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폐쇄 도시
- 까득.. 드득..
대형 차원수는 게이트의 틈을 잡아 열기 시작했다.
< 게이트가 넓어지고 있어.. 저게.. 가능한 거야? 게이트는 만질 수 조차 없을텐데.. >
통신 너머로 류하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이트는 어디까지나 시공간의 왜곡.
게이트라는 단어 그대로 물리적으로 문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물이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처럼 물리력을 가할 수 없는 대상이다.
하지만 눈앞의 차원수의 팔이 게이트를 억지로 넓히듯 벌려내자 십자로 찢겨있던 게이트가 점점 더 넓어져가고 있었다.
"지휘관! 남은 포탑의 발사까지 얼마나 걸려요?"
지금 이 곳에서 유효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것은 장벽 위에 달린 포탑뿐이었다.
한번 발사하고 다섯 개 중 세개가 차원수의 공격으로 녹아내렸지만 남은 두개만 잘 쏠 수 있다면 차원수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방금 전 공격의 여파로.. 지휘 모듈의 절반 이상이 파괴되어서.. 원격 조작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
현장 지휘관에게서 들려오는 것은 참담한 대답이었다.
아까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온 광선 때문에 근처를 날고 있던 지휘 모듈이 모조리 파괴되었다는 답변.
< 지금 상황에선.. 통신망을 유지하는 게 고작입니다. >
겨우 남아있는 모듈로는 현장을 감시하는 정도와 통신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
< 본부 쪽으로 연락은 이미 넣었습니다. 하지만 증원까지는 30분 이상이 걸린다고.. >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그것도 포탑 덕분에 별 걱정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곳이니 지금 상태에서 30분이면 충분히 빠른 대처였다..
하지만 도망치려고만 해도 그 움직임을 읽어 공격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30분 이상을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포탑이 가동했다면...
"지휘관."
< 네 듣고 있습니다. >
"포탑의 원격조작은 불가능해도 수동 조작은 가능한 거죠?"
< 넵. 기본 조작 체계는 수동이었으니 가능할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
"제가 포탑을 쓰겠어요."
< 예..? >
---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체에서 내려서 포탑을 쓰시겠다는 겁니까? >
현장 지휘관에게서 당황한 듯 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뇨 아무리 저라도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요."
포탑을 쓰겠다고 말은 했지만 사도에서 내려서 포탑에 탑승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포탑의 발사도 어디까지나 프로그래밍 제어.. 원격조작이 안되더라도 가까이 붙으면 수동 조작은 가능하겠죠."
< .. 그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쉬운게 아닙니다.. 당장 포탑의 충전까지 시간도 걸릴 겁니다. >
"충전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여기에 충전지들이 굴러다니잖아요?"
- 푸욱..
바닥에 찢겨 널부러져있던 비행형 차원수의 가슴에서 코어를 꺼내었다.
< 코어를 직접 꽂는다면 충전 시간은 대폭 줄어들 수 있겠군요. 하지만 바로 옆에 붙은 기체가 반동을 견딜 수 있을 리가.. >
"견딜 수 있어요."
< 예? >
"이 기체라면 가능합니다."
베타니아 베이스에서 첫 테스트를 하던 때 활강포를 세발을 연사로 반동 없이 쏘았던 전례가 있으니 이번 포탑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 ..계속 말리더라도 결국 하실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이 쪽에선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
"남은 지휘모듈을 전부 써서 차원수의 주의를 끌어주세요. 이 쪽에서 눈이 떨어지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
"네. 바로 시작해주세요."
- 바스스..
지휘관에게 곧바로 시작해달라고 알리자 주변을 날아다니던 지휘 모듈이 게이트 주변을 향해 모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 묘월아.. 나는 뭘 하면 될까? >
지휘관과의 통신을 계속 하고 있던 탓에 방치되어 있던 주인공군이 통신을 걸었다.
"나를 최대한 엄호해줘. 혹시나 소형이나 중형 차원수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깐.."
사실 이 작전에서 주인공군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
도망쳐주는게 최고의 도움이 될 테지만 아까 내 말을 듣지 않는걸 보면 이번에도 도망칠 리는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작은 임무를 줘서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게 붙여두는게 정답이겠지.
대형 차원수가 나타난 지금 이 곳에 다른 차원수가 얼씬할 리가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 보다는 나았다.
