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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화 〉인터미션 (46/152)



〈 46화 〉인터미션

결국 오전 수업은 하나도 듣지 않은 채 점심을 먹으러 오게 되었다.

대피령이 내려졌었던 탓에 평소 점심시간 보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금방 준비가 된 게 대단하구나 싶었다. 식사 준비때문에 미처 피난하지 못했다는 그런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메뉴는 분식이었다.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 분식이 나오면  날은 버리는 식단이나 다름없는 구성이었는데 요즘은 참 알차게 나온다 싶었다. 다른 세계니 같은 기준을 잡아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

식사를 마치고 류하연과의 계약서도 작성해야하기에 학교에서 멀지 않은.. 교단의 박쥐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로 왔다.

수업시간 전 까지만 돌아올 수 있다면 외출을 해도 큰 문제는 없는  같았다. 세상 참 좋아졌네.

낮 점심시간인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게 정말 첩보용 시설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폐업하겠다 싶은 카페였다.


"안녕 삼촌-"

카운터에서 멍하니 폰만 바라보고 있던 카페의 점장에게 인사를 한마디 던지고 류하연과 주인공군 셋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오.. 묘월이니?"

손님인줄 알고 표정이 밝아졌다가 나의 얼굴을 보자 조금 표정이 굳어 보이는 점장이었다. 잠입입무였던 주제에 이젠 진짜 소상공인이 다되셨네.

미소녀가 둘이나 왔는데 저런 표정은 좀 그렇지.



"단골손님도 같이왔는데?"


나와 주인공군과는 제법 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남은 어색한 류하연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를 앞으로 내세웠다.


"아..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가씨는 가끔씩 오시던 분이네.. 옆의 남자애는?"


"반 친구이면서 동시에 직장동료?"

"특이한 관계네."


어른에게 친구를 소개해주는 것 같은 미묘한 분위기가 되자 주인공군도 조금 굳어 있다가 인사를 건냈다.

 말을 끝으로 점장은 자리에 가서 앉아있으면 알아서 한잔씩 가져다주겠다며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가버렸다.



우리도 한산한 카페의 안쪽자리로 가서 내가 제일 안쪽. 다른 둘을 맞은편에 앉혀두었다.

일부러 그 둘을 점심시간까지 쪼개서 이런 안 팔리는 카페까지 와서 점장에게 소개해주는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데려온 그가 여러  정보를 흘려주었던 1호기의 적합자라는 것.


두 번째는 이 둘은 내 편이니깐 함부로 건드리지말라는 교단을 향한 일종의 마킹이었다.


전날 틴달로스에게 경고한 게 어느정도 흘러들어갔을테니 점장도 저 둘을 상대로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 타브하가 직접적으로 교단에게 준 피해도 없으니깐 그럴일도 아직 없겠지만.

"..그래서 어제 밤에 겨우 풀려났어."


"고생했겠네.."

셸터에서 셋이 시간을 같이 보낸 덕분에 어느 정도 친해진듯 주인공군과 류하연 둘이서도 이야기를 제법 나눴다.


역시 주인공군은 주인공이구나 아침의 배드 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서 벌써 이렇게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걸 보니깐 안심이 되었다.

류하연도 그런.. 무서운 광적인 성격은 나에게만 보여주는 것이었는지 조금 낯을 가리는 것 같긴 하지만 문제없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것 같았다.


사이좋게 지내는 둘을 보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묘월이는 정말  웃네."

"하루에도 여러  웃어.."

어느새 두 명의 이야기 포커스가 나에게 옮겨졌나 보다 이야기하던 둘의 시선이 나에게 마주치자 그냥 한 번 더 웃어줬다.

웃을 수 있을  웃어두는게 여러모로 정신건강에 좋거든.

"음료 세잔 나왔습니다."

그렇게 웃고있는 동안 점장이 음료 세잔을 가지고 왔다.

이제 슬슬 딸기철이 끝나가는 끝물인 딸기 스무디 두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개?

다른 두개는 왜 4천원짜리인데 하나는 2천원짜리인지 모르겠다. 여기 카페 대접이 왜 이래 하는 마음으로 점장을 한번 흘겨봤다.


"재료가 다 떨어져서 말이야.. 원래 오후에 문 닫고 사러  예정이었어."


그러면 어쩔 수 없긴 하지. 장사가  되는 곳이니 재료도 대량으로 사두면 제  처리하지 못했을테니깐.

