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인터미션
"안녕하세요 선배."
세수를 마치고 나오던 중 맞은편에 있던 실습실에서 나오던 붉은 머리의 히로인. 내 초반 가계를 지탱해준 고마운 그녀.
서예린과 마주쳤다.
아직 아침조례도 시작하기 전일 텐데 벌써부터 실습실에 있었다니. 아마 그녀도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 같으니 일찍 나와서 하나라도 더 공부한 거겠지.
생각해보니 나랑 주인공군만 기숙사가 아니고 죄다 기숙사 사는 느낌인데.. 거의 다 지방에서 올라온 거니깐 어쩔 수 없긴 할 거다.
"너 아침부터 얼굴이 왜 그래.."
방금 전 까지 울고 있었으니 세수를 해도 운 흔적은 어쩔 수 없었나보다. 피부가 하야니깐 붉게 부은 게 더 보이겠지.
"별거 아니에요.."
혼자 감정이 급발진해서 울었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 않나. 적당히 얼버무리자.
"누가 울리기라도 한거야?"
"그런건 아니에요.."
혼자 울었습니다...
"슬슬 조례 시작하겠네요. 어서 돌아가 봐야.."
다를 때 만났으면 저번에 할인 적용해줘서 고마웠다던지 그런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상황이 조금 머쓱해서 그대로 빠져나가려 말을 돌렸다.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지?"
빠져나가려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그녀는 나에게 아무 일도 없던 게 맞냐며 물었다.
"네. 누가 울린 거였다면 저도 똑같이 울게 만들었을거에요."
혼자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다른 놈이 울려서 운거였다면 그 놈도 똑같이 울게 만들었을 테니깐.
"그렇구나.. 생각보단 멘탈이 강하네."
"칭찬 고마워요."
나의 대답에 안도한 듯한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꾸벅였다.
"그럼 정말 조례가 시작할거 같으니깐 가볼게요."
"그래. 다음에 또 봐."
다행히 더 붙잡지도 않고 예에전에 나이를 속였던 일도 묻지 않았다. 역시 대인배야..
예전에 헤어졌을 때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교실로 돌아갔다.
---
교실에 도착하자 아까의 울음 때문에 시선이 조금 모이는 게 느껴졌지만 가볍게 흘려내곤 자리로 가서 앉았다.
"묘월씨 이제 괜찮은 거지..?"
내 옆자리에서 아직도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한 류하연이 나의 상태를 확인하듯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요. 아 점심 끝나고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시간? 왜..?"
"오퍼레이터 계약. 계약서 가져왔거든요."
아까 정신이 없어 책상위에 내버려두었던 서류 봉투를 그녀 앞에 들어서 보여줬다.
[ CONFIDENTIAL - TABGHA / BETHANYA ]
붉은 도장으로 대문자가 가득한 영문이 찍혀있는 갈색의 서류봉투. 그 아래에는 타브하의 마크가 같이 찍혀있었다.
거창하게 기밀이라고 써있지만 기밀까진 아니다.. 외부로 누출되었을 때 위험한 정보는 계약할 때 연봉 얼마에 들어왔냐 정도지.
이런 게 다른데 알려지면 이것보다 낮은 연봉으로 들어온 사람이 배신감 느껴서 이탈할 수도 있거든.. 그냥 내 계약서가 담겨있던 봉투를 다시 써서 거창해보인거다.
"뭔가..엄청 중요한 게 들은 것 같아."
"중요한 게 맞죠. 제 전속 오퍼레이터를 구하는 계약서. 그것도 하연씨 단 한분을 위한거니깐요."
"묘월씨가 나만을 위한걸.."
작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는데 근처에 앉아있던 주인공군에게 들렸던 건지 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는 것을 봤다.
'비밀'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움직여 그에게 말하곤 작게 검지를 펴 입가에 대고 쉿 하는 모양을 취하자 그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주었다.
원래 계약자와 고용주 이외에 연봉 정보는 비밀이야..
주인공군도 아마 오늘이나 내일 쯤 계약 하겠네. 주인공군은 타브하 직할 계약이니깐 우리 같은 계약직이 아니라 정직원이겠구나.
- 드르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교실 앞문이 열리고 담임인 최종식 교사가 들어왔다. 오늘도 피곤해보이는게 사회초년생 다워보였다.
