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블랙박스
다음날. 또 늦잠을 자는 일 없이 학교에 갈 준비를 마쳤다. 벌써 목요일인데 이번 주는 학교를 두 번 밖에 안갔구나..
오랜만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 멀리서 주인공군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좋은 아침이야."
이 쪽은 전날 밤에 교수가 말해주었던 교육자의 방식과 자질에 대해 고민하느라 늦게 잠들었던 탓에 조금 졸리지만..
주인공군은 푹 잤겠..어라?
"..안녕..."
딱봐도 졸려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어제 몇 시에 잤길래 꼴이 그래."
훈련받는 동안은 컨디션 관리를 꼭 하라고 여러 번 말해줬었는데 그 말을 해준 당사자 앞에서 저렇게 엉망인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세시쯤"
엄청 늦게 잠들었네..
"뭐 하다가 그렇게 늦게 잔거야? 또 몰래 연습하고 그런거 아니지?"
첫 훈련을 시작했을 때 쯤 무리하게 주말 밤을 새어가며 구형 훈련 모듈로 연습했던 것 처럼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시뮬레이션상의 상대와는 다르게, 이번엔 직접 내가 상대해주는 훈련이었으니까.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좀 못 잤어.."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주인공군이 얄미워보였지만,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건 힘든 일이니까..
"컨디션 관리 잘해. 오늘만 봐주는 거야."
내 느슨한 태도로 보면 다음에도 봐줄 것 같았지만, 일단 주의는 줬다.
- 푸슈우
그런 충고를 건네자 금방 버스가 도착해서 버스에 먼저 올라탔다.
'..누구 때문에 못잔 건데..'
등 뒤로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중요한 이야기라면 다시 말해줬겠지. 대수롭지 않은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
지하철이 조금 밀린 덕분에 주인공군과 둘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피해 교실에 도착하자 담임 교사가 이미 출석을 부르고 있었다.
"백묘월.. 학교를 격일로 나오는구나."
출석부를 보던 교사는 나의 얼굴을 보더니 들고 있던 펜으로 출석부의 마킹을 지웠다. 아마 결석표시 한 것을 지운 거겠지..
"아하..하.."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무안하게 웃곤 자리에 가서 앉았다.
왠지 모르게 다른 반 아이들의 시선이 따갑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힘들게 시험을 치뤄 이 학교에 온 아이들일 텐데 그 학교를 초반부터 설렁설렁 다니는 내가 이상해보이겠지..
"..묘월씨 오늘은 학교 왔네."
내 옆에 앉은 류하연의 눈도 역시 따가웠다. 이틀 전에 일 때문에 빠졌다고 해놓고 하루 건너서 또 학교를 빠졌으니 저런 시선을 보내오는 게 이해가 갔다.
"...안녕하세요 하연씨.."
회사 다닐 때 지각한 사유를 이사님께 말할 때 보다 더 쫄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왜 안온거야?"
"몸이 조금 아파서요.."
거짓말은 아니다. 단지 그 여파로 너무 푹 잤다는 게 문제였지..
"아팠어?"
아팠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나를 심문하듯 쳐다보던 그녀의 눈빛에서 조금 걱정이 어렸다.
아.. 젊은 애에게 걱정 받고 싶진 않은데.
"이제 괜찮아요. 잠깐 컨디션이 나빴던 것뿐이에요."
"다행이야.."
괜찮아졌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연씨랑 주혁이도 있는데 그냥 안나올 리가 없잖아요. 친구가 있으니까."
아직 걱정하는 듯 한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시선을 맞춰서 이야기했다.
"친구.."
친구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다행이네..
"..그냥 오기 싫어서 안 온거였다면 불량토끼라고 부르려고 했어.."
"그런 일은 없어서 다행이네요."
"맞아.. 아직은 음란토끼일 뿐이니까."
"앗..!"
아직까지 폐쇄 도시에서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학교에서 음란하다는 이야기는 금지에요.."
