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블랙박스
61초 만에 첫 대인 전투 훈련은 끝나버렸다.
주인공군에게 약속한대로 60초간은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고 회피만 했다.. 하지만 훈련 내내 찾아오는 불쾌한 두통으로 60초가 끝나는 순간 공격을 했고 1초만에 결착을 지었다..
예전 훈련때 의도하지 않은 기만으로 주인공군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적이 있어서 이런 일은 하지 않기로 생각했지만.. 얼른 끝내고 싶은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지금 조종석의 서브 모니터에 머리를 박은 채 쓰러져 있었으니까..
< 베타니아! 괜찮습니까! >
쓰러질 때 머리를 부딪친 소리가 모듈안의 마이크를 통해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는지 모듈 담당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크게 울렸다.
- 쾅! 쾅!
< 베타니아! >
모듈의 천장 위로 금속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그냥 이대로 엎드려서 쉬고 싶었다.
- 푸슈우..
"베타니아!"
타브하와는 다른 정비복을 입은 정비원이 급하게 해치를 열고 나를 부르는 모습을 봤다.
쓰러져있던 상황에서 일 분 정도 지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빠른 조치구나...
갑갑한 조종석안의 공기 대신 맑은 바깥 공기가 들어오자 아팠던 머리가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져서요."
서브 모니터에 쓰러져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어 정비원의 표정을 쳐다봤다.
정비원의 표정은 제법 볼만했다. 자기 기지도 아닌 곳에 출장을 왔는데 그 곳의 파일럿이 쓰러졌으니 당황할 만도 하겠지..
"내릴게요.."
아픈 머리는 괜찮아졌지만 속이 조금 울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모듈에서 내려왔다.
훈련시설의 바닥을 걷는 다리가 조금 떨려왔지만 모듈에서 내리자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묘월아!"
1호기의 훈련 모듈에도 돌발 사고가 전해졌던 것인지 훈련 모듈에서 내려오는 주인공군을 볼 수 있었다.
"미안해... 오늘은 조퇴할게..."
저번처럼 그에게 의도치 않은 기만을 해서 자존심에 상처를 줬을까봐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과가 먼저 나왔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그냥 미안해."
방금 두통을 겪은 탓인지 논리적인 사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만 던질 뿐.
"연구원님. 방금 전투.. 복기 가능한거죠?"
"아, 네 가능합니다만.."
"그걸 더미 파일럿 데이터로 운용해서.. 아무튼 쟤 훈련 좀 도와주세요.. 먼저 퇴근할게요.."
아픈 머리는 괜찮아지고 있었지만 속이 울렁거려서 이 답답한 곳에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급하게 용건만 전달하고 훈련시설 밖으로 급하게 나가는 나를 보고 그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었다.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
"난 괜찮으니까.. 가서 훈련이나 마저 해."
란테고스가 이 곳에 오기 까지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내 컨디션 불량으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지금 훈련이 중요해? 네 상태가..."
"중요해 !!!"
옆을 따라 걸으며 나에게 계속 말을 거는 주인공군에게 크게 소리쳤다.
누구 때문에 타브하와 사이가 좋지 못한 놋에 모듈을 빌려왔는줄 알고서나 하는 이야기인가.
지금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면.. 도시가 녹아내리기 시작할 텐데..
고작 교관 한명 빠진다고 저런 태도를 보이다니. 참으로 철없는 행동 같이 느껴졌다.
내가 소리를 지르자 주인공군은 그 곳에 멈춰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소리친건 미안해.. 그래도 돌아가 줘. 혼자 돌아갈 수 있어..."
"... 알았어."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 못해서 소리를 지른 게 후회가 되었지만 효과는 있었던 것 같았다.
주인공군은 발을 돌려 훈련시설로 다시 돌아갔다..
지금은 주인공군에게 허투로 시간을 보내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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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군을 돌려보내는 것 까지는 괜찮았지만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토할 것 같은데 정말 쏟아낼 것 같지는 않고..
오 분 정도 걷다가 너무 지쳐서 도로 경계석 위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푹 숙였다.
어린애한테 소리를 지르다니... 나는 정말 최악의 교육자다.
교단의 일을 설명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분위기가 미묘해졌었는데 그 일이 지난지 하루도 안되서 소리까지 지르다니..
주인공군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감돌며 무릎을 모은 채 무릎 위로 머리를 묻어 숙였다..
- 빵!
시끄러운 경적 소리에 머리를 들어올렸다.
하얀 승용차가 이 쪽을 향해 크락션을 울리고 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기지 외곽 쪽이라 교통에 방해를 끼칠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민폐가 된걸까..