"그 대신에 절대로 무모한 일은 하지 말아줘.. 내가 어떻게든 할테니깐."
< .. 알겠어! 열심히 할게! >
의욕 넘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라도 역할을 주니 안심한 거겠지.
"응. 기대하고 있을게. 출발하자."
- 타닥.. 탁
조종간의 페달을 내려밟아 아직 멀쩡한 장벽 위를 향해 달렸다.
---
- 고오오옥..!
지휘관은 내 부탁대로 지휘모듈을 차원수의 팔 주변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그 때마다 차원수는 귀찮은 날벌레를 쫒는 것처럼 그 팔을 휘둘러내자 작은 지휘모듈은 그대로 터져나갔다.
지휘관이 시선을 끌어준 덕분에 장벽위의 포탑까지는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대형 차원수가 나타나자 다른 차원수들은 모두 도망친 것인지 마주친 적도 없었다.
장벽 아래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막상 옆에 붙어서 살펴보니 정말 거대한 포탑이었다.
위 아래로 갈라진 거대한 레일건..
사도의 팔로 겨우 그 포신을 감쌀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막대한 병기였다.
이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아까 대형 차원수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 까드득..
한번 발사 후 고개를 아래로 꺾고 있던 포탑의 포신을 억지로 팔로 잡아 일으켜서 앞을 향해 세웠다.
- 캉!
포탑 옆에 달린 전원반을 주먹으로 쳐내자 뚜껑이 떨어져나가면서 그 안에 낡은 코어가 빛을 다한 채 미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새거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 드득..
낡은 코어를 빼내고 원래 달려있던 것 보다 커다란 중형 차원수의 코어를 새로 박아 넣었다.
- 우웅...
새 코어를 넣어주자 포탑에 전력이 충전되는 소리가 들리며 모니터 위로 전력이 충전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그 때 문득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초보군! 피해!"
- 슈우우..!
포탑위에서 재빠르게 뛰어오르자 1호기도 나의 통신을 듣고 공중으로 활강했다.
- 그오오오옥...!!
포탑에 에너지가 모이고 있던 것을 대형 차원수가 눈치 챈 것인지 거대한 팔이 이 쪽을 향해 휩쓸어왔다.
- 콰각... 각..
장벽과의 거리가 있던 탓에 포탑에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포탑을 지탱하고 있던 장벽 윗부분이 무너져내렸고 그 끝에 걸쳐있던 포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쳇..!"
- 타다다.. 닷.. 칵!
빠르게 장벽을 타고 달리며 떨어져가는 포탑을 양 팔로 붙잡고 그대로 벽을 발로 차서 지상 위로 내려왔다.
포탑은 지지대와 회전반과 탄창을 잃었을 뿐 발사를 위한 전원부와 포신, 그리고 미리 장전되어있던 탄환 한발은 멀쩡했다.
< 괜찮아?! >
포탑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보고 갑작스럽게 달려 나갔던 탓인지 걱정하는듯한 주인공군의 통신이 들렸다.
"이 쪽은 괜찮아. 너는?"
< 이 쪽도... 문제없어. >
- 기잉..
둔탁한 소리가 1호기의 관절에서 들려왔다.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방금 충격의 여파로 1호기의 반응이 더 느려진 것이 눈에 띌 정도로 보였다.
아마 내가 걱정할까봐 얼버무린 거겠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 삑..
모니터에 표시 된 충전률은 85%.. 조금만 더 있으면 쏠 수 있다.
"이대로 쏠 거야.."
이미 하단 부분을 전부 잃은 포탑이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한발이 유일한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이상 지금 쏘는 게 가장 좋겠지.
- 파악..
양 다리를 지면에 붙이고 포탑의 남아있는 포신을 사도의 오른팔과 몸 사이에 끼웠다.
- 우우웅..
옆에 붙은 포신의 끝에서 푸른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발사까지 앞으로 30초..
- 그 오오..!!!
포탑이 발사 시퀀스에 들어가자 대형 차원수도 이 쪽을 눈치 챈 듯 거대한 팔이 이 쪽을 향해 빠르게 오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15초..
지금 상태에서 방해를 받는다면 발사는 이대로 실패하게 된다.
..쓰고 싶지 않았지만 사도의 빔을 쏠 수밖에 없는건가..
- 기이..
