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A3 UNIT
문이 닫혔다.
나가려던 나를 막아선 것은 표정이 어두운 주인공군이었다.
슬라이드 재생을 위해 회의실의 조명을 꺼두었던 덕분에 나의 머리 위로 지는 그의 그림자가 더욱 어두워보였다.
그는 이틀 전에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나를 원망하고 있는게 아닐까.. 아니면 뺨을 때린 것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게 아닐까..
여태까지 그를 손아랫뻘의 아이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주인공군과 마주하자 머리 하나는 더 넘는 신장의 차이가 크게 느껴졌다.
그 보다 훨씬 작은 내 몸도 그렇고, 문제를 해결할 생각도 하지 않고 도망치는 내 쪽이 오히려 아이일지도...
문을 막아서고 남으라는 이야기를 꺼낸 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만 내려보고 있는 주인공군을 보고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왜 남으라는 거야..?"
그 생각이 목소리에까지 미친 건지 아까까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말끝이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그의 시선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일을 저질러놓고 막상 그 사람과 다시 마주하게 되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역시 나 같은 게 모두를 돕겠다니.. 말이 안 되잖아.. 마음속 깊이 자책감이 들었다.
서른이 넘도록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항상 비즈니스적인 관계만 유지하던 내가 누군가를 이끌어 돕는다니.. 정말 무리였을지도..
주인공군의 얼굴을, 나와는 다르게 정말 스스로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아 점점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 달각
시선이 더 이상 앞으로 고정되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 결국 그의 발치만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내 머리 위에 꽂혀있던 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문손잡이 위에 얹히고 문이 열렸다.
"..일단 따라 나와줘."
---
사령부 근처의 옥외 휴게시설.
실내에도 휴게시설이 있는데다가 이 곳은 외진 곳에 있어서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흡연자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의 나와는 더욱 연이 없는 곳이었다.
이 곳까지 오는 동안 나는 겨우 주인공군의 등만 바라보며 걸어갔다.
마치 호송되는 죄수처럼.. 그는 이따금씩 뒤를 돌아 내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게 맞나 확인하려는 듯 한 번씩 시선을 줄 뿐이었다.
그가 이런 외진 곳으로 나를 불러낼 줄이야. 이틀 전 있었던 일에 대한 보복을 위해 여기까지 불러낸 게 아닐까.
..차라리 그에게 얻어맞는 것으로 주인공군의 기분이 풀린다면 맞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어른의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의 화풀이용 인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여자라고 하기엔 몸은 어린애처럼 너무 빈약해서 그런 쪽으로는 쓸모없겠지만 그의 기분이 풀릴 때 까지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이며 맞아주는 것 정도는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다...
이 시간이 금방 지나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품고 눈을 질끈 감았다.
- 툭
"힛..!"
그 순간 목 위로 차가운 감각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내버렸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그가 자판기에서 뽑은 것인 듯 음료수를 뽑아서 하나를 나의 목 옆에 대고 있었다.
"아무거나 골라왔어."
목옆에 얹고 있던 캔을 내려 나의 손 위에 쥐어주었다.
오백원짜리 딸기 맛이 나는 캔 음료수가 아직도 조금 떨리고 있는 손 위로 쥐어졌다.
"아까 놀래킨건 미안해.. 바로 나가려는 것 같아서 막았을 뿐이야."
주인공군은 비어있는 벤치에 먼저 앉더니 말없이 그의 앞에 서있던 나를 보고 옆에 앉으라는 듯 벤치 옆을 두들겼다.
어떻게 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캔을 쥔 채 옆에 앉았다.
".. 저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저번일이라고 하면 란테고스와 싸웠을 때의 이야기겠지.
"..내가 도와주지 않아서..? 아니면 때..때린 것 때문에..?"
시선이 조금 떨렸지만 열심히 주인공군의 얼굴을 살폈다. 어느 쪽이건 그 날 나는 원망받을 짓 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나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군은 잠깐 표정이 바뀌더니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 했다.
"그 날 전투가 끝났을 때.. 그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난 이미 죽었다고 했었지?"
주인공군은 뺨을 때렸을 때가 아닌 때린 이후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떻게 인형사 안에 사람이 있다는걸 알고 있던 거야?"