- 위잉..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갔다.
"거기 학생! 괜찮... 베타니아?"
운전석안에 앉아있던 남자는 이전에 얼굴을 봤던 현장 지휘관이었다.
"..안녕하세요 지휘관님.. 아니 지휘관 오빠..."
머리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속을 울렁이는 불쾌감 때문에 배를 잡고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왜 이런 곳에서.. 어디 아파?"
남들이 보기에도 아파보였던건가.. 약한 모습은 아무에게나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조퇴하는데 조금 속이 안 좋아서.."
"병원까지 데려다 줄까?"
"지금 일하러 가고 있던거 아니야..?"
"환자를 방치하는 것 보다는 낫지."
길에 널브러진 환자를 수습해주다니 사마리아인 같네..
"..데려다 줘."
혼자서 나아지겠지 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 보단 병원에 가보는게 좋을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연구원에게 부탁해서 병원에 가볼걸. 괜히 다른 사람의 업무시간만 뺏고 있구나..
잠시 후 차를 세워두고 내린 지휘관의 부축을 받아 뒷좌석에 앉아.. 앉으려고 하다가 옆으로 푹 누워 기대는 꼴이 되었다.
"..많이 아픈가보네."
오늘은 여러 사람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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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좌석에 누운 채 잠깐 잠들었다가 차 뒷문이 열리자 그 때에서야 잠에서 깼다.
"여기 어디.."
어디겠어. 민폐 끼치고 얻어 탄 차의 뒷자리지.
"일어날 수 있겠어?"
군복을 입은 지휘관이 뒷문을 열고 나에게 손을 건넸다.
"잠깐 자니깐 조금 나은거 같은데.. 그냥 이대로 자면 안 돼?"
정말 아파서 죽을거 같다가도 정작 병원 앞에 도착하면 미묘하게 낫는 때가 있는법이다. 지금도 조금 그랬고..
"안돼. 병원 관계자랑도 연락 끝났어."
일반 기지 직원이 아니라 파일럿이라 그 정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건가.. 저번 독실때도 그랬으니까.
혼자 차에서 일어나 걸으려고 했으나 몸을 들어 올리자 또 기분 나쁜 메스꺼움이 있었다..
"업어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엄청 친절하네.. 이게 사람 좋다는 건가..
"부축만 해줘.."
아까 길에선 정말 업혀가야 했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결국 지휘관에게 어깨를 살짝 잡혀 부축받은 채 병원 안 까지 들어왔다.
접수를 마치고 접수처의 의자에 기대어 누워있자 금방 의료진이 도착했고, 저번에 메디컬 체크를 받았던 곳의 진료실까지 도착했다.
"..이건 파일럿병이겠군요."
"파일럿병이요..?
백의를 입은 의사는 나의 증상을 듣더니 파일럿병 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적합률이 높은 파일럿일수록 익숙하지 않은 기체에 올라타면 코어와 반발이 생깁니다.. 최근에 새로 배치받은 기체나 코어를 쓰는 무언가에 올라탄 적이 있습니까?"
"오늘 다른 기지에서 빌려온 훈련 모듈에 조금.."
"역시..."
나의 이야기를 들은 의사는 차트에 펜을 들고 무언가 써 갈겼다... 전혀 못 읽겠네.
"실례지만 적합률은 어느정도십니까?"
파일럿에게 스펙을 묻는거나 다름 없는 질문이라 조금 민감한 질문이었다.
"61%에요.."
"높을수록 증상의 발현률이 높더군요. 어떻게 보면 인재들만 걸리는 병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심하진 않을텐데."
의사는 적합률을 듣자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조금 의아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61%면 상당히 높은 수치니깐.. 실제 수치는 113%였지만..
"파일럿병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파일럿병을 유발한 기체에 올라타지 않는거지만.. 담당자에게 코어와 싱크를 조금 조정해달라고 하면 될 겁니다."
"저 선생님.. 그런데 증상이 아직도 나타나고 있는데요.."
의사는 내리고 나면 증상이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아직까지도 어지러움이 남아있었다.
"약 처방 받아서 조금 복용하시면 괜찮아질 겁니다. 초임 파일럿들이 자주 겪는 일입니다."
그것으로 진료는 끝난 듯 진료실을 나서 약을 처방 받은 후 바로 복용하자 조금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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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귀중한 근무시간을 할애해서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 주고 곧바로 숙소까지 데려다 주느라 운전을 하고 있는 지휘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완전히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가서 쓰러져버렸을 것이다.
