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다과회
드넓은 새하얀 대지에 놓여있는 여러 개의 검은 관.. 그 제일 끝자락에 있는 뚜껑이 열린 관 위에 나신으로 걸터앉아있는 나.
한 달 만에 꾸는 꿈이었다.
저번 꿈에서 첫 번째와 두번째 관이 사라진 것을 보고, 금이 가있는 세 번째 관을 확인하려던 참에 깨어났었다.
이번 꿈에서는 다른 관들도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있던 가장 끝자리에서 일어나 세번째 관을 향해 걸어갔다.
여전히 이음새가 없는 검은 관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풍경이었다.
조금 걷자 세 번째 관 앞에 도착했다.
다른 관들과는 다르게 균열이 가기 시작한 관 위에 누군가 앉아있었다.
은발을 하고 있는 나신의 여자.
지금의 나와 비슷한 외모라고 느꼈지만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이었다.. 아마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머리가 어깨까지 오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머리는 허리 가까이 길었지만 너저분하다는 느낌이 들기보다는 아름답게 어울렸다.
그 여자는 새하얀 대지의 고요함을 즐기듯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꿈속에 나타난 그 여자를 향해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소리치고 외쳐보려고 해도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 여자를 향해 계속 외치려던 나의 시도를 알아챈 것인 듯 그녀가 앉아있던 금이 가있는 세번째 관 위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다가왔다.
키도 나보다 큰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나를 내려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듯 입술이 벙긋거리며 움직였으나..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문장만큼은 알 수 있었다.
'너는 누구?'
그 말을 들은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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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보인 것은 근처에서 부유하고 있던 엘과, 병원의 천장이었다.
"...모르는 천장이다."
[아침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마스터.]
병원에서 깨어나면 한번 쯤 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제 병실에서 잠들었으니 당연히 내가 아는 천장이 아니겠지.
벌써 두 달 가깝게 같이 지내면서 가끔씩 보여주는 나의 기행을 엘은 늘 있던 일인 것 처럼 그냥 한마디 말만 던져준 채 넘어가 주었다.
꿈에서 본 관과 여자에 대해 잠깐 고민하다가. 지금 시점에선 별 다른 생각에 닿질 못해 그만 두었다.
아침부터 있을 검사를 위해 간단히 씻은 뒤 아직 주인공군이 자고 있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서 그의 병실로 찾아갔다.
- 똑똑
노크를 한번 하고 조금 기다려준 뒤 문을 열자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
세면실에서 소리가 들리는걸 보면 아마 씻고있는거겠지. 젊은 애가 나보다 늦게 일어날 줄은 몰랐네.
기다리는 동안 정돈이 되지 않아 이불이 대충 구겨진 주인공군이 쓴 침대의 이불을 제대로 개어주고 그 위에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지나지 않아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세면실에서 나오는 주인공군과 마주했다.
"안녕."
하루의 시작은 인사로 시작하는 게 가장 좋지.
"어..안녕.."
아침부터 나를 보자 조금 놀란 듯 했지만 그도 나의 인사를 받아주듯 살짝 손을 들었다.
"잘 잤니?"
어제 잠들기 전에 있던 일 때문에 껄끄러울 줄 알았는데 일어나서 생각해보니 뭐 그 정도야 조금 보일수도 있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게 되어서 주인공군의 얼굴을 봐도 껄끄럽지 않았다.
"..조금 설친 것 같아."
평소 자던 집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자느라 제대로 못잔 건가..
몇 년 만 더 지나면 2년씩이나 낯선 곳에서 자야 할텐데.. 그 때가면 알아서 잘 하겠지.
"검사 받으러가자."
침구도 내가 정리해줬으니 별 달리 할 건 없겠지.
이야기를 마치곤 일곱 시에 가까워져가는 시계를 보고 있자 곧 직원이 들어와 검진 센터로 안내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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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은 일반적인 건강검진과 다를 게 없었다. 단지 비싸서 찍지 못하는 CT도 찍어준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역시 파일럿은 고급인력이라 그런가 대우가 다르네.
이 검사 중 익숙하지 못한 것은 소변검사 뿐이었다..
예전에 아저씨일때는 그냥 쉬웠는데 지금의 몸으론 미묘하게 자세를 잡기 힘들어서 고생을 좀 했다.
예나 지금이나 꺼려지는 내 채액이 담긴 컵을 들고 가던 길에 주인공군과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다.
"아..안녕.."