그 이야기를 듣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날 감정이 앞선 행동을 해버린 덕분에.. 주인공군에게 내가 교단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같았다.
"그..그건..."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다.
란테고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나, 내가 교단의 사람인 그와 몰래 밀약을 맺었다는 이야기 같은걸 한다면.. 정의감이 강한 주인공군은 나를 용서해주지 않을 거다.
나는 시나리오를.. 아니 그의 인생을 뒤에서 건드리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그 사실을 밝혀야할 순간이 다가오자 손이 점점 떨려왔다...
- 꾹
나의 떨리는 손을 주인공군이 잡아주었다.
차가운 캔을 쥐고 있느라 서늘해진 손이 겹쳐오는 체온에 점점 따뜻하게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말하기 힘들면 지금 말해주지 않아도 돼."
"..."
"평소처럼 비밀이라고 말해도 괜찮아."
"정말.. 그래도.. 괜찮아?"
...주인공군은 자신과 이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될 기회를 눈앞에 두고 나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너가 당장 말해줄 수 없는 거라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점점 손의 떨림이 멎어갔다.
"나중에 이야기해줄 수 있을 때 이야기해줘. 그거라면 괜찮아."
마침내 떨림이 멈췄다.
"..고마워."
그는 세계의 진실을 알게 될 기회 앞에서, 나에게 지금 한 순간의 평안을 주는 길을 선택해주었다.
---
손의 떨림이 멎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만약 주인공군이 진실을 요구했다면 그에게 모든 걸 전부 밝혀 버렸을지도 몰랐다.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항상 자기가 망가지는 길을 골라왔던 삶이었으니까..
"이야기가 조금 다른 길로 세버렸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남아달라고 한게 아니야."
내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본 주인공군은 쥐고 있던 손을 놓고 나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이 곳까지 나를 부른 이유가 달리 있다고 말했다.
"표정이 너무 심각해보이길래 잠깐 이야기를 돌린다는 게 이상한 이야기로 흘러갔네.. 일단 그거라도 마시면서 이야기 들어줘."
"응.."
그가 내 손에 쥐어줬었던 음료 캔을 따보려고 했지만 아까 떨린 손이 진정이 덜 된 건지 계속 손이 헛돌았다.
"줘봐."
- 칙
그에게 캔을 건네주자 캔을 따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그가 건네준 음료를 한 모금 마시자 조금 싼 딸기 과즙 맛이 느껴지며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훈련을 잘 마쳤다면서 소원 들어준다고 한거 있었지?.. 비겁하게 얻은거긴 했지만."
"비겁하다니.. 실력으로 딴 거라고 인정 해줬잖아."
그걸 이 타이밍에 꺼낼 줄은 몰랐다.
"그거 지금 써도 될까?"
"..그래 들어줄게. 어떤 거야?"
하지만 약속한 이상 들어줘야겠지..
"..저번 전투에서 한 실수를 사과하고 싶어."
의외의 답이었다.
"염치없는 이야기라는건 알지만.. 그 날 너에게 맞은 이후로 꼭 사과하고 싶었어.. 그 때 너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거.. 정말 미안해."
주인공군은 나를 향해 고개를 푹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다른 분들에겐 그 날 전부 사과하고 용서해 주셨지만.. 아직까지 너에게 사과하지 못했어."
브리핑이 끝나자마자 난 도망쳐 버렸으니까..
"..뭐든지 들어주기로 한건데 ..이런 일에 써도 괜찮아?"
유백의 란테고스를 공략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이야기를 꺼내거나 뭔가 다른 보상을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가 바란 것은 용서였다.
"이런 일이 아니야."
"..인형사를 쓰러뜨려달라고 부탁한다면 들어줄 수도 있어."
"그런 것 보다. 너에게 용서받고 싶어."
"...바보."
진실을 알 기회도 넘기고, 인형사를 쉽게 쓰러뜨릴 기회도 스스로 차버렸다. 정말 둔한 아이다.
만약 그가 정말 부탁했더라면 란테고스에겐 미안하지만 몰래 1호기에 타서라도 도와줬을 것이다.
"그 날 이미 용서했어. 하지만.. 내가 오히려 너한테 잘못을 저질렀어."