"뭘. 사령부에 연락해준 너가 더 고맙지.. 남은 근무시간은 공가처리 해준다더라."
약을 먹고 정신이 조금 들고 나서 내가 바로 한 일은 사령관에게 문자를 넣어둔 것이었다.
지휘관이 나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느라 근무를 빠지게 되었으니 내 연가에서 사용해달라고 했는데.. 그냥 나와 지휘관 둘 다 공가 처리가 되었다.
정신이 조금 더 들자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은 어쩔 수 없다.
"다음에 밥이라도 살게.."
"열 살은 더 어린 애한테 뭘 얻어먹을 정도로 궁하진 않아."
도와준 지휘관에게 감사의 표시로 다음에 밥이라도 사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 파일럿이라 많이 버는데?"
"이 쪽은 호봉이 있어."
"그러네... 아무튼 고마워.."
"사주는 건 됐고. 다음에 점심 상대나 같이 해줘. 기지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늘 혼자 먹어.."
조금 불쌍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휘관이라는 자리가 남들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방 독신자숙소 앞에 도착했다.
"아, 다음에 이런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줘. 사령관님 보다는 편할거 아니야?"
차에서 내리려던 찰나 지휘관이 앞으로는 자신에게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소속이 다르니 직속상관은 아니지만 작전상으론 엮여있는 사이니까.. 타브하의 수장에게 귀찮게 구는 것 보다는 낫겠지.
"번호 모르는데.."
"핸드폰 줘봐."
교복 블레이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휘관에게 건네주자 번호를 찍어주더니 통화 버튼을 한번 눌러 착신이력을 남겨 번호를 교환했다.
"됐다. 다음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소속은 다르더라도 파일럿의 관리도 지휘관의 일이야."
"고마워 지휘관 오빠.."
약을 먹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 때문에 말이 조금 몽롱하게 나왔다.
"다음에 봐."
그와 번호를 교환한 뒤 손을 흔들어주고 곧바로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생각해보니 여기 와서 누구에게 번호를 준 건 처음이었네.
틴달로스나 점장, 사령관은 각자 폰을 받을 때 부터 들어있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약기운 때문인지 금방 몽롱해져서 잠들었다.
---
[..스터]
[...마스터 !!]
나를 부르는 엘의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려 눈을 떴다.
[..학교 안가실 거에요?]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잠든 건가.. 그래도 잠에서 깼더니 어제의 불쾌한 두통은 싹 사라졌다.
단지 교복이 엄청 구겨져 있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몇시야 엘?"
[11시 47분이에요.]
..학교가기엔 이미 많이 늦은 시간이 아닐까.
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계속 깨웠던 듯 하지만 내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엘은 최선을 다했다..
일주일에 두 번이나 무단결석이라니.. 학교 번호라도 알아내서 전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집에 들어와서 대충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켜봤다.
문자가 한 통 와있었다.
병원에서 이야기를 들었고, 학교에는 이야기 해두었으니 오늘도 상태가 안 좋으면 쉬어도 된다는 사령관의 문자였다.
역시 사령관은 참 어른이다...
사령관에게 신경써주셔서 감사하고 오후 훈련부터는 다시 참여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시간은 애매한 시간.. 어제 저녁도 거르고 아침도 먹지 않아서 조금 배가 고팠다.
조금 이르지만 일찍 준비해서 훈련시설에 먼저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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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오후 두시가 조금 넘어서 훈련시설에 일찍 도착했다.
훈련 일정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지금 훈련 시설에는 타브하 관계자만 있는게 아니라 놋 베이스쪽 인원도 있기 때문인지 바빠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제는 시설 인원들에게 걱정을 끼쳤으니깐 반성의 의미로 비타민 드링크를 여섯 박스 사왔다... 무겁긴 해도 힘들진 않으니깐 들고 올만했다.
놋 베이스쪽 인원도 있으니깐 이 정도는 사와야겠지.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던 탓인지 시선이 전부 나에게 쏠렸다.
타브하와는 다른 검은색 기조의 부대 와펜을 어깨에 붙이고 있는 정비원들 사이로 조금 특이한 금발의 여자가 보였다.
나이가 이십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며 회색 정장을 위 아래로 갖춰 입고 검은 힐을 신은채 백색의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
언뜻 보면 사령관의 비서와도 닮은 복장이었지만 위에 걸친 하얀 가운과 검은 금속위에 새겨진 이름표가 그녀가 누구인지 나타내주고 있었다.
[Prof. Diblaim - Nod base]
그녀가 놋 베이스의 디블라임 교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