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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인터미션 (44/152)



〈 44화 〉인터미션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가는 동안 주인공군과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사람들이 꽉 끼는 지하철에 끼어져 학교가 있는 역에 내렸다.


으아.. 출근시간대의 지하철은 역시 지옥이야. 몸이 작아지니깐 더 바짝 끼는 것 같았다.


내릴 역이 되어서야 겨우 내리는 학생들 틈에 껴서 내릴 수 있었다.


내리고나니 옷도 구겨졌고 엉망이다. 잠깐 숨을 내쉬고 옷깃을 정돈하고 어깨로 올라가려는 리본도 가지런히 아래로 내렸다.


그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덩치가 있으니 나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진 않았던 것 같다.

"가자 초보군.."

조금 지친 걸음으로 그와 함께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런걸 매일 겪어야한다고? 역시 어제 역이 부서졌어야 했나..



그와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시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이 학교에 진학하기 전 까지는 친척집에서 자라면서 근처의 학교를 다녔다던지 하는 이야기.

"... 그래서  학교에 오게 된거야."


"그렇구나. 자기 꿈이 있다니 멋지네."


이미 알고 있던 설정이기도하고 특별한 이야깃거리도 아니라 그냥 적당히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맞장구를 쳐줬다.


얘 은근 자기 이야기 해주길 좋아하네. 그는 이야기가 끊기는 어색함이 싫은 것인지 무언가 필사적으로 대화를 이으려고 했다.

원래도 이런 성격이었던가?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그의 설정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교실까지 도착했다.

교실에는 기숙사에서 지내는 덕분에 먼저 도착해있던 류하연이 내 옆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하연씨 안녕-"


그녀를 향해  손을 들고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힘찬 아침인사는 올바른 하루 시작의 첫걸음이라구.


"묘월씨 안... 옆에 남자애 ..누구?"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 하려던 그녀가  옆에 서있는 주인공군을 보고 표정이 살짝 굳었다.

또 이상한 오해를 살 것 같은데.. 어차피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거니깐 솔직하게 말하자.

"어제 그.. 파란색 차원기에 같이 타고 있던 남자애에요.."

아침이라 학생이 몇 없긴 했지만 대외비에 가까운 정보였으니 그녀에게 조금 다가가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아하.. 어제 개처럼 끌려가던 범죄자.."

그녀의 날카로운 평가가 주인공군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사실이긴 한데.. 그렇게 말하니깐 이상한 짓을 하다가 잡힌 거수자 같잖아..




"트..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건 조금 너무한 평가가 아닐까요? 결과적으론 좋은 일 하다가 그런거잖아요.."


1화가 끝나자마자 주인공군에 대한 히로인의 평가가 너무 박한 것을 보고 어떻게든 마이너스로 향하는 평가를 올려주려고 변론을 했다.

"묘월아.."


나의 필사적인 실드에 조금 감격한 듯 주인공군은 찡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 봤다.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깐 넌 걱정하지 마. 배드 커뮤니케이션 만큼은 막아보겠어.

"왜 저 개는 묘월씨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불러..?"


그녀는 손에 든 책을 내려놓았다.


아앗.. 저 표정은 돌이킬 수 없는 표정이다. 류하연의 눈빛이 도서관에서의 '그 눈빛' 으로 바뀌었다.

"내..내가 편하게 불러도 된다고 했으니깐...요"

솔직히 조금 쫄았다. 십대 여자애 무서워..


"나는 묘월씨의 이름을 부르기 까지 192시간이 걸렸는데 어째서  개는 48시간도 안 걸려서 묘월씨의 이름을 쉽게 부르는거야? 묘월씨는 저런 개가 취향이야? 토끼랑 개가 친하다니 정말 의외네 토사구팽이나 다름없는 관계인데 왜 그렇게 친한 걸까"

한 번도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발언에 내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 같았다.