나는 그를 이미 오래전에 용서했다. 단지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나를 용서하지 못했을 뿐이지..
"뺨 때린 거?"
주인공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때의 이야기를 가볍게 꺼냈다. .. 누구는 그거 때문에 이틀이나 상심에 빠졌었는데..
"맞을만한 짓을 해서 때린 거잖아? 그건 어쩔 수 없지."
"..정말 그렇게 가볍게 넘겨도 괜찮아?"
"괜찮아. 오히려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 같으면 반대편도 때려줘."
주인공군은 저번에 맞았던 뺨이 아닌 다른 뺨을 보이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차라리 한 대 더 때려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때릴 리가 없잖아.. 아니. 다시는 때리지 않을 거야."
그에게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
"사과 정말 받아주는거야?"
"역시 받아주지 말까?"
분위기가 밝아졌다. 학교를 다니며 그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던 때처럼. 다시 우리는 원래의 사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잘 봐달라고 마실 것도 뽑아줬잖아."
"그러면 역시 받아줄 수밖에 없겠네.. 그런데 왜 음료수는 한개만 뽑은 거야?"
이제는 반 모금만 남은 딸기 캔 음료를 손에 들고 그에게 물었다. 자기것 까지 두개 뽑으면 되는 게 아닌가?
"동전이 한 개 밖에 없어서.."
"그런 거라면 말을 하지. 어디.."
청바지 주머니 안으로 손을 넣어 뒤졌지만.. 핸드폰과 손수건만 나올 뿐 동전은 없었다.
"..반 남았는데 마실래?"
혼자 마시긴 미안하니까 아직 반이 남은 음료 캔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래도 괜찮아?"
"응. 난 많이 마셨어."
"남은거 다 마신다?"
주인공군도 이야기를 계속 나누면서 목이 탔던 건지 남아있는 음료를 들고 망설이다가 금방 벌컥벌컥 들이켰다.. 젊은 애 답게 잘 마시네.
"..아 그런데 아까 입대고 마셨어. 미안해."
조금 찝찝하겠지만 알려주지 않는 것 보단 낫겠지. 입 댔는지 안 댔는지 신경 쓰는 것 보단 그냥 댔다고 알려주는게 더 속이 편할거다.
아까 망설인 것도 이게 신경 쓰여서 그런거겠지? .. 내 입이 지저분한 건 아니니까 이상한 냄새 같은건 안 날거다.
- 풋!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군은 사레라도 들린 듯 기침을 했다. 갑자기 들이키니깐게 원인인 듯 했다.
주인공군의 턱 주변으로 흐른 음료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주인공이면서 이런데선 여전히 어린애같네.
"..그런데 아까 왜 자판기 앞에서 눈 감고 있던 거였어?"
사레가 들렸던 게 진정이 된 듯 주인공군은 아까 이 곳으로 왔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너가 그 날 뺨 맞은거 때문에 화나서 날 때릴까봐.. 그래서 눈을 감고 있었어.."
솔직히 아까 끌려갈 때 그런 생각이 들긴 했었다. 옥상으로 따라와 같은거..
"내가 널 때릴 거라 생각했다고?"
주인공군은 그 이야기를 듣자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응..."
십대 때는 주먹으로 감정을 푸는 경우도 많으니까.
서로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바닥에 드러누워서 짜식 제법 하는데.. 이런 이야기라도 할 줄 알았다.
실제론 체격 차이가 크니깐 내가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뻗는 그림밖에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내가 널 때리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
주인공군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어째서?"
맞을만한 짓을 하면 서로 가볍게라도 주먹으로 푸는 게 십대의 인간관계 아닌가?
나의 편향적인 추억관이 떠오르려고 했을 때..
"여자애를 때리면 안되잖아."
- 우우웅..
주인공군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네.. 잠깐 전화좀 받고 올게."
그는 핸드폰을 든 채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 마스터? >
벤치에 홀로 남았을 때 항공점퍼 주머니 안에 있던 엘이 주머니를 비집고 나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체온이 조금 높아진 것 같아서 나와 봤는데.. 어디 아픈건 아니죠? >
"시.. 시끄러."
주머니 밖으로 비집어 나온 엘을 다시 주머니 안으로 꾹 꾹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