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블랙박스
해가 저물어갈 무렵 기지 정문 앞에서 주인공군과 마주쳤다.
"..오늘 학교는 왜 안온거야?"
아마 오늘 훈련도 불참한 듯 교복을 입고 이 시간에 이 곳에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내가 없었기 때문에 훈련도 불참한 거겠지..
"일 때문에.."
어떤 일인지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한 달 전 게이트를 연 테러집단의 간부와 다과회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고, 지금 시점에서 교단과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었어?"
"..비밀이야."
예전에 왜 파일럿이 되었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비밀이라고 얼버무렸다.
"방금 데려다 준 사람은 누구야?"
"알려줄 수 없어.."
교단의 간부 틴달로스. 붉은 성체의 주인이라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전부 비밀이야?"
나의 대답을 들은 주인공군은 인상을 조금 찌푸리곤 나를 쳐다봤다.
"..미안해."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주인공군에게 말해줄 수 없다..
그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다.
- 후우..
"..내일 학교에 나오긴 하는 거지?"
주인공군은 짧게 한숨을 쉬곤 나를 향해 물었다.
"응."
"내일 보자."
주인공군은 나를 등진 채 정문 안으로 먼저 걸어가버렸다.
기껏 예쁘게 차려입은 날인데 왠지 모르게 기분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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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학교로 가기 위해 교복을 입고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란테고스와의 일은 잘 마무리 되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주인공군을 마주친 것, 그의 질문에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못하고 헤어진 점이 마음속에 걸렸다.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서있던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안녕."
"안녕 주혁아.."
어제의 일 때문에 주인공군에게 미움을 받았으면 어떻게 그를 대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말끝이 조금 흐려졌다..
"오늘은 학교 끝나고 다시 훈련 하는 거지?"
"응."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다르게 그는 평소와 같은 태도로 나를 대해주었다. 괜한 걱정이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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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같은 시시한 이야기 몇 가지를 나누며 학교에 도착했다.
"안녕 묘월씨.."
학교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해있던 류하연이 인사를 건넸다.
"어제는..?"
어제 왜 학교를 빠졌냐는 이야기겠지.
"일이 있었어요."
"그렇구나.."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같이 전장을 넘으면서 신뢰가 생겼기 때문인 걸까. 예전처럼 추긍하지 않고 넘겨줬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자리를 비울 일이 많아질 수 있으니까..
조례가 끝나고 담임교사에게 불려가서 어제 결석한 이유를 적당히 둘러댔다.
타브하에도 말하지 않고 나온 일이었기 때문에 공결처리는 힘들었고 단순 결석처리가 되었다.
어차피 성실하게 다닐 생각은 없었으니 출석이 아쉽진 않았다. 학업을 신경 써줄 부모도 이 세계에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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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같이 여러 실습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을 마치고 김하사의 차를 타고 훈련시설에 도착했다.
류하연은 오늘부터 삼일 정도 오퍼레이터 실무 검정을 위해 본부의 다른 시설에서 실습을 준비하느라 훈련시설에는 나와 주인공군 둘만 이동했다.
"어제는 두 분 모두 안 오셔서 놀랐습니다."
훈련시설을 담당하는 연구원이 훈련시설의 입구에서 삼일만에 보는 나와 주인공군을 보고 반갑다는 듯 인사해주었다.
기지 관계자에게 사전 언질도 없이 무단으로 결근한 거라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정도 땡땡이 친 거죠."
내가 대답하기 전에 주인공군이 먼저 연구원에게 말해 주었다.
한 달 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리버리한 모습이 아닌 조금 처세가 생긴 모습을 보자 놀라웠다.
"하하.. 그렇습니까.. 아, 베타니아님. 부탁하신 물건. 어제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네요."
연구원은 나에게 부탁했던 물건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신청은 훈련이 시작할 때 했었는데 3주가 넘어서 도착할 줄은 몰랐지만 어떻게든 훈련 일정에 맞출 수는 있었다.
