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인터미션
"으음..."
정신없던 시나리오의 1화를 보내고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씻은 뒤 바로 잠들어버렸었다.
일어나 몰골을 보니 옷 하나 걸치지 않고 그저 이불만 조금 만 채 잤던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지치다니.. 인간이 아닌 존재더라도 체력은 결국 열다섯 정도 여자아이 수준인건가.
일어난 뒤 시간을 확인해보니 겨우 새벽 여섯시가 조금 넘은 정도였다.
전날 피곤하게 행동했어도 이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다니. 역시 젊음은 이런 사소한 것부터 다르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들자 세면대 앞에 서서 세수를 하며 오늘의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 류하연과 정식 오퍼레이터 계약을 위한 계약서를 챙겨가야하고..
시나리오 시점보다 일찍 합류하게 된 주인공군은.. 아직 그의 심리상태는 잘 모르겠지만 협조적으로 나올까..
그리고 어제 사령관실에서 멋대로 말을 맺고 나온 것이 기억났다..
분명 사령관도 위원회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프겠지. 그런 사령관에게 여자애처럼 감정풀이만 하고 나오다니, 같은 어른으로써 실격이었다.
나중에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무례하게 나와 버린 일에 대해서 사과해야겠다.
위원회.
이름만 들으면 거창해보이지만 사실은 별게 아니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전투 실적에 따라 S, A, B, C, D 같은 클리어 스코어를 채점해주는 시스템이다.
몇 턴 안에 끝냈느냐, 얼마나 피해 없이 클리어했는가에 따라 에피소드가 끝날 때 위원회의 판정결과가 나오고 그 점수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된다.
분명 어제 전투 실적은 좋긴 했는데.. 내가 케루브를 터뜨린 탓에 S는 무리고 A 정도일거다.
이 세계에 오기 전 까지는 그냥 스코어보드 시스템이었는데 이 세계에서는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기껏 해봐야 돈 많은 노인네들 집단이겠지. 애초에 그 이상으로 설정을 짜넣은 적이 없었다.
사소한 생각을 마치자 세면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속옷을 입었다.
이제는 이 몸으로 지낸지 한 달이 되었다고 브레지어를 채우는 방법도 제법 익숙해졌다.
아마 일주일쯤 후면 정식 급여가 나오는 날일 텐데 그 때 옷이라도 좀 사러 가볼까. 본판이 이쁘면 꾸며주면 제법 볼만하겠지.
저번에 사령관의 비서에게서 같이 받은 베타니아의 요원 채용용 서류를 책상위에서 챙겨서 가방에 넣기 위해 가방을 찾는데...
어제 케루브의 안에 남겨둔 채 나왔던 것 같다... 기체가 터지면서 같이 터졌겠지..
괜찮아.. 비싼 것도 아니었고 투박한 디자인이었으니 새로 사면 그만이다..
시간은 어느덧 일곱시가 가까워져 교복을 입고 목에 리본을 맸다.
당장 담아갈만한 가방이 없어서 계약서가 담긴 서류 봉투를 BX에서 간식을 사고 나서 받은 비닐봉투에 넣고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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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지나고 3월이 왔다지만 아직 새벽 공기는 차가운 것 같다.. 같다 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이 몸은 이상하리만큼 추위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분명 입가에선 조금 김이 나왔지만 피부로는 쌀쌀하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이게 2%의 차이인걸까.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기지 외부로 나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비닐봉투의 손잡이에 손목을 넣고 흔들며 정류장으로 나왔다.
기지 밖으로 나가는 버스가 한 번에 원하는 목적지 까지 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기지 외부로 옮겨주는 버스이기에 역까지 옮겨주는게 전부였다.
아쉽지만 이 정도라도 감지덕지다. 지금 나이라면 자가용은커녕 면허조차 따지 못한다. 로봇은 되는데..?
그런 사소한 불만을 품던 중 정류장에는 군인이나 연구원들의 가족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이 제법 보였다.
대부분이 출근을 준비하는 직장인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의 아저씨 아주머니라는 느낌이었다. 원래의 나 였다면 저 사이에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었겠지.
적어도 학생은 없는 것일까 싶어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살펴보던 중 교복을 입은 학생 한명이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키는 보통 남자애 정도에 약간 어깨가 움츠러든 피곤한 얼굴의 남자애..
자세히 보니 주인공군이었다.
어제 아버지에게 끌려가더니 아버지가 머무는 관사에서 하룻밤 묵느라 이 정류장에 버스를 타러 온 모양인가보다.
"안녕 초보군."
왠지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 보다 이렇게 부르는 게 입에 착착감겼다. 주인공군이라고 부르면 괜히 혼란을 줄 수 있으니 초보군이라 부르는 게 제일 좋겠지.
약간 바닥을 보며 걷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를 하자 잠깐 놀란 듯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너는 그.."
자연스럽게 그를 부른 나와는 다르게 나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는 듯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조금 웃어줬다.
"이름 못 외웠구나.. 조금 실망인데."
"그런건 아닌데 조금 거리낌 없이 부르기엔.."
"상관없는데?"
"어?"
"나만 편하게 부르면 좀 그렇잖아. 너도 그냥 적당히 불러."
쑥맥같은 녀석. 어? 내가 학교다닐때는 말이야... 아니 나도 저랬었던 것 같다. 미안..
"묘..묘월아."
"그래. 그렇게 부르니깐 듣기 좋네. 더 불러봐."
약간 우물거렸지만 그래도 이름은 제대로 불렀네. 장하다.
"묘월아."
"응"
한번 부르니깐 잘 부르네. 그런데 왜 조금 진지해보이지. 뭔가 중요한걸 말 해야 하는 것 처럼
"너.. 들고 있는 봉투 터져서 바닥에 물건 떨어지려고 한다."