십대들의 호기심 섞인 시선만큼 잔인하면서 괴로운 것은 없으니까 괜한 집중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치만 맞잖아.. 그 때 찍은 사진도.. 읍"
더 이야기 하려는 듯 한 그녀의 작은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불량? ..사진? ..음란? '
키워드를 줏어들은 듯한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나의 뒤통수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부..부탁해요."
"..."
내 절박한 표정을 본 것인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반에서 이상한 소문이 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학교 수업이 끝나고 오래간만에 셋이 김하사님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오늘 연수만 끝나면.. 정식 오퍼레이터야."
뒷좌석에 주인공군과 앉아있는 류하연이 이야기를 꺼냈다.
오퍼레이터 연수 오늘까지였지..
"주혁이의 훈련도 오늘까지네요. 끝나면 조촐한 축하연이라도 열까요."
주인공군은 아직 성장한 게 없긴하지만.. 그래도 수료를 기념하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다.
".. 잘 하고 있어?"
주인공군의 훈련이 오늘까지라는 이야기를 듣자 류하연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주인공군을 바라보고 물었다.
"열심히..?"
조금 자신이 없는 듯한 주인공군의 답변이 들렸다. 잘 하고 있었다고는 빈말로라도 말하기 힘들었지..
".. 힘내. 너라면 잘 할 수 있을지도.."
"고마워."
그녀는 조금 침울해진 주인공군을 격려해주었다.
역시 히로인! 격려 이벤트를 이렇게 옆에서 볼 줄은 몰랐네.
다른 히로인들이랑 마주치지 않은 지금, 현재로써 가장 유력한 히로인 후보는 류하연이 아닐까.. 다른 히로인들은 긴장 좀 해야겠네.
누구랑 맺어지건 간에 주인공군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
주인공군이 파일럿 슈트로 갈아입고 오는 동안 연구원에게 부탁해서 1호기의 훈련 기록을 살펴봤다.
단순히 외부 카메라를 통해 관측한 것부터, 모듈 안에 설치 된 카메라를 통해 그가 조종간을 잡는 방법이나 페달을 내려밟는 자세를 유심히 살펴봤다.
예전엔 교관석에서, 지금은 상대 파일럿의 위치에서 보고 있었지만 그의 조종을 세세히 살펴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조종간을 움직이기 전에 잠깐 망설이는 듯 한 움직임이나, 왼쪽 페달을 밟을 때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등 세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움직일 때는 당연한 거라 생각해서 모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구나 하는걸 알 수 있었다..
"뭘 보고 있었어?"
모든 기록을 확인하자 등 뒤에서 주인공군이 나를 향해 물었다.
"너."
"응?"
"너 보고 있었다고."
정확히는 너의 조종 기록이지만.
"그..그래?"
그 이야기에 주인공군은 조금 무안해진듯했다.
"..왜 나랑 싸울 때 망설이는거야?"
그의 전투기록을 분석한 결과 차원수나 더미 데이터를 상대로 싸울 때는 망설임이 없는 결단을 보여주었는데. 유독 나와 싸울 때만 약간의 망설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알고 있었구나."
"모를 줄 알았어?"
사실 지금 알았지만.
"모듈 너머라도 사람을 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이유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걸 알게 되자 조금 허무하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주인공군 다운 성격이었다.
그 상냥한 성격이 훈련에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지..
"..이건 대인전투 훈련인데?"
"훈련이라고 해도 모듈 너머엔 너가 있잖아."
나를 신경써주는건 고맙지만.. 그런 이야기는 저어기 히로인들한테나 가서 하라고.
"바보야. 그러면 계속 칼로 조종석을 쑤셔댄 나는 뭐가 돼?"
졸지에 나만 나쁜년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한마디 했다.
"미안.."
사과 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한 번이라도 맞추면 상을 주겠다고 했잖아. 받고 싶지 않아?"
"..받고 싶어."
"받고 싶다면 어떻게라도 한 방 먹일 수 있게 노력해봐. 머리를 쓰건 몸을 쓰건 한 순간이라도 빈틈을 만들어봐."
작게 주먹을 쥐어 그의 가슴 위를 툭 쳤다.
"비겁한 행동이라도 이번 만큼은 봐줄게."