나의 생각에 반응하듯 사도의 머리 위에 뒤로 젖혀진 뿔이 앞을 향해 기울기 시작했다.
< 하아앗..! >
사도의 머리에 달린 바이저가 완전히 머리 위로 내려와 기체의 두 눈을 가리기 직전.
- 콰아악!
1호기가 대검을 들고 달려오는 팔을 옆으로 베어 쳐냈다.
아까 레일건에 맞은 덕분에 너덜해져있던 탓에 겨우 뼈대에 붙어있던 대형 차원수의 손목이 절단되어 거대한 손이 땅 위로 떨어졌다.
- 콰아앙..!
- 그고오오옥!!!!!
대형 차원수의 손목이 땅 위로 떨어져나가자 엄청난 양의 피가 이 쪽을 향해 분사되었다.
- 고오..!
- 빠아악..!!
손을 잃은 차원수는 분노하듯 남은 팔을 휘둘러 1호기를 멀리 쳐내어 던져버렸다.
- 콰아아..
1호기는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날아가 벽을 향해 날아가 박히곤 아래를 향해 떨어져나갔다.
"초보군..!!!"
당장이라도 그를 구하러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가 이렇게 만들어 준 기회를 헛되게 할 수는 없었다.
- 샤아아아앗...!!
모니터에는 충전률이 120%를 넘어서고 있었다.
"발사..!!"
- 콰아아아앗..!!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포탑의 포신에서 푸른 강렬한 빛이 게이트를 향해 쏟아져 나갔다.
"으읏.."
활강포와는 다른 수준의 반동에 사도의 양 팔이 흔들리는 게 조종간 너머로도 크게 느껴졌다.
- 드득.. 득..
강렬한 포탑의 반동에 사도조차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점점 다리가 밀려가는 게 느껴졌다.
- 그오..옥..
이 쪽을 향해 뻗어있던 대형 차원수의 손목이 점차 팔까지 타들어 사라져가는것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까지 보였다.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 고오오옥..!!
게이트의 틈 안에서 거대한 눈이 다시 한 번 드러나서 이 쪽을 응시한 채 붉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안 돼.. 저대로 대형 차원수의 광선을 맞으면 이길 방법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1호기가..
주인공군 만큼은..!
- 사아아..
그를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조종간의 떨림이 서서히 멈췄다.
실패한 것인가 하고 느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도가 포탑의 반동을 받지 않고 있었다.
"흐아앗..!!"
반동이 멈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반동이 멈췄다면 출력을 더 높일 수 있다..!
조종간을 최대로 당겨 코어의 출력을 끝까지 올려버렸다.
150%... 250%.. 313%!
- 카가각..각...드득..득..!!
포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점차 하얗게 물들어갔다.
하얀 빛의 기둥이 게이트 너머에 있는 것을 부수어갔다..
- 그오...
게이트 너머에 있는 것은 점차 분쇄되어 사라져가며 재와 같은 잔해를 아래로 흩어냈다.
잠시 후 공중에 열려있던 게이트가 닫히며 하늘은 원래의 푸른빛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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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너머에 있는 간이 지휘소.
간이였기에 제대로 된 설비도 없이 임시 오퍼레이터 몇 명과 지휘관 한명으로 이루어진 구성이었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다급해보였다.
10년 전의 사건 이후로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게이트가 이런 임시 환경에서 발생할 줄은 누구도 몰랐었던 일이리라.
"관측 장비 복구 되었습니다..!"
그 다급함을 깨듯 한 오퍼레이터가 관측 장비의 회복을 알렸다.
"현장은.. 어떻습니까?"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현장 지휘관이 오퍼레이터에게 상황을 물었다.
"게이트.. 소멸했습니다! 생명 반응을 감지! 1호기와 아르네벳 모두 무사합니다!"
"다행이다..."
옆에서 현장 보고를 들은 임시 오퍼레이터. 류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침에 소풍하듯 나온 현장실습이 이런 큰 사건이 될 줄은 몰랐었을테다. 장벽 안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현장 영상.. 모니터에 띄우겠습니다!"
정규 오퍼레이터가 관측 장비의 패널을 조작해 현장에 남아있는 관측 장비의 카메라를 켰다.
영상에 비추어진 것은 게이트가 사라져 다시 맑게 갠 푸른 하늘과 그 아래에 있는 하얀 아르네벳.
