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인터미션
"오늘? 괜찮긴 한데 왜?"
시간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주인공군은 왜 자기에게 물어본 것이냐는 듯 나를 계단 아래에서 올려보았다.
"사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한 달간 네 시간을 가져갈거야."
"한 달이나? 뭘 하려고?"
한 달이라는 시간을 말하자 그는 약간 곤혹스러운 듯 나를 올려보던 시선을 살짝 내렸다.
갑자기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을 달라고 요구한 셈이니 그에겐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꼭 필요했다.
"베레시트 계획의 1호기 파일럿에 맞는 파일럿으로 널 훈련시킬 거야."
"훈련.. 그렇구나."
어제의 급작스러운 해프닝 때문에 바로 1호기의 파일럿이 되었다지만 베레시트의 코어에 새겨진 것 때문에 채용된 것이지 그의 실력 덕분에 채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열일곱 소년을 4월에 열릴 게이트에 대비해서 한 사람 몫은 하게 키워둬야하지 않겠는가.
원작처럼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위기를 겪으면서 성장은 할 수 있겠지만 그러다보면 놓치는 일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도 경험부족으로 실패할 일이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온 이상 그런 일은 겪게할 수 없었다.
마침 내가 1화의 시나리오를 살짝 비튼 덕분에 그는 구금당하지 않고 이렇게 오늘 학교에 나올 수도 있었고 류하연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쌓을 수 있었다.
이런 보너스로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그의 기량을 단시간만에 키워 줄 방법이었다.
"그 훈련을 오늘부터 내가 한 달간 도와줄게."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어째서인지 모르게 나는 차원기의 운용방식과 세심한 컨트롤까지 마치 오랫동안 겪어왔던 것처럼 다룰 수 있었다.
이 재능을 활용한다면 지금은 단순한 학생에 불과한 그를 에이스 파일럿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원작 게임에서도 전투 에피소드가 아닌 일상 파트에서는 재량껏 훈련을 받을 수 있었으니깐. 앞으로 한 달은 혹독하게 굴릴 것이다.
"내 방식대로 할 거니깐 분명 힘들 거야.. 하지만 따라올 자신이 있다면 계단을 올라와줘."
계단의 창가에서 비치는 햇빛을 등진 채 그를 향해 당당하게 선언하고 계단 아래에 있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과연 주인공군은 나의 훈련을 따라올 각오를 하고 있을까.
계단 아래에 있던 주인공군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계단을 올라왔다.
다행히 그가 계단을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려와 있었다는 불가의한 현상은 없이 그는 나의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어제 너에게 파일럿이 되겠다고 약속한 주제에 여기서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잖아?"
제법 멋있는 말도 할 줄 아는구나. 괜히 주인공이 아니네.
"후후.. 좋은 각오야 초보군."
사나이끼리의 약속이란 거 멋지구나. 이제 나는 사나이가 아니긴 하지만..
"대신 부탁이 있어."
"부탁? 그냥은 들어줄 수 없고 훈련을 잘 마친다면 들어줄게."
곧바로 협상까지 걸어오는 자세가 대단했지만 성과 없이 보상은 없는 법이다. 무상의 행복은 없어요!.. 하지만 무언가 동기가 된다면 더 의욕적으로 따라올 수 있겠지.
"만약 내가 훈련을 마치면..."
어떤 부탁을 할까. 십대 소년의 부탁이라니 짐작이 안가네. 나 때는 주로 성적이 올라가면 뭘 사달라던지 용돈을 올려달라는 그런 게 대부분이었는데 요즘 애들은 뭘 요구할까.
설마 터무니없는걸 요구하진 않겠지... 내 재량에서 불가능하면 사령관에게 건의라도 해봐야겠다.
"그 때는 나를 초보군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줘."
"풋.."
그의 진심이 담겼지만 순수한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렸다.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게 된 주제에, 힘든 훈련의 성과로 바라는 것이 고작 자기를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것이라니.
지금도 부탁한다면 초보군이라는 별명 대신에 이름으로 불러줄 수 있을 텐데 이런게 소망이라는 데에서 너무 순수한 일면을 본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좋아 한달 뒤. 훈련결과를 보고 결정해줄게. 혹시 모르지 그때면 초보군이 아니라 어엿한 베테랑군이 되어있을지도."
그의 손을 붙잡은 채 잠깐이나마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
개발자군과 내가 만들어낸 아이가 이렇게나 순수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었구나.