"..안녕."
하필 이걸 들고 있을 때 마주쳐서 좀 민망해졌는데.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듯 서로 인사만 던지고 별 말을 못했다.
"..목마르지 않니?"
예전에 2년에 한 번씩 건강검진을 같이 받으러 가던 때 직장 동료에게 던지던 농담을 주인공군에게 던져보며 그에게 내가 들고 있던 컵을 건내봤다.
원래 분위기가 미묘할 땐 이런 유머도 한 번씩 던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설마 이걸 진짜 받진 않겠지.
"... 너가 주는 거라면."
주인공군은 내가 살짝 내밀고 있던 컵을 그대로 받아가버렸다!
"뭐.. 뭐하는 거야!!"
농담이었는데 정말로 그 컵을 손으로 받아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큰 소리가 나와 버렸다.
주인공군은 평소 보여주던 무던한 태도로 그 컵을 조금 높게 들었다..
어딘가의 이탈리아 갱도 아니고 자기 오.. 아니 채액을 먹이는 놈이 어디 있어..!
"도..돌려줘.."
이대로라면 정말 주인공군에게 몹쓸 짓을 하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를 말리기 위해 손을 다시 뻗었다.
"장난친 거야."
"어..?"
주인공군은 그대로 컵 두개를 병원 직원이 준비해 둔 트레이 위에 올렸다.
"매번 내가 너한테 당하기만 하는 것 같길래. 장난 한번 쳐봤어."
"..진짜 마실 줄 알았어."
"그건 좀 힘들겠는데.."
이래서 평소에 진지한 사람이 농담을 하면 주변 사람이 놀라게 되는 것이다.
한방 먹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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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자잘한 검사를 몇 개 더 받았다. 체혈도 좀 하고 CT도 찍고..
심지어 정신검진도 있었는데 대단한건 아니고 설문지에 지정 된 항목을 기입하면 되는 것이다.
..역시 기지 안에 있는 병원이라 그런지 몇몇 설문 문제는 황당한 것도 있었다. 가끔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 한 기분이 든다.. 같은 그런거.
그냥 가볍게 넘기면 되는 것들이라 금방 풀어서 제출했는데 주인공군은 오래 붙잡고 있는게 보였다.
진지하게 고민 할 설문이 있었던 걸까.. 십대는 역시 잘 모르겠다.
"잘 지내셨나요 묘월양."
검사가 다 끝나고 이제 돌아가봐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주인공군과 병원 앞으로 나오자 사령관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령관님."
"아..안녕하십니까..!"
벌써 몇 번 봐온 사이라 편하게 인사를 건넸는데 주인공군은 사령관을 보자 얼어붙은 것처럼 딱딱한 인사를 건넸다.
역시 프리랜서랑 직접 고용된 고용-피고용인 관계는 느낌이 다른 건가.
"주혁군.. 우리끼리 있을 때는 어릴 때처럼 삼촌이라고 편하게 불러도 됩니다."
"그래도.."
우리끼리라는 이야기를 듣자 주인공군은 내 쪽을 한번 살폈다.
"아 저는 괜찮아요. 두 분 아는 사이면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사령관은 애초에 내색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주인공군이 불편해하는 것 같길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삼촌."
그제서야 주인공군은 사령관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저 둘이 친척관계였던가? 설정에 그런 것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사령관님은 주혁이랑 친척이었나요?"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닙니다. 개발부장이랑은 친한 친구여서.. 주혁군이 어릴 때 부터 자주 봐왔죠."
그런 사이였나.. 애초에 촘촘하지 못한 설정으로 만들어진 세계였으니 그 간극을 매꾸듯 이런 관계가 들어올 수도 있었겠지.
"사령관님은 제 아빠니깐 주혁이는 사촌 동생이 되는 건가요?"
예전 입학식때 차에서 나눴던 농담이 생각나서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아빠... 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사령관은 그 농담을 받아주듯 조금 웃었다.
늘 피곤해 보이는 아저씨가 웃는 모습을 보니깐 안도가 된다. 이제 시나리오는 막 시작한 참인데 만날 때 마다 피곤해보이는게 늘 안쓰러워보였으니깐..
사령관이 적어도 나를 만날 때만큼은 피곤한 얼굴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비록 이 세계에서 나이는 그가 더 많아졌지만 그도 나와 개발자군이 만들어낸 아이들 중 하나였으니깐.
"그렇다면 가족끼리 모인 김에 식사라도 하시지 않겠습니까."