점장은 이 정도 설명이면 할 일은  했다는 듯 도로 카운터로 돌아가버렸다.

에이 선심 썼다.

"둘 다 쓴건 못 마시죠?"

나도 이 나이때 까지는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커피는 마시질 않았으니 아마 둘에게 달달한걸 건내주는게 낫겠다 싶은 생각에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었다.




"너는 괜찮고? 너라고  마실 것 같진 않은데.."

주인공군의 시선이 나에게 그거로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긍정했다가는 자기가 이걸 마시겠다고 하겠지.


"괜찮아요 초보군. 너무 쓰면 초보군 껄 뺏어 마시면 되니깐요."


아무래도 여자애 것을 뺏어 마시는  보다는 남자애 것을 뺏어 마시는 쪽이 나을테니깐. 그가 바꿔줄 배려는 필요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음료에 꽂힌 빨대를 한번 쭉 빨았다.

윽 쓰긴 하네.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젊어지면서 쓴걸 마시는 능력도 어린애 수준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예전엔 이런 거랑 에너지 드링크를 달고 살았는데. 여태 마시지 않았던 카페인이 진하게 들어온 탓에 조금 정신이 흐려졌다.

"..초보군 멋지게 말한 주제에 미안하지만 한입만 주세요 그거.."


괜히 장사 안 되는 집이 아니었구나. 커피를 이렇게 쓰고 맛없게 만들었을 줄이야.

이미 자기 몫의 스무디를 마시고 있던 주인공군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들고 있던 음료잔을 건네주었다.



"내가 카운터에서 빨대 받아올.."



- 쭈웁


그가 뭐라고 말하는  같았지만 이미 나는 꽂혀있던 빨대로 달달한 스무디를 한 모금 마셨다.


어른인척 한 주제에 많이 마셔 버리면 체면이 살지 않으니깐  모금 정도면 적당하다.

"아.. 살 것같다. 뭐라고 했나요? 초보군.. 아 빨대? 미안해요. 너무 급해서.."

남이 먹던 빨대로 빨다니 민폐긴 했네. 간만에 쓰고 독한걸 마신 덕분에 판단이 흐려졌던 탓에 실수를 저질러 그에게 사과를 했다.


"너..너는 아무렇지 않은거야?"

"..미안해요"

화가 난 것인지 그의 얼굴이 붉어보이길래 사과를 했다. 나이먹어서 주책을 보였네.



"그런 뜻이 아니라..."

주인공군이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화가난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뜻이 있었던 걸까.




"토사구팽"


이 때까지 조용히 있었던 류하연이 음료를 마시다가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짓곤 이야기했다.


"네?" "뭐?"


나와 주인공군은 방금까지의 이야기를 멈추고 조용히 말하는 그녀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토끼는 죽이고 개는 삶으라는 이야기에요."




우와아.. 일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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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슨 트리거를 잘못 건드린 것인지 '토끼사냥' 상태로 들어간 그녀를 둘이서 진정시키느라 오분 가량 시간을 써버렸다.

나도 뭘 잘못했는진 모르겠지만 계속 잘못했다고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하자 그녀의 기분이 풀린 듯 했다.


다행히 내 행위가 별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긴급피난의 행동이었다는 게 그녀의 판결인듯 했다.



이 모든 게 교단 탓이다.

다음에 틴달로스를 만나면 부하 관리 똑바로 하라고 푸념이라도 해주어야겠다.



"자.. 그래서 오늘 점심시간에 바깥까지 나온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자 나는 아침부터 들고다니던 서류봉투를 열어 그녀에게  안에 들어있던 문서를 보여주었다.


서류의 대부분은 업무상 취득하게 되는 비밀에 대한 유지 엄수 관련과 근무시간에 대한 설명, 각종 약관이 담긴 채용 서류였다.

사실 주인공군은 먼저 돌아가도 상관없지만 그도 곧 이번 주 안으로 계약을 할테니 미리 계약이 어떤 것인지 봐두는게 좋을 거란 생각에 일부러 같이 데려왔다.


"하연씨가 일하게 되는 건 타브하 소속 독립기관 베타니아. 타브하이긴 한데 좀 달라요. 약간 외주 계약 같은 느낌?"

타브하 직할이 아닌 내가 임의로 뽑는 외주인원이니 정규직이라기 보단 계약직에 가까웠다.