"한 달 뒤에 성과를 보여줄게."
"절대로 안봐줄거야."
주인공군과 같이 투지가 담긴 눈빛을 교환했다.
스승과 제자와 다름없는 관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묘월아.."
"응? 왜 아직은 초보인 초보군."
그는 내 손을 놓고 조금 망설이는 듯 이걸 말해야하나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의 이름을 불렀다.
"아까.. 계단 아래에서 치마속이.. 보였으니깐 조금 조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개발자군이 디자인한 이 교복치마는 짧은편이었지.. 자신만만하게 서있는다고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있기도 했었고..
".. 봤니?"
"어쩔 수 없었어.."
조금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맹세를 나눈 사나이 (+ ex 사나이) 끼리는 이런 거에 연연하는게 아니다.
"..알려준 건 고맙긴 하지만 여자아이의 치마 속을 봤다는 이야기는 안하는게 매너에요."
괜히 의식하니깐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아서 존대가 나와 버렸다.
부끄러워진 탓에 먼저 교실로 후다닥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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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로 돌아가서 오후는 정상적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일반적인 기초 과목 몇 가지는 교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특화 과목인 지휘, 조종, 분석, 정비는 교실을 옮겨야 했기에 나와 주인공군 그리고 류하연과 함께 셋이서 이동했다.
학교에 다니게 된지 삼 일만에 드디어 첫 수업이라니.. 괜찮은 건가 이 커리큘럼.. 방학직전까지 맞출 수는 있는 건가?
커리큘럼에 대한 고민을 잠깐 하다 보니 어느덧 수업이 전부 끝나고 하교시간이 되었다.
"내일봐요 하연씨. 계약서는 부모님께도 꼭 전달해드리고 가까운 변호사 사무소 같은데에도 꼭 물어보세요. 천천히 결정해주셔도 좋으니깐요."
"잘 가 묘월씨.. 개도 안녕."
교문 앞에서 류하연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주인공군은 개 취급이구나.. 조금 안되긴 했지만 관계야 천천히 쌓아 가면 되는거니깐 힘내렴..
다행히 주인공군은 그런 별명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진 않는 타입이라 다행이었다. 뭐.. 당장 나도 이름으로 안불러주니깐 솔직히 가끔씩 이름이 기억 안 나기도 한다.
교문을 나서자 승용차 한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임다. 베타니아씨."
승용차 옆에서 정비복을 입은 채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 제 2 정비대대의 김하사였다.
그런가. 나야 독립기관이지만 주인공군의 1호기 정비담당은 타브하쪽일테니.. 제 1, 아니면 2 정비대 였을텐데 제 2정비대대가 된 모양이었다.
쉬는 시간에 사령관에게 주인공군의 훈련을 위한 인솔을 부탁했는데 곧바로 선택된 게 가장 짬이 낮은 김하사였나보다.
"안녕하세요 김하사님. 오랜만에 보네요."
내 이름이 베타니아라고 불린 것은 조금 그랬지만 나는 군복이나 정비복 차림도 아니고 명찰도 없으니.. 아 교복 가슴에 달려있긴 하구나. 어쨌건 부르는 호칭은 상관없다.
"그 옆이 소문의 1호기의.. 개발부장님 아들이라던."
"네 맞아요. 이 소년이 1호기의 파일럿이에요."
모르는 사람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주인공군의 소매를 잡아 내 쪽으로 끌어 그를 소개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인사성은 있는지 주인공군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예.. 앞으로 하교할 때 제가 교문 앞에 있을검다. 바로 기지로 갈거니깐 꼭 따라와주세요."
김하사도 인사를 받곤 앞으로 매일 하교시간에 찾아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십대 청소년이라도 일단은 파일럿이니 존대를 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 초보군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슴다. 베타니아씨."
부모의 느낌으로 그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는데 김하사의 시선은 나와 주인공군을 번갈아보더니 뭔가 혼자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곧바로 기지로 가볼까요?"
김하사가 먼저 운전석에 타는 것을 확인한 뒤 조수석 자리에 앉고, 주인공군을 뒷좌석에 앉게한 뒤 승용차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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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입구를 지난 뒤 가지고 있던 ID 카드를 정문의 헌병에게 보여주고 제 2 정비고에 도착했다. 주인공군은 아직 ID카드가 없어서 절차가 조금 걸렸지만 다음에 받급 되겠지.
이 곳이 베레시트 계획 1호기의 유지및 보수를 위한 타브하 기지의 최중요 시설이었다.