도..도와줘 주인공군

틀렸다. 저 녀석 애초에 이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나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 같은 애처로운 표정이다.

이래서 젊은 남자애들이란..

"하연씨!"


"..응 ?"


일단 소리부터 내지르고 보자.


일단 그녀의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은 나의 외침에 멎었다.



"하연씨는  전속 오퍼레이터. 누구보다 저와 가까운 사람이에요!"

"전속.. 가까운 사람.."

"맞아요! 초보군보다 알고 지낸 시간도 길고 더 친한 사람이에요."


"저런 개랑은 알고 지낸 기간이 달라.."

끝까지 주인공군은 개 취급이구나.. 나 때문에 원작에서 사근사근하던 조언가 관계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슬프다..


"그러면 왜 나한테는 존대하는 거야? 내가 개보다 못해?.."

"그건.."

여기가 승부수다.



책을 내려놓았던 그녀의 양 손을 붙잡아주고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곧장 바라본 채 말했다.

"하연씨가 소중한 사람이니깐 그런거에요. 차근차근 관계를 밟아갔으면 하니깐요.."

예전의 나였다면 손을 잡은 순간부터 뺨이라도 얻어맞을 짓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미소녀. 승부를 걸어 볼만했다.


"그래서 조심히.. 존대까지 해가면서 관계를 쌓아가려고 했던 건데.. 제가 하연씨를 불편하게 만들었나봐요.."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시나리오에선 큰 활약을 하지 않던 그녀를 베타니아에 영입하려는 거니깐 언제나 신중하게 대했다. 이것은 전부 사실이다.



"너무.. 이기적이었죠? 이래선 전속으로 남아달라는 이야기도 못하겠네요.. 어 왜 눈물이.. 으흑.."

연기에 몰두하다보니 감정이 조금 흔들려버린 바람에 눈물이 조금 나와서 뺨을 타고 흘러버렸다.

젊어진 덕분인지 감정에 잘 휘둘리게   같았다.

"미..미안해 묘월씨..울지 마.. 나..난 그런줄도 모르고.."

저번 도서관에서는 상황을 넘기기 위한 연기로 흘린 눈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의 눈물은 감정의 고양 때문에 나온 눈물이라 그런지 쉽게 멈추지 않았다.

"흐윽..윽..끄윽.."


이렇게 된 거 그냥 멈출  까지 울어보자. 솔직히 서른넘고 제대로 울어본 기억도 없었는데 이럴 때라도 울어야지.




교실에서 그렇게 울고 있자 다른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야 쟤 왜 우는 거야?'


'모르겠는데.. 저기 같이 있는 남자애가 뭐 잘못한 거 아니야?'

'뭐? 저 남자애 때문에 우는 거라고?'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쟤 쓰레기네..'




순식간에 주인공군의 평가를 망쳐버렸다.

미안..

---



그렇게 삼분정도 울고  뒤 눈물이 멈췄다.


후우...개운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류하연은 내 머리를 끌어안아 품에 안고 있었고 주인공군은 계속 멀리서 비난을 듣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 곁에 서있었다.


자꾸 그녀 앞에서 곤란한 일이 있을때마다 울게 되는데, 이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 조금 더 마음을 강하게 먹고 살아야겠다. 예전처럼..

"흠흠.. 조금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다."

여고생의 품속에 안겨서 울다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네. 너무 운 탓에 얼굴이 축축한데..


"..손수건."


한쪽 손을 뻗어 주인공군에게 손을 까닥였다.

"..안가지고 다니는데."


"다음부턴 가지고 다녀요 초보군.."


준비성이 부족하네. 뭐 내거 꺼내면 그만이지만.


계속 안아주고 있던 그녀의 품에서 조금 벗어나서 블레이저 상의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축축해진 눈가를 닦았다.

사령관이 숙소를 준비해줬을 때 같이 있던 비품 중 하나. 흰 손수건에 분홍색 토끼가 조그맣게 마킹되어있는 손수건이다.