"출석은.. 뭐 다 와있는 것 같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출석도 제대로 체크하지 않고 그저 교실을 한번 둘러본 것으로 전부 파악이 끝났다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제 시내에 게이트가 열렸는데.. 다행히 우리 학교 학생이나 지역 주민의 피해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근처를 지날 땐 조심해주세요"
어제 시가지 전투 때문에 학교 쪽에도 공문이 내려왔나 보다. 학생들 주의 시키라는 정도겠지.
"그리고.. 지금 부르는 학생들은 조례 끝나고 잠깐 교무실로 따라와주세요.."
뭔가 불려갈 일이 있는 애들이 있나보다. 뭐 학기 초니 잘못한건 없겠고 가정문제나 학비 혹은 기타 자질구레한 문제겠지. 증명사진 같은걸 안냈다거나..
"김주혁, 류하연, 백묘월.."
아 그게 나네.
'불려가는 애들 누구야?'
'저기 있는 셋 같은데.. 역시 아침에 있었던 사랑싸움인가..'
그런거 아니야. 이 맴버 어디에 사랑이 있어? 하여간 십대들이란...
하필 아침에 있던 오해 때문에 미묘한 분위기가 되어버렸지만 출석부를 가지고 돌아가는 담임교사를 따라 주인공군과 류하연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
교무실에 도착하자 아침 조례가 끝난 듯 다른 교사들도 제법 들어오는 게 보였다.
버티컬이 쳐져있고 책상엔 책과 갱지가 어지럽게 놓인 풍경.. 거의 15년 만에 보는 풍경같다.
주인공군과 류하연은 왜 불려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조금 얼탄 표정으로 서있었지만 나는 왜 여기에 불려온 것인지 이유가 짐작이 갔다.
"여러분들.. 왜 불려왔는지 알겠나요?"
책상위 머그에 담겨있던 식어빠진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담임이 우리 셋을 쳐다본 채 물었다.
"타브하 관련이죠?"
"정답.."
머그잔을 내려놓은 담임이 나의 답변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다른 둘은 그런 일 때문인 건가 하고 아직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런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다음 세 명은 타브하 관련 관계자니깐 편의를 봐달라고.."
그가 책상 서랍에서 팩스용지로 뽑은 듯한 A4용지 한장을 꺼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어디까지나 출석일수를 챙겨주거나.. 대체시험에 대한 정도입니다. 학교에서 멋대로 굴 수 있다는 게 아니에요.."
학생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학업. 타브하의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정도는 보장해주겠다는 것 같았다. 다 사령관이 미리 손을 써준 덕분이겠지.
"어쩌다가 벌써 취직 처까지 잡게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곳은 분명 좋은 곳입니다. 우리 졸업생들 몇 명도 연구원이나 정비원 혹은 오퍼레이터로 가있어요."
이 세계는 아무래도 차원수나 게이트의 위험이 있다 보니 군사관련 시설이더라도 유망직종인 듯 했다. 덕분에 세계관 속에 녹아들기 편하네.
그래도 담임은 이 세명 중 둘이나 파일럿으로 가있는 것 까진 모르겠지..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것이었습니다. 급하게 가봐야 할 일이 생겼을 땐 문자라도 남겨주세요."
이 용건이 전부였다는 듯 그는 공문을 다시 책상 서랍 안쪽으로 넣고 머그잔을 들이켰다.
원래 시나리오 배경은 저번처럼 저녁시간대가 아닌 낮이나 한밤, 새벽 같을 때도 전투가 종종 있었으니깐 그 때마다 주인공군 출석일수는 괜찮은 건가 했는데 이렇게 해결이 되는거였구나.
- 각 국가들은 테러리스트들과의 협상은 없다를 발표해..
담임이 워낙 빨리 말한 탓에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는 정도였던 둘을 끌고 교실로 돌아가려던 때에 교무실의 컴퓨터로 뉴스를 보고 있던 교사의 자리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08시 58분.
국가의 수장들은 조금 고민하긴 했던 것 같지만 결국 원래 시나리오대로 아무도 교단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인 발표를 내놓았다.
약간의 손해는 있더라도 차원수는 잡지 못할 상대가 아니었으니깐. 차원기나 미사일등을 활용하면 잡을 수 있고 게이트야 워낙 변칙적인 요소다보니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상대가 차원수만 나타난다면 그렇겠지..
"묘월씨.. 안나갈 거야?"
둘을 데리고 교무실을 나서려다가 그 뉴스를 응시하는 바람에 제 자리에 멈춰 서자 둘은 나에게 안나갈 것이냐는 듯 쳐다보았지만 곧 중요 발표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잠시만요."
09시 00분
< 유감이로다. >
방금 전까지 교사가 보고 있던 모니터, 학교의 방송망,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에서 동시에 같은 음성이 들렸다.