"..비겁해도?"
비겁한 행동도 용서해주겠다는 말에 주인공군이 반응했다.
대인 전투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인데 비겁한 게 어디있겠냐. 싸워서 살아남는 쪽이 강한 법이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
"두 말은 안하는 입이야."
그의 앞에서 손가락을 펼쳐 나의 입술을 두 번 툭툭 쳐보였다.
조금 고민하는 듯 한 주인공군은 나를 바라보고 눈을 한번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해볼게."
"기대하고 있을게."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모듈에 올라탔다.
---
- 우웅..
주인공군은 어떻게 행동할까.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고 했으니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검은 케루브를 몰아 1호기와 거리를 벌렸다.
이번에는 근접? 아니면 사격? 그것도 아니라면 저번처럼 덫을 깔까?
- 사아아..!
내 예상과는 다르게 1호기는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뒤로 빼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번 행동은 조금 새롭네.
몸을 뺀 1호기는 자세를 낮춰서 고층 건물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60초간 노터치가 약속이지만 60초가 지나면 바로 맹공을 펼칠건데 괜찮은 건가?
기회로 주어진 시간을 오히려 버리고 있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60초가 되는 순간 달려들기 위해 조금씩 그와 거리를 유지한 채 추격했다.
1호기는 어느 순간 건물 틈 사이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은폐했다고 하지만 건물 틈으로 보이는 1호기의 어깨 장갑이 1호기가 저 사이에 숨어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 삑
30초가 경과했음을 알려주는 알림음이 들렸다. 어느덧 60초의 카운트가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
이번 전략은 기지방호인가.. 나쁘지 않은 전술이지만 뻔히 목적이 보였다. 분명 가까이 가면 트랩이 작동하겠지..
"..!"
그 순간 뭔가 위화감을 느껴 재빨리 페달을 내려밟아 공중으로 뛰어 그 자리를 피했다.
- 파샤악..! 캉!
나의 뒤에서 1호기의 근접장비인 단검이 날아와 내가 있던 자리에 박혔다.
"뭐..?! 1호기는 분명 저기에.."
있을 수가 없는 투척각도에서 날아온 단검에 의아해하던 순간 건물 틈 사이로 기체의 카메라가 잡혔다.
모니터에 잡힌 건물의 틈새에는.. 1호기의 어깨 장갑 하나만 와이어에 매달려 있었다!
"방심시킨 거구나.. 스스로 장갑을 퍼지 했을 줄은."
하지만 어떻게 구동음을 줄인거지? 이렇게 가까이 오려면 소음이 들리기 마련인데..
발 아래에 있는 1호기가 카메라에 잡히자 외부로 표시되는 열 감지 센서가 고온을 나타냈다.
"그렇구나.. 냉각모듈을 끄고. 내 전술을 배낄 줄은 몰랐네."
< 덕분에 잘 보고 배웠어. >
"바보야.. 상대에게 들릴 수 있으니까 통신모듈은 전투 중에 끄라고 했잖아."
< 너를 방심시키는 대가로는 싼 거지. >
- 탕! 탕! 탕!
아래에서 곧바로 1호기가 들고 있던 핸드건에서 총탄이 날아왔지만 공중에서 기체에 스핀을 가해 직선으로 날아오는 탄환 세발을 피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10초 정도..
"어떻게 할 거야? 이제 10초도 안 남았어."
계속 연이어져오는 사격을 피해 건물의 옥상을 옮겨가며 점점 1호기와의 거리를 좁혔다.
앞으로 5초.. 슬슬 끝낼 준비를 할까.
- 후웃..!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조종석의 페달을 최대한 내려밟고 공중에 오른 뒤, 양 팔을 내려 1호기를 향해 달려들 준비를 했다.
이대로 다시 급습하면 나의 승리다.. 아쉽게도 주인공군의 실력은 여기가 한계인가..
검은 케루브가 양 팔을 세운 채 1호기를 향해 공중에서 서서히 낙하했다.
- 치직
< ..검정색! >
그 순간 1호기의 통신 채널에서 통신이 들려왔다.