"기지간 물자이동이 처리해야 할 서류도 많아서 말입니다.."
"물건?"
"1호기의 파일럿에겐 설명해주지 않으셨던 겁니까?"
의아하다는 듯 한 반응을 보이는 주인공군을 보며 연구원은 나에게 알려준 적이 없냐고 물었다.
"직접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를 거라 생각해서요."
일부러 감췄던 것은 아니고 혹시나 신청이 반려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미리 설명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훈련시설의 안쪽으로 들어오자 내가 부탁한 물건이 도착해있었다.
1호기의 훈련모듈 옆의 비어있던 자리에 검게 코팅 된 훈련모듈이 한대 더 놓여있었다.
[ Test Module Type. Cherub - Nod base ]
모듈의 목 아래 부분에 새겨진 명패를 통해 이 훈련모듈이 케루브를 베이스로 제작된 놋 베이스의 훈련모듈임을 알 수 있었다.
"빌려오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사령관님의 허가가 떨어졌는데도 좀처럼 놋 베이스 쪽에서 승인을 내려주질 않아서 말이죠.."
"고생하셨어요."
나 대신 행정처리를 도와준 연구원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감사인사까지야.. 그런데 그냥 빌려온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있었나요?"
"테스트 목적 외에 모듈의 안쪽을 열어보거나 확인할 수 없게 해두었습니다.. 놋 베이스 쪽 담당 관리자도 왔습니다."
테스트 모듈의 아래에는 타브하와 다른 정비복을 입은 정비원들이 여럿 보였다. 아마 저 사람들이 놋 베이스쪽 인원이겠지.
"저 사람들인가요?"
"아뇨 저 분들은 고장이나 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운영 관리 인원이고.. 담당관은 내일 도착한다고 합니다. 아마 교수? 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놋 베이스의 교수..?
처음 듣는 직함이었다. 내가 알던 시나리오에는 없던 인물일 텐데.. 내일 직접 만나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지.
"아무튼 저 분들에게 이야기하면 바로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다른 업무가 있어서.."
"네 고마워요."
다른 업무가 남아있다며 바쁘게 떠나는 연구원에게 한 번 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후 주인공군과 모듈 앞에 섰다.
"훈련모듈을 한대 더 빌려 올 필요가 있어?"
주인공군은 검게 코팅 된 훈련 모듈의 앞에 서서 굳이 이게 필요한 건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차원수를 상대로 한 전투라면 훈련모듈 하나면 충분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할 훈련은 모듈 두개가 꼭 필요했다.
"훈련 마지막주차. 오늘부터 시작할 훈련은 ... 대인전투야."
"대인전투면.. 사람을 상대로 하는거 아냐?"
"맞아."
"우리가 싸울 적은 차원수잖아?"
차원수 하고만 싸우는 게 아니냐는 주인공군의 질문에 교단의 이야기를 아직 꺼낼 수 없었다.
"차원수와 싸우고 게이트를 닫는 게 타브하의 주 임무 ..하지만 정규 파일럿 훈련 과정을 마치려면 대인전투도 필수야."
"아.. 그래서 빌려온 거구나."
차원기의 정규 파일럿 과정에는 차원수를 상대로 하는 전투와, 같은 차원기를 상대로 하는 대인전투 두 가지 모두 과정 안에 들어있다.
국제 조약 때문에 전쟁에 차원기를 투입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평화로운 상태에서 맺은 조약일 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을 대비해 모든 훈련시설에서는 쉬쉬하며 대인 전투를 가르치고 있다.
일부러 타브하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한 놋 베이스에 훈련 모듈의 대여를 부탁한 이유도 놋 베이스는 대인 전투에 특화 된 기지이기 때문이다.
이번 주가 지나면 주인공군은 더 이상 연습이 아닌 실전을 하게 되겠지만.. 남은 기간 동안이라도 대인 전투에서 오는 충격을 조금 적게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빌려온 장비다.