내가 속한 베타니아 베이스와는 다르게 상주인원도 제법 많고 부품 창고도 옆에 붙어있는게 본격적인 관리 시설이구나 싶었다.
"저는 정비 때문에 마저 돌아가보겠슴다.. 혹시나 일 있으시면 연락 주십쇼."
"태워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뵐게요."
나와 주인공군을 훈련 시설 앞에 내려 준 김하사는 정비일로 복귀해야한다며 곧바로 돌아갔다.
주인공군의 호송도 근무로 포함되겠지만 기지 차량도 아닌 개인 승용차를 빌려 타니깐 조금 미안해지는데.. 가끔씩 기름이라도 풀로 넣어 드려야겠다. 이 세계에서도 힘들구나.. 하사는.
훈련 시설의 입구 앞에서 ID카드를 보여주고 주인공군과 함께 거대한 이글루형 시설 안으로 들어왔다.
시설 안에 있는 것은 전술 모의 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시뮬레이션용 차원기였다.
일반적인 차원기와는 다르게 팔과 다리가 없고 흉부가 드러나 밖으로 핵심 기관인 코어가 노출되어 있었다.
머리도 일반적인 차원기의 머리에 바이저가 씌워진 채 여러 전선이 시설의 천장이나 벽면을 따라 연결되어 있었고 그 근처에는 정비복을 입은 직원이나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있었다.
우와아.. 기름때가 튀는 곳에서 하얀 가운이라니 역시 백의는 포기 못하는 게 연구원들인가..
"여기가 훈련소야?"
주인공군이 생각하고 있었던 이미지와는 달랐던 것인지 이 곳이 신기하다는 듯 마치 처음 상경한 시골청년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지방에서 올라왔으니 시골청년은 맞구나.. 미안 딱히 비하할 의도는 없었어.
"여기가 베레시트 계획을 위한 파일럿 양성장소.. 뭐 특별한 이름은 없어. 훈련소라는 이름이 적당하겠네"
우리가 올 것을 준비해두었는지 시뮬레이션 모듈 앞에 넓게 펼쳐진 여분의 공간이 비어있었다. 적어도 끝에서 끝까지 백 미터는 넘어보이는 공간이었다.
나중에 시뮬레이션 모듈을 늘리거나 정비를 위해 앞 공간을 비워둔거겠지.
혹시나 공간이 부족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그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하다.
공간을 둘러보던 중 사령관에게 미리 부탁을 해두었던 물건이 준비가 되었는지 연구원이 나에게 자그마한 박스를 가져다주었다.
"고맙습니다. 잘 준비해두셨네요."
준비해준 연구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나는 상자를 열었다.
"묘월아 그건 뭐야?"
"이건 훌륭한 파일럿을 양성하기 위한 보조 장치야."
"..기체에 장착하고 탑승하면 반응속도가 좋아지는 회로장치같은거야?"
우와 그런 매니악한 것을 주인공군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괜히 개발부장의 아드님이 아니었던 건가.
"비슷하지만 이건 너가 쓰는 게 아니야. 내가 쓸 거야"
"너가..?"
나는 상자속의 물건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붉은 캡 모자와 선글라스. 그리고 마이크 하나.
- 툭 툭
각이 날카롭게 선 붉은 캡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그리고 손에 쥔 마이크를 들고 두 번 툭툭 두들겼다.
"묘월아..?"
파일럿을 양성하기 위한 보조장치랬는데 그 안에 나온 물건을 보고 멍하게 나를 부르는 주인공군을 향해 마이크를 들고 외쳤다.
"1번 보라매!"
나의 목소리가 훈련장 스피커를 통해 크게 울렸다.
"네..네?"
자기를 부르는 게 맞나 싶어서 얼 타는 주인공군.
"대답은 짧게 네 한마디로 통일합니다. 초보군은 앞으로 1번 보라매 입니다!"
"네!"
역시 이 보조 장치는 사용자의 정신을 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목소리가 작습니다. 그 덩치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그게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크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합니다."
"네!!"
딱 한번 윽박을 질렀는데 우렁찬 대답. 좋다.
"지금부터 30초 드리겠습니다. 저기 보이는 시뮬레이션 모듈의 아래를 찍고 여기까지 돌아옵니다."
"예..?"
저기서 여기까지 돌아오려면 아마 200M..
"뛰엇!"
나의 샤우팅과 함께 주인공군은 시뮬레이션 모듈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