"학교에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전달되었으니깐.. 근무상황은 방과 후가 되는데 비상상황에는 수업 중에도 나와주셔야해요."

서류봉투에 같이 담아왔던 형광펜을 꺼내 그녀가 확인하기 좋게 근무시간이 적혀있는 항목을 그어주었다.

"연차도 있어서 휴가도 쓸 수 있긴 한데.. 이것도 비상시에는  수 없구요."

전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부서라 이런 것은 어쩔  없었다. 그래도 평시에는 보장해주니깐..




"당장 내일부터 학교 끝나고 계속 기지로 오라는 건 아니에요. 당장 일해달라는건 아니고 미리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일찌감치 찜해두고 싶은거니깐요."

아직 한참 놀고싶어할 나이의 아이를 퍽퍽한 사회 속으로 벌써부터 끌어올 생각은 없었다.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상황이 급박해지기 시작할 때 바로 베타니아를 위해 일해주길 원해서 채용하는 것이니깐.



"그렇구나.. 어느 정도 알겠어."


근무에 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설명하자 그녀는 내가 체크해준 곳을 꼼꼼하게 읽어보곤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아는 범위내에서 그녀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나와 그녀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인지 주인공군은 그냥 눈을 크게 뜨고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너는 나중에  계약서 쓸 때 너희 아버지랑 같이 계약하러 가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게요. 급여에 대한 이야기에요."


 부분이 가장 긴장되었다. 아무리 근무여건이나 환경이 좋아도 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은 거기서 백지가 되어버리니깐.

"하연씨가 받게  금액은  달에 이 정도.."

그녀 앞에서 오른손의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여주었다.

"..이긴 한데. 프리랜서 계약이라 세금을 직접 정산하셔야해요.. 다행히 사령관님이 기지와 연결 된 세무법인을 통해 처리해주신다니깐 어려운건 없을거에요..."

그녀는 내가 펼친 손가락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 그래서 세금을 후처리하면 실제 수령액은 한 달에 이 정도 입니다."


펼치고 있었던 오른손의 약지를 접자 손가락이 두개가 되었다.


앞자리 3에서 2로 바뀌다니 정규직도 아닌 계약직인데 혹시나 액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에 손이 조금 부르르 떨렸다.

사실 이 금액이면 오퍼레이터 초봉이랑 별 다를 바가 없는데 정규직이 아니라고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쩌지.. 그냥 타브하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월씨.."

"네.. 넷!"

설마 이렇게 영입에 실패하는 건가 싶어 그녀의 작은 속삭임에도 긴장해서 놀라버렸다.



"반대쪽 손"


"..네?"

"반대쪽 손으로도 얼마인지 알려줘."

"이..이렇게 말인가요?"


의미를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영업직이나 다름없었다. 영업대상의 비위에 맞춰주는게 좋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왼손 검지와 중지를 오른손처럼 두개 펼쳤다.



- 찰칵

"에?"


그녀는 양 손가락 두개를 펼치고 있던 채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던 나를 갑작스럽게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찍었다.


"..사실 액수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부모님도 일찌감치 경험을 쌓을 수 있으면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

"그러니깐.. 계약할게. 묘월씨의 오퍼레이터가 될 거야."

방금  갑작스러운 촬영 때문에 멍해져있던 나에게 그녀는 오퍼레이터가 되어주겠다고 말했다.

방금 뭘 당한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계약 성립이라 웃음이 지어졌다.

"고마워요 하연씨!"

유능한 인재를 스카웃했으니 방금 일이야 어떻게 되든 좋았다. 십대 소녀의 짐작할 수 없는 행위 정도겠지.

왠지 모르게 주인공군만 이쪽을 얼떨떨하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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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계약사항은 그녀의 부모님도 읽어보시게 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 생각해 서류봉투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슬슬 점심시간도 끝나가고 있었으니 카페를 나서 학교로 돌아갔다.



"나는 잠깐 부모님께 전화좀 하고 올라갈게.. 묘월씨랑 개는 둘이 먼저 올라가.."

중요한 일이니 바로 알려드리는 게 여러모로 준비하기 편하겠지.

그녀를 두곤 나와 주인공군 둘이서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참 초보군."


"응?"


"오늘 학교 끝나고 시간좀 내줄  있어요?"


류하연의 오퍼레이터 계약도 끝났으니 다음 상대는 주인공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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