘겼다.
그들에게 있어선 예언의 수행만 중요할뿐, 그것을 돕는 수단은 상관이 없었던 것이리라.
< 예언의 첫 장은 제물의 수가 조금 변했더라도. 1호기는 예언의 결과를 그대로 수행하였다. >
< 이 세계에는 우리들의 이치로 알 수 없는 인과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분이나마 그 인과의 편린을 얻는데 성공했다. >
<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예언' >
< '시나리오 시트' >
세 목소리는 마치 하나의 목소리가 된 것 처럼, 아니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 처럼 공명하여 말했다.
< 사령관. 두 번째 예언을 완벽하게 준비하게. >
< 그것을 위한 지원은 충분히 돕겠다. >
< 다가올 '승천'을 위해. >
그 말을 끝으로 플랫폼 위에 놓여있던 소년, 남자, 노인의 실루엣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세 사람의 실루엣이 사라지자 어두운 공동의 벽면에 달려있던 조명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실루엣들이 사라지자 사령관은 지친 숨을 내쉬며 플랫폼의 난간을 붙잡고 땀을 비 오듯 흘렸다.
타브하의 위원회를 담당하는 저 셋은 온갖 역경을 해쳐나갔던 사령관에게도 언제나 버거운 상대였던 것이리라.
과연 그녀도 저 위원회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언급하는 예언.. '시나리오 시트' 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아내를 떠나보낸 곳에 나타난 백색의 거인과 신비한 소녀.
오늘 베레시트 계획의 성공적인 시작도 그 신비한 소녀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아직 위원회는 소녀의 존재와 백색의 거인에 대한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위원회에는 그저 베타니아라는 이름의 서포트 기관이라고 설명했을뿐.
그 것이 사령관에겐 위원회를 상대로 숨긴 패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위원회 조차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녀라면.
사령관은 위원회의 감시에서 조금은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지직..
그는 긴장이 풀린듯 숨을 고르고 난간에 달린 자그마한 버튼을 눌렀다.
방금전까지 꺼져있었던 공동의 조명이 서서히 빛을 밝히먀 어두운 밑바닥을 비추었다.
조명이 들어온 어두운 공동 한 가운데에는 백색의 형태가 있었다.
그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온전하지 못한 부서진 것.
형태를 잃은 채 망가져있는 백색의 거인.
그 거인의 앞에 놓여있는 흑요석 처럼 검게 빛나는 조각들.
망가진 거인의 모습은 사령관이 추모공원에서 처음 보았던 소녀의 기체와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만약 저 거인이 없었더라면 베레시트 계획은 탐사선이나, 미사일, 혹은 거대한 함선같은 형태로도 바뀌었을 수 있겠지..
저 거인과 아내가 타고 온 차원 너머의 기술이 있었기에 사령관이 계획한 형태로 베레시트 계획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추모공원에서 처음 만난 소녀를 돕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녀가 타고 있던 거인 또한 이 곳에 잠든 거인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깐.
타브하 가장 깊은 이 곳.
기적을 바라는 기지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무덤과도 같은 곳.
아겔다마.
그녀는 이 곳에 있는 거인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까..
만약 알게된다면 이 것에 대해 숨기고 있던 자신에게 실망할 것인가..
위원회와 소녀 양쪽 모두를 배신하고 있는 것과 같은 사령관의 처지와 어울리는 이름의 장소였다.
기적의 장소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배신.
깊은 곳에 망가진 채 잠든 거인을 확인한 사령관은 다시 버튼을 눌러 조명을 껐다.
- 지직..
조명이 사라지자 부서진 거인은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겼다.
빛이 사라져 어둠이 백색을 삼켜낸 것을 확인한 사령관은 리프트를 조작해 다시 사령관실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시트'의 두 번째 예언이 곧 있으면 시작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주어진 예언도 위원회가 기대하는 방향대로 성공해내야한다.
언젠가 위원회가 가지고있는 예언을 벗어나 그가 준비하고 있는 진정한 목적을 수행할 날을 위해서.
지금은 이 깊은 배신의 장소에 잠든 거인은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 소녀에게 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