내가 울음을 멈추는 것을 보자 몰려있던 다른 학생들의 시선은 어느덧 각자의 일을 따라 사라졌다.


"아무튼.. 두  다 앞으로 반에서든  때문이든 자주보게 될텐데 서로 친하게 지냈으면 해요."

왠지 체력도 빠진 기분이 들어서 내 자리에 앉고 조금 숨을 골랐다.


"약속해줄  있겠어요?"


앞으로 만날 사람들도 많은데 계속 이런 트러블이 생기는 것은 사양이다. 일부러 류하연을 응시하곤 말했다.


"..그럴게."

그녀는 아직 못마땅한 게 조금 남은 것 같았지만 여기서 또 잘못했다간 내가 계속 울까봐 참기로 한 듯하다.

"나도.. 뭐.. 미안."

잘못한 것은 없던 주인공군이지만 졸지에 사과를 했다. .. 왠지 미안하니깐 나중에 따로 뭐라도 챙겨줘야지.




"악수"

"응?"

"뭐?"

"악수하세요 둘이.."

이것이 내 학창시절식 관계처리법이었다. 대충 당사자 간의 감정이 풀렸건 말건 악수로 종결시키는.. 정전협정과도 같아 보이는 행위였다. 이런 짓을 내가 시키게 될 줄은..


머뭇거리는 둘의 오른손을 내 양손으로 나눠잡곤 굳어있는 둘의 손바닥을 억지로 펴서 마주잡게 시켰다.


그리고 양 손목을 잡고 흔들어주었다.



"악수했으니 둘이 더 이상 싸우지 않기에요.."


한번 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해졌는데   울면 정말 체력이 다 빠질  같다.


생각보다 우는 게 엄청 지치는 행위구나.. 아직 하루가 제대로 시작도 안했는데 체력을 빼긴 그랬다.




다행히 내 억지 악수가 통한  둘의 표정은 조금 못미더워보이긴 했지만 이 이상 갈등을 일으킬 것 같진 않았다.

"잠깐만.. 세수좀 하고 올게요."

"..같이 갈까?"

"금방 다녀올 거니깐 혼자 다녀올게요."


악수가 끝나자 천천히 손을 풀어낸 류하연이 나에게 물었지만 괜찮다고 말하며 넘겼다.

감정이 이렇게 몰려본게 간만이라 잠깐 혼자 있고 싶었으니깐.

---




태연하게 교실 밖으로 나왔지만 지나가다 내 얼굴을  번씩  사람들의 표정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그것도 그렇겠지 웬 애가 아침부터 울어서 눈이 부어있으니깐. 그래도 다들 모르는 사이라 그런지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아서 편했다.

화장실에 도착해 거울을 보니 원래 빨갛던 눈이 눈가까지 빨갛게 부어서 정말 빨갰다.


이건 진짜 토끼 눈이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올려 찬 물을 손에 받았다. 운 탓에 몸이 좀 후끈했는데 찬 물을 손에 맞으니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손에 가득 물을 받곤 허리를 숙여서 눈가와 뺨을 몇 번 문질러 닦았다.


두어 번쯤 더 차가운 물의 느낌이 기분이 좋아서 눈물자국을 닦는 것과는 별개로 계속 얼굴을 부벼 닦게 되었다.



그렇게 세수를 마치고 아까의 손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내고 거울을 보자 제법 울었던 모습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사라졌다.


 얼굴에 관심 가지고 쳐다 볼 사람이 아니라면 알지도 못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화장실을 나서던 중 화장실 맞은편의 실습실에서 나오던 사람과 마주쳤다.




"아.. 선배."

"너 얼굴이 아침부터 왜 그래?"

나의 눈이 부은 얼굴을 바라본  말하는 붉은 머리를 한 2학년 선배.


운동화 살  만원 까준 고마운 히로인.

서예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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