아르네벳의 옆에는 게이트를 닫기 위해 사용한 포탑의 포신이 녹아내린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저것은.."
현장 영상을 보던 지휘관은 두 기체의 무사에 안도를 느꼈으나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본 것처럼 말했다.
"..고리?"
하얀 아르네벳의 위에는 기체보다 더 밝게 빛나는 하얀 원형의 띠가 옅게 모여 있었다.
- 지직...직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관측 장비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닌지 금방 영상이 끊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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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성공했다.. 포탑은 대형 차원수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그대로 게이트 까지 닫아버렸다.
그러나 포탑은 코어를 직렬로 연결해서 사용한 탓에 과출력을 견디지 못하고 포신은 녹아버렸고 코어도 깨져버렸다.
덤으로 사도를 두르고 있던 테나흐의 잎도 과열을 견디지 못하고 불타버린 탓에 지금은 사도의 맨 몸이 현장에 드러났다.
"초보군은..?"
- 콰앙..
녹아내린 포탑을 옆으로 내던지곤 아까 엄호를 하다가 대형 차원수에게 맞아 떨어져나간 1호기를 찾기 시작했다.
과연 주인공군은 무사할까.. 이런 곳에서 그 아이를 잃을 수는 없다..
현장 가득 깔린 먼지가 옅어지자 1호기를 찾을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장벽과 가까운 곳에 널브러져 주저앉은 듯한 모습으로 대검과 함께 내버려진 1호기.
저 곳에 그 아이가 있다.
"초보군..!"
기체는 반파 직전인 듯 상태가 심각해 보인 탓에 그 안에 있는 그의 상태가 어떨지 알 수 없어서 다급해진 탓에 사도를 몰아 그 곳으로 달려갔다.
"열엇..!"
-카드.. 득
급하게 도착해선 닫혀있는 1호기의 조종석 개폐부를 사도의 손가락으로 당겨 뜯어내었다.
억지로 뜯어 낸 조종석 안에 있는 것은 머리에서 피를 흘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주인공군 이었다.
"아...아아..!"
그의 모습을 보자 사도의 등 뒤로 다급하게 내려 해치가 뜯긴 1호기 안으로 달렸다.
".. 초보군!"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보자 손이 떨려왔다.
그가 죽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다급해져서 조종석의 벨트에 묶여있는 그의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초보.. ㅈ..주혁아..!"
이대로라면 그의 이름을 다시는 부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훈련을 마치면 불러주기로 했던 그의 이름을 불렀다.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계속 흔들었다.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주는구나..“
주인공군은 겨우 눈을 떠서 나를 쳐다봤다.
"멋지게.. 도와주려고 했는데.. 실패했네... 미안.."
정신을 차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과였다.
"바보야.. 대체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거야.."
"너가.. 지켜달라고.. 처음으로.. 부탁했으니깐.."
"그래도 그런 짓은..!"
"..너 우는거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뺨을 따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세계에 와서 시나리오의 진행을 위해 연기로 흘린 눈물이 아닌 진짜 눈물이.
원래의 나 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감정에 휘둘려버린 행위를.
"아니거든.."
지탱해주어야 할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눈을 비벼 닦았다.
"이번에도.. 손수건은 못챙겨왔네.."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니잖아.. 괜찮은 거야?"
"아까 튕겨나갈때.. 조금 부딪친 것 같아.."
"찰과상 정도인거지..?"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어느새 손의 떨림이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그가 입은 파일럿 슈트의 허벅지에 달린 주머니에서 응급 키트를 꺼내 솜에 소독약을 적셔 피가 흐르는 그의 머리에 적셔주었다.
"돌아가자.."
이렇게 길고 길었던 현장 실습은 끝났다.
---
조금 떨어진, 무너져가는 건물의 옥상 위에 인간을 닮은 형체가 있었다.
"성체의 위작을 보러 온 것이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것을 보게 되었군요."
반쯤 무너진 철제 난간에 기대어 있던 것은 1호기와 아르네벳을 내려 보고 있었다.
"이 세계에도 성자님이 계셨을 줄이야.."
1호기와 아르네벳을 지켜보던 인간을 닮은 형체는 마치 전부 타오른 양초처럼. 밀랍과 같이 녹아 무너져서 사라졌다.
그 것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