< ..검정색이다..!>
뭐?
< 베타니아의 파일럿의 속옷은.. 검정색이다!! >
뭐???!!! 뭐 뭘 말하고 있는 거야 지금??!!
..오늘은 검정 아니야!!
전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통신이었지만 나를 당황시키기엔 충분했다.
- 끼익..
한 순간이지만 내려밟은 페달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 ..지금이다! >
페달을 밟은 힘이 조금 빠졌던 탓에 공중에서 강습하던 자세에서 힘이 살짝 빠졌다.
- 깡!
그 틈을 노리듯 1호기는 곧바로 공중으로 솟아올라 주먹으로 케루브의 조종석 위를 타격했다.
약간의 흔들림이 훈련 모듈 위로 전해져왔다.
59.5초
60초 안에 주인공군은 정말로 나에게 한방 먹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바보오..!!!"
- 카가가가각!!!
겨우 한방 먹인 1호기의 팔을 잡은 뒤 추진력을 담아 콘크리트 바닥 아래로 던져 박아버렸다!
- 콰아아아!!
그 후 곧바로.. 1호기의 조종석 위로 양 발로 내려찍어 완전히 뭉개버리는 것으로 훈련은 끝났다.
---
"으아아..."
훈련이 끝났지만 조종석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훈련때 통신기록은 모든 연구원이 모니터링 .. 심지어 외부 기지 사람들도 와있는데 쟤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거람..
하지만 비겁한 행동을 해도 이번만큼은 봐주겠다. 두 말은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 한 주제에 그를 비난할 수도 없었다..
- 푸슈..
그래도 언제까지 이 곳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으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모듈에서 내렸다.
'베타니아.. 검정..'
연구원이나 정비원의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뭐..뭐지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부끄럽다.. 오늘은 검정이 아닌데도 부끄러웠다. 얼굴이 붉게 익는 기분이었다..
모듈을 내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내가 내려오는 사다리 아래에 엎드려 뻗쳐있는 주인공군이었다..
"...미안한 줄 알면 머리부터 박지 그래?"
"미..미안..!"
그의 앞에서 한마디 거들자 곧바로 바닥에 뻗치고 있던 손을 치우고 정말 머리를 박으려고 했다.
"농담이야.. 뭐든 해도 된다고 한건 나니까.. 넘어가줄게."
정말로 머리부터 땅에 박으려던 그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미안해.."
기껏 용서해줬는데 한 번 더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정말 나에게 한방 먹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용서가 되었다.
정말 나쁜 의도를 갖고 있었더라면 더 심한 말을 했겠지.. 아래가 민.... 아니다.
"도발도 충분히 유효한 전술이야. 같은 언어권 사람이라면 심리를 크게 흔들 수도 있어."
그가 어렵게 시도한 도발이었으니 교육을 겸해서 그에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아까 같은 도발은 잘 아는 사이가 아니면 아무 소용없어."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
주인공군에게서 모르는 상대로 어떻게 도발해야하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음.. 제법 걸걸한 말이라 크게 말하긴 그런데..
"귀 좀 빌려줄래?"
'...'
나의 키에 맞춰 고개를 숙인 그의 귓가에 교육을 겸한 도발을 작게 말해주었다.
- 털썩
"그..그런 말 평소에도 하고 다니는거 아니지..?"
나의 도발 멘트를 들은 주인공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를 두렵다는 듯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듣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아까 같은 말.. 함부로 하지마."
이번엔 넘어갔지만 두 번은 안봐줄거다..
---
연구원에게 부탁해 아까 훈련 모듈에 남은 통신 기록의 삭제를 요청했더니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잠시 후 주인공군은 환복을 마치고 다시 교복을 입은 채 훈련 시설로 왔다.
"결국 훈련 마지막 날 60초 안에 한방 먹였네. 축하해."
"..이거로 된 게 맞을까."
주인공군은 비겁한 방법으로 나를 방심시킨 것에 대해 아직도 찝찝한 듯 했다.
"내가 인정해줬잖아? ..그래서 소원은 생각해봤어?"