"어?!"
그의 말을 듣고 내가 들고 있던 비닐봉투를 보자 적당히 휘휘 들고다니면서 바닥에 긁혔던 건지 비닐이 반쯤 찢어져 서류봉투가 밖으로 달랑거렸다.
미안해요 복지단.. 세금 들어간 물건 대충 흔들고 다녔어..
"고마워.. 안 알려줬으면 흘릴 번했네. 중요한건데.."
다 찢어져가는 봉투를 여러 겹 접어서 손에 쥐곤 서류봉투를 옆구리 사이에 꼈다.
"가방은 안매고 다녀?"
"어제 케루브 안에 놓고 내려서.."
"케루브라면.. 아."
어제의 전투가 생각난 것인지 주인공군은 납득이 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갈 때 까지 내 가방에 넣어줄까?"
"괜찮아. 가벼운 건데 뭐."
어차피 약관이 조금 담긴 서류가 들어있는 종이봉투일 뿐이다. 이 정도야 그냥 옆구리에 끼고 가면 그만이지.
- 브르르..
주인공군과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쯤에 버스가 도착했다.
대형 버스답게 덜덜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버스.. 버스에 먼저 올라타서 자리를 잡은 뒤 내 옆의 빈자리를 손으로 탁탁 쳤다.
"얼른 앉아. 자리 누가 앉겠다."
"괜찮아?"
"뭐가?"
"..아니야."
다 우중충한 얼굴의 아저씨 아주머니들 뿐인데 동년배.. 아니 또래 애랑 앉는 게 낫지. 왜 괜찮냐고 물어보는거지. 옆자리가 대수인가.
결국 주인공군을 옆에 앉히곤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출근시간대라 잠깐 눈 붙이는 분들도 많으니깐 여기선 조용히 있어주는게 좋겠지.
그렇게 잠깐 침묵의 시간을 가지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눈이 그대로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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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
"일어나.."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대로 푹 잤나보다. 어제 일찍 잠들었는데도 잠깐 눈을 감았다고 금방 푹 잘 줄이야.
이것이 젊음인가...
나는 시대의 눈물.. 아니 침이라도 흘렸을까 해서 입가를 한번 슥 닦았지만 다행히 그러진 않았나보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할건 눈물만이.. 아 이제 남자 아니지만.
주인공군은 나를 어떻게 깨워야하나 고민이라도 했던 듯 했는데 저 갈데없는 손이 그 증거인 것 같았다.
그냥 이럴 땐 '선배님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흔들었으면 금방 깼을 거야..
"어으.. 다 왔나보네."
다른 승객들이 내리느라 어수선한 것을 보니 일어날 때가 되긴 했던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쭉 잤으면 도로 기지로 돌아가 버렸겠지.
"다음엔 그냥 흔들어서 깨워.."
살짝 감겨오는 눈을 조금 손가락으로 부비곤 품에 안고 있던 서류봉투를 든 채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정지한 곳은 어제의 전투가 있었던 역.. 다행히 피해가 적었던 탓에 무너진 곳 주변만 안전을 위한 천막이 쳐져있고 다른 곳은 멀쩡했다.
이야 이 정도면 선방했어. 누구인지 몰라도 정말 천재 파일럿이네.
"정말로.. 여기서 내가 싸웠던 거구나."
주인공군은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어제의 전투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하룻밤사이에 정리가 잘 된 것인지 차원수의 시체나 피 같은 흔적은 깔끔하게 사라져있었지만 붕괴된 건물의 일부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초보치곤 잘 싸웠지. 역이라도 부쉈으면 아마 오늘 버스에 탄 사람들한테 몰매라도 맞았을 거야.."
그 분들도 전부 지하철 타러 가시는 것 같으니깐. 출근 노선이 열 일곱짜리 꼬마애 때문에 무너졌다고 하면 엄청 화냈을 것이다.
"더 잘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오오 향상심도 보인다. 얘 정말 내가 알고 있던 그 주인공군이 맞는 것인가. 좋은 쪽의 발전을 보이네.
"마음이 올바르네. 초보군은."
기특하다고 느낀 탓에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키 차이가 제법 컸다. 발꿈치를 들었는데도 그의 머리에 손이 닿지 않는다.
"뭐하는거야?"
"잠깐 무릎을 낮춰보게."
나의 행동이 뭘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는 주인공군에게 어제의 베테랑 파일럿의 말투로 무릎을 낮추라고 말했다.
"이렇게?"
의문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금방 무릎을 굽혀주자 눈높이가 나랑 맞게 되었다.
"응. 잘했어. 방금 것도 잘했고, 어제 전투도 잘 한거야. 덕분에 거리가 지켜졌잖아?"
이제야 높이가 맞게 되어서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이야 풍성하구나 주인공군. 30넘어도 걱정없겠어.
조금 쓰다듬어주려는게 생각보다 손에 감겨오는 느낌이 좋아서 한참이나 만지고 있었다.
"저.. 칭찬해준건 고맙지만 부끄러우니깐 그만해주지 않을래?.. 사람들도 보고 있고."
정신을 차려보니 출근길 직장인들의 따가운 시선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시선이 나와 주인공군 쪽으로 모이는 것을 느꼈다.
역 앞 광장 한가운데에서 교복차림의 학생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왠지 민망해져서 손을 뒤로 슥 뺐다.
"흠흠.. 그래. 늦겠다 얼른 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뒤로 꽂히는 것을 느끼며 호다닥 지하철의 개찰구로 먼저 달려갔다.
어제 전투의 결과가 좋았던 탓에 지하철도 멀쩡하구나. 이 정도면 전투평가는 A정도 줄 수 있겠어 주인공군.
내 뒤를 천천히 따라오는 주인공군을 뒤로한 채 승강장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