"그래서 오늘 부터 대인 전투 훈련을 할 거야."
"그러면 누구와 싸우게 되는 거야?"
외부에서 훈련 모듈을 빌려왔으니 주인공군은 자기의 훈련을 도와줄 상대가 누구냐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상대해줄거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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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모듈은 겨우 빌려왔지만 상대해 줄 파일럿 까지 빌릴 수는 없었다.
얼마 전 주인공군이 1호기의 테스트 파일럿 자리를 강탈한 탓에 놋 베이스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모듈만이라도 빌려준 데에 감사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기지에는 대인전투에 특화된 파일럿 자체도 없으니 소거법으로 주인공군을 상대해 줄 파일럿은 나 밖에 남지 않는다.
"묘월이.. 너랑 싸우는 거야..?"
내가 주인공군의 대인 전투 상대가 되어주겠다고 말하자 주인공군은 당황한 듯 한 표정을 보였다.
"응. 내가 검은 쪽에 탈거야."
"...이길 자신이 없는데."
내가 훈련 상대임을 재확인하자 주인공군은 벌써부터 포기하는 소리를 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거야?"
"..포기하는 건 아닌데. 실력차이가 크잖아."
"내 훈련 모듈은 너가 쓰고 있는 1호기.. 4세대 모듈 보다 두 단계 낮은 2세대 모듈인데?"
기체의 반응속도부터 1.5초가 넘는 차이가 있는 구형 모듈을 상대로 자신 없는 소리나 하다니..
"..그 구형으로 차원수를 다섯 마리 넘게 잡았잖아."
처음 만났을 때 그 이야기구나.. 그걸 봤다면 저런 불평을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가긴하네.
"..알았어. 그러면 핸디캡을 둘게."
"핸디캡?"
"..처음 1분 정도는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을게. 뭐든 자신 있는 무기로 상대해봐."
이제 갓 초보티를 벗어난 주인공군에게 인심을 써서 1분 동안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겠다는 핸디캡을 뒀다.
"정말로..?"
1분이나 아무 공격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듣자 주인공군은 조금 자신이 생긴 것 같았다.
"응. 공격은 하지 않을게."
자신이 생긴 주인공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1분간 공격을 하지 않기로 다시 한 번 약속해주었다.
"만약 1분이 되기 전에 쓰러뜨리면?"
".. 한 대라도 맞추면 그 때는 상을 줄게"
주인공군은 1분이 지나기 전에 쓰러뜨리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거기에 걸맞은 상을 줘야겠지.
"상?"
"저번에 하연씨한테도 하나 주기로 했으니까.. 너한테도 하나 줘야 할 것 같아서."
그가 3주간의 훈련의 성과로 받은 것은 초보군이 아닌 이름으로 불리는 것.
그래도 물질적인 포상이 아니라 조금 불만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상을 하나 더 주기로 마음먹었다.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주기로 한 그거 말이지?"
"맞아."
"..열심히 해야겠다."
주인공군에게 훈련을 성공하면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했더니 의욕이 넘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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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군이 원래 있던 훈련 모듈에 올라탄 뒤 나도 놋 베이스에서 공수한 검은 훈련모듈 위에 올라탔다.
3주간 교관석에 올라탔던 타브하의 모듈과는 다르게 복좌식이 아닌 단좌식으로 구성된 조종석이었다.
입학식 다음 날 게이트가 열렸을 때 탑승했던 케루브와 내부 구조는 거의 동일했으나 일부 추가 장비 제어를 위한 모듈이 달려있어서 좁았다.
다행히 체구가 작은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시트도 정말 일반적인 파일럿이 탈 수 있는게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 두 모듈간의 소켓 연결 완료되었습니다. >
타브하와는 다른 놋 베이스 담당자의 목소리가 모듈에 설치 된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베타니아. 1차 대인 전투 훈련 시작하겠습니다."