"좋아요. 맛있는걸 먹고 싶기도 했구요. 주혁아 괜찮지?"
"응.. 괜찮아."
아마 사령관이 직접 찾아온 이유는 어제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한 것이 목적이겠지.
식사가 아니라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드는 게 힘들어 보이는 중년의 안쓰러움을 조금 느끼곤 그의 차를 타고 식당까지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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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사령관과 자주 가던 골프 하우스 근처의 식당이었다.
미리 준비된 듯 룸에 들어가자 삼인상이 준비되어있어 곧바로 식사를 나누며 간단한 이야기를 나눴다.
주인공군이 사령관과의 자리를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길래 일부러 공통화제도 몇 개 꺼냈다.
주로 주인공군이 어제 전투에서 잘 했다. 백업이 따로 나설 일이 없었다. 같은 이야기를 꺼내 주인공군이 이야기에 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치 담임교사와 상담을 나누는 학부모가 된 기분이 들기도했다.
"묘월양. 이 뒤에 개발부장이 잠깐 뵙고 싶다는데 괜찮으신가요?"
식사를 다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차를 조금 마시고 있자 사령관이 말을 걸었다.
"네 별다른 예정은 없으니깐 곧바로 가볼게요."
"아버지가..."
개발부장이라는 이야기에 주인공군이 조금 반응했다.
아버지가 자기를 보자고 한 것도 아닌 나를 보자고 한 것에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3번 격납고로 가시면 됩니다."
"2번 격납고가 아니네요?"
"네. 3번 격납고에 준비해둔 게 있다더군요."
분명 2번 격납고가 1호기가 준비된 곳이고. 애초에 사도는 베타니아 베이스에 있으니 3번은 갈 일이 없을 텐데..
"알겠어요. 주혁이도 같이 데려가도 괜찮죠?"
"네 문제없습니다. 조금 기다리시면 정비원이 찾아올 겁니다."
"사령관님은 같이 안 가보시나요?"
"이 뒤로 스케쥴이 있어서.. 아쉽군요."
"다음에 또 뵈면 되죠.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개 파일럿 둘인데 교단 때문에 한창 바쁠 시기에 시간을 내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를 받을 정도의 일을 하진 않았습니다.. 가족끼리 아닙니까."
"좋네요 가족이란 거."
가족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사령관은 조금 미소를 지었다. 표정이 늘 지쳐 보이는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같이 웃어주었다.
주인공군만 이 분위기에 끼지 못하는 듯해서 조금 미안했지만.. 앞으로 자주 이런 자리를 가지면 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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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타브하와 베타니아 두 파일럿을 남겨둔 채 사령관은 식당을 나섰다.
- 우웅..
홀로 나와 자신의 차량을 탄 그의 양복 웃 주머니에서 작게 진동이 울렸다.
사령관은 핸드폰을 꺼내 액정에 비친 발신자를 확인했다.
[병원장]
발신자를 확인한 사령관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바꿔둔 채 운전대를 잡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원장님."
'사령관님 두 파일럿의 검사결과가 나왔습니다.'
"말씀하세요."
'타브하의 파일럿은 정상입니다.'
"..베타니아는 어떻습니까."
'그 파일럿.. 정말 사람이 맞는 겁니까?..'
"평범한 소녀이지 않습니까?"
사령관은 병원장의 당황 혹은 두려움이 섞인 말을 가볍게 소녀라는 단어로 넘겼다.
그는 이미 베타니아의 파일럿이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여유로운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 사람과 유전적으로 구조가 다릅니다.. 샘플에서 몇 번이나 검사해봤지만..'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적합자라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온게 아닌 겁니까?"
'적합자간의 패턴 차이같은게 아닙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일치하는 샘플이 하나 있긴 했습니다..'
"...어떤 겁니까?"
일치하는 샘플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사령관은 잠시 차를 세워두었다.
'10년 전 사라진 영웅.. 사령관님의 부인 되시던 분의... 유전자 샘플입니다.'
사령관의 부인. 10년 전 사라진 영웅의 이야기를 꺼낸 병원장은 조심스럽게 그 사실을 입에 담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사령관에게 어떤 무게를 가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병원장의 이야기를 들은 사령관은 잠시 동안 말을 멈췄다.
"병원장님."
'..예.'
"해당 검진기록을 1급 비밀로 지정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베타니아 파일럿의 검진 기록은 이렇게 은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