"음.. 나중에 말해줘도 되는 거지?"
"너무 늦지만 마."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가능한 범위 안에선 들어줄 거다.
"묘월. 제 조언이 효과가 있었습니까?"
연구실 가장 안쪽에 있었던 교수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오늘은 교수가 타브하에 머무는 마지막 날인 만큼 바빠서 마주치지 못했던 탓에 이제서야 얼굴을 처음 봤다.
"네. 자기가 잘하는 거랑 잘 가르치는 거랑은 거리가 제법 있네요.."
어제 많이 사온 덕분에 한가득 남아있었던 비타민 음료를 꺼내 마시며 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배워가는겁니다. ..그리고 그 나이부터 블랙이라니 대담하군요."
"푸웃.. 읍"
일하느라 모르는 줄 알았는데 교수도 들었구나..
"아무튼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교수님.. 이 뒤에 식사하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가시겠어요?"
다른 기지 사람이랑 친해질 기회가 있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녀는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던 인물이지만 놋 베이스 치고 괜찮은 사람 같으니 친해진다면 좋겠지.. 카이나벨 부대의 문제도 엮여있을 수 있고..
"마음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 뒤에 철수작업이 바빠요."
교수는 임대해준 훈련모듈을 정리하는 작업이 바빠 아쉽게도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건 아쉽네요.."
이 기지 중식당의 명물인 탕수육을 대접해주고 싶었는데..
"다음에 꼭 놋 베이스로 놀러 오세요. 제네시스 플랜의 소년도 함께."
이야기에서 붕 떠있던 주인공군도 같이 와줬으면 좋겠다고 교수는 그를 보고 웃었다.. 설마 했던 신 히로인 전개인가?
"네 언젠가 꼭 찾아뵐게요. 슬슬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 먼저 가볼게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교수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주인공군의 훈련 종료와 류하연의 오퍼레이터 연수 종료를 축하하기 위해 저녁식사 자리를 갖기로 했으므로 훈련 시설을 나섰다.
---
놋 베이스에서 임대한 훈련 모듈을 분해하여 트레일러에 실은 뒤.
디블라임 교수는 트럭의 조수석이 아닌 모듈을 분해한 컨테이너에 같이 탑승했다.
연구원을 위해 준비 된 공간인 듯 책상과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위에 달린 모니터가 각종 수치와 그래프를 어지럽게 표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를 지나, 분해된 훈련 모듈의 조종석이 있던 위치로 향했다.
- 딸깍.. 삑.
그녀가 조종석의 패널을 몇 번 건드린 후 레버를 당기자 조종석의 뒤에서 검은색의 박스가 나왔다.
- 푸슈우..
그녀가 박스를 열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컨테이너 박스의 조명을 받아 흑요석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조각이었다.
"이상하군요.. 이 조각이 망가진 것도 아닐 텐데.."
그녀는 그 조각을 손에 들고 어딘가 망가진 것이 아닌가 확인하려는 듯 천천히 살펴보았다.
놋 베이스의 훈련 모듈 중 유일하게 이 모듈에만 달린 원리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장치. 그것은 놋 베이스의 사령관과 디블라임 교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조각이 미치는 영향은 적합률의 일시적인 상승이 전부인데.."
조각에 대해 유일하게 밝혀진 것은 전기 신호를 줘서 활성화 시켰을 때 적합자의 적합률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는 정도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베타니아의 파일럿은.. 왜 이 조각을 활성화 시켰더니 아파했던 것일까요?"
여태 이 조각을 시험해봤던 다른 파일럿들은 적합률의 일시적인 증폭만 있었을 뿐, 베타니아의 파일럿처럼 고통을 호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정답을 구하려는 것처럼 그 조각을 들고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적합률도.. 61%에서 0.01도 바뀌지 않았어.."
타브하의 훈련 모듈에서 얻은 파일럿의 그래프는 적합률이 짧은 시간에도 등선을 그리며 바뀐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베타니아의 파일럿은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직선으로 61%의 숫자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정말 이상해."
그녀는 풀지 못한 의문을 가진 채 놋 베이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