화면 속에 있는 것은 노란 법의를 입은 가면의 남자. 노란 옷의 왕 이었다.
< 그대들의 입장은 잘 들었다. 약속의 땅을 피로 적시지 않길 바랬지만 그대들의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 >
< 부디 그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었기를 바란다. >
딱 세 번의 말을 끝으로 방송은 다시 원래의 방송으로 돌아왔다.
어제 밤처럼 계속 반복해서 송출한 것도 아닌 딱 한 번의 방송만으로 끝나버렸다.
"..학생들 전부 셸터로 대피시키세요."
교무실의 가장 끝 쪽 다른 자리와는 다르게 혼자 책상이 놓여있던 교무부장쯤 되는 사람의 자리에서 학생들을 대피시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우리도 피난할까요?"
오전 수업은 없겠네.
---
오늘부터 수업이 시작되는 건가 싶었지만 방금 전 교단의 발표 덕분에 학교 지하에 마련 된 셸터로 모두 피신했다.
10년 전에 열렸던 거대한 게이트 사건 때문에 그런 것인지 어지간한 시설들은 이렇게 대피할 공간이 지하에 잘 준비되어 있었다.
약간 혼란스러울 상황이었지만 평소부터 대피훈련이 잘 되어있었고 학생들도 침착하게 대응한 덕분에 십분도 안 걸려서 모두 대피할 수 있었다.
반 별로 모이도록 지정된 장소에 나와 류하연, 그리고 주인공군 셋이 도착하자 담임은 인원 체크가 끝난 듯 돌아갔다.
"어제의 게이트.. 또 열리는 걸까."
셋이 모여앉아 있었는데 주인공군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군은 앉으면서 자기 손을 얹고 있던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간 듯 교복셔츠가 조금 구겨지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걱정되겠지. 얼떨결에 파일럿이 되긴 했지만 전투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징집되는 것이기도 했으니깐. 자기 아버지에게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묘월씨도 다시 나가는 거야?"
이번엔 류하연쪽에서 걱정이 섞인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도 어제 나의 무모한 조종을 봤고, 전투에 나서야한다니깐 걱정을 해주는 것이리라.
"두 분 다 걱정하지마세요. 게이트는 열리지 않을거에요.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둘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마음에서 적어도 오늘만큼은 게이트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제 같은 규모의 게이트를 열려면 많은 자원이 소모되니 교단이라도 하룻밤 만에 그런 준비를 할 수는 없으니깐.
"그냥 조금 쉬는 시간이라 생각하고 쉬고 계세요. 이대로 있다 보면 금방 점심시간이겠네요."
"넌 정말 멘탈이 강하네.."
나의 태연한 대답에 주인공군은 대단하다는 듯, 비꼬는 것이나 비아냥이 아닌 진심에 가까운 말투로 말했다.
"이런 혼란 속에선 혼자서라도 잘 살아가야죠.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불가능할건 없어요."
본래의 나 같았으면 절대로 꺼내고 싶지도 않았을 정신론이었지만 이럴 때 젊은이 둘에게 조언해주기엔 적당한 말이었다.
주인공군을 편하게 불러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멘토가 되어줄 때니깐 조금 신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었다.
"초보군도 멘탈을 꽉 잡으세요. 어제 잘했잖아요? 하연씨도 마찬가지에요. 그 혼란 속에서 작전보조를 잘 해줬어요."
주인공군을 띄워주다가 어제 류하연을 제대로 칭찬하지 않은 것이 생각난 바람에 양 손을 뻗어 둘의 머리에 하나씩 얹어주었다.
"모두 잘했어요. 다음에 저녁이라도 사줄게요."
그 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주인공군이야 아침에도 머리를 만져주었지만 류하연의 경우 지금 손 이외에 처음으로 다른 곳을 건드린 것이었는데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주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조언을 해 주거나 그들을 이끌어줄 어른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상처입고 아픔을 알면서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다.
내가 반절 밖에 안 되는 나이로 이 세계에 오게 된 것은 그런 그들을 또래의 위치에서 지켜봐달라는 게 아니었을까.
적어도 내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확실하게 해야겠다.
쓰다듬어주던 손을 내려놓고 다시 셋이서 시시한 이야기를 몇 개 나누었다.
몇 번 대화가 이어지자 긴장되던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비상사태도 해지된 듯 다시 교실로 돌려보내졌다.
교실에 도착한지 얼마 후 점심시간이 되어 셋이서 급식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