- 삐이
잠시 후 짧은 비프음과 함께 훈련 모듈의 모니터에 시가지가 구현되었고 그 위에 푸른 1호기가 케루브를 타고 있는 나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1분 동안 힘내봐."
< 1분 전에 끝내줄게. >
차원수와 전투 경험 덕분인지 자신 넘치는 대답이 돌아왔다.
< 시작 하겠습니다. >
다시 한 번 놋 베이스 담당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삐이이..!!
그 순간 귀에 울리는 이명 소리가 들리며 머리를 찌르는 듯 아파왔다..
"으읏.."
갑작스러운 통증에 쥐고 있던 조종간이 살짝 떨려오며 통증을 참기 위해 이 끝으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훈련을 멈출 수는 없겠지..
- 사아아..
양 어깨에서 푸른빛을 날리며 이 쪽으로 날아오는 1호기를 피해 공중으로 뛰어 올랐다.
- 탕! 탕!
목표를 놓친 1호기는 곧바로 위를 향해 사격했으나 곧바로 옆으로 꺾어내려 건물 아래로 숨자 탄환은 허공만 가로질렀다.
"하아...하.."
기체를 몰고 있는 동안 점점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 콰악!
이명은 가라앉았지만 왠지 모를 기분 나쁜 불쾌감에 조종간을 거칠게 몰자 검은 케루브의 다리가 근처에 있던 낮은 건물에 박혔다.
남은 시간은 40초.. 40초라면 어떻게든..
건물에 박아내린 다리를 튕기듯 뻗어내 대검을 들고 달려오는 1호기를 피해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 파직..!
그 순간 케루브는 경직된 것처럼 움직임을 잠깐 멈췄다.
모니터에 표시되는 것은 발아래에 있는 전자 발산형 트랩.. 과연 무식하게 돌진만 한 것은 아니었구나.
모니터에 표시 된 케루브의 데포르메 된 화상에 왼쪽 다리가 붉게 표시 되었다.
1분간 1호기에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 키이이잉..! 파각...각..
케루브의 팔에 수납 된 톱과 닮은 단검을 꺼내 왼쪽 종아리 아래를 억지로 절단했다.
내 기체를 스스로 파손시키는 것은 약속에 어긋나지 않겠지..
1호기나 사도를 타고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방식이지만.. 머리도 아프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시간 15초..
- 후욱..!
1호기의 대검이 방금 전 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베어내는 듯 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다리를 잃은 케루브를 그대로 뛰어 올려 대검을 휘두르는 1호기를 피했다.
< 다리를.. 잘랐어?! >
주인공군의 통신이 기체의 스피커에 울려왔다.
적과 전투 중인데 통신 회선을 열어놓다니.. 내리고 나서.. 한소리 해야... 머리아파..
- 탕 ! 탕 !
한 발로 딛고 있던 건물 옥상의 바닥에 묵직한 핸드건의 총탄이 박혔다.
얼른 끝내고.. 쉬고 싶다..
7초..
기체의 페달을 강하게 밟자 방금 있던 자리에서 케루브는 거꾸로 뛰어올라 뒤로 돌듯 건물 옥상 위를 돌았다.
5초..
공중에 떠오른 케루브는 남아있는 한쪽 다리의 무릎을 굽혀 1호기를 향해 강하했다.
3초..
- 탕! 탕! 탕! 키식..!
자신을 향해 강하하는 케루브를 향해 1호기는 핸드건을 쏘다가 탄환이 떨어져버렸다.
0초..
- 카각! 콰아아..!!
묵직한 케루브의 체중이 1호기의 조종석을 무릎으로 찍어 누른 채 바닥에 깔려 도로위에서 미끄러지듯 질질 뒤로 끌렸다.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지만..
"네..패배야...주혁아.."
케루브의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1호기의 목 아래에 푹 박혔다.
< 1차 대인 전투 훈련 종료. 61초 입니다. >
놋 베이스 담당자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들려왔다..
나는 그대로 조종석 위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