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3화 〉페이라스모스 (83/152)



〈 83화 〉페이라스모스


평온한 시간은 빨리 흐른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겨우 쇼핑만 하고 왔을 뿐인데 잠깐 쉰다고 침대에 누워있던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버렸고, 학교가 갈 시간이 되어 어제 산 체육복을 챙겨 학교에 도착했다.

어제 예고 받았던 대로 체육시간이 되자 체육복을 갈아입기 위해 류하연과 함께 탈의실로 향했다.


학생도 적은데 반에 여자애들이  명 없었기도 했기 때문에 탈의실엔 나까지 고작 일곱 명도 안되는 사람 밖에 없었다.


이제는 다른 여자들 앞에서도 서스름 없이 옷을 갈아입게 되는걸 보면 나도  많이 변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묘월씨.. 어제 내가 골라준 걸 입었네."

나의 탈의를 지켜보던 류하연이 속옷차림이  나를 보고 말했다.

지금 입고 있던 건 어제 그녀가 골라주었던 하늘색의 레이스가 달린 속옷 세트였다. 씻고나서 바로 갈아입고 잠들어서 잊고 있었다..

"하연씨도 어제 사준걸 입었네요."

"으..응.."

내가 그녀의 속옷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조금 부끄러운 건지 몸을 움츠리는게 보였다. 나한테는 괜찮고 자기한테 말하는 건 안되는건가..

'쟤들..'

'혹시..'

둘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왠지 다른 여학생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느껴져서 체육복으로 후다닥 갈아입고 탈의실을 나섰다.


...

"오늘은 가볍게 몸 풀기 부터 시작하자. 둘이서  짜봐."


운동장에 모여 있자 체육교사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두..두명이서 조를짜라니.. 나에게 있어서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와 다름없는 무서운 말이었다..

싸..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20년전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는 듯한..



"묘월씨 뭐해.. 두명이서 조 짜라고 하셔.."


서바이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나의 팔을 류하연이 툭툭 쳐주었다.


아.. 지금은 조를 짜줄 사람이 있구나... 정말 다행이야..

"네..네. 고마워요 하연씨.. 정말로.."

이번 생엔 선생님과  둘이서 조를 짤 일은 없었다는 안도감에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류하연과 조를 짜서 가볍게 서로 몸 풀기 체조를 하고 있자 주인공군이 문득 신경이 쓰였다.


나야 조를 짰지만 아싸 기질이 있는 주인공군은.. 다행히 다른 남자애랑 조를 짠  같았다. 억지로 짠 것 같진 않고.. 조금 친한 애도 생겼나보다.

다행이다...



"..왜 시선을 다른데 두고 있어?"


등을 맞대고 쌍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류하연이 자기 쪽으로 허리를 숙여서 등에 올라탄 나를 뒤로 휙 들쳐 올렸다.


"아윽..아.. 허리가.. 으읏.."

팔꿈치가 역으로 얶여있을 때  쪽으로 당기는 힘이 들어오자 매달려서 버둥거릴 뿐이었다.



"으읏윽..아파요..."

운동부족이었던건지 허리를 뻐근하게 펴오는 감촉에 입에서 계속 앓는 소리만 나왔다..




"집중 안하고 있던 벌이야.."

체격은 나처럼 작은데 힘은 정말 야무지구나...



---



준비 체조를 마치고 배드민턴 수업이 진행되었다.


배드민턴! 매년  세계적으로 한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다는 무시무시한 스포츠.. 라고 예전에 어디에서 들은 기억이 난다.

과연 게이트가 열리고 차원수가 쏟아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세계.. 이런 스포츠를 학생에게 가르칠 줄은..


하지만 몸이 가벼운 덕분에 생각보다 재밌게 칠 수 있었다.

류하연도 체격이 비슷했던 덕분에 서로 한참 재밌게 라켓을 휘두르며 간만에 스포츠를 즐겼다.

가끔 훈련시설 앞에서 주인공군이랑도 쳐볼까.



오랜만에 몸을 바쁘게 움직여서 그런지 이마에 땀이 제법 맺혀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으로 이마를 쓸었다.


류하연은 나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였던 것인지 별로 더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군은.. 저 멀리 수돗가에서 찬 물로 머리를 감고 있었다. 머리가 짧으니까 저렇게 할  있구나.. 부럽다..




"나도 머리 짧게 칠까.."

그가 멀리서 머리를 감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짧게  밖으로 나왔다.


"..묘월씨는 머리 자르지 마."

옆에 앉아있던 류하연이 진지하게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치만.. 지금도 더운데요.."

거울 볼  마다 예쁜 색이라고 느끼긴 하지만 이렇게 더워선 나중에 방해가 될 것 같은데..




"더워서 그런 거면.."


- 사락..

나의 뒤로 다가온 류하연이 내 머리를 뒤에서 쥐고 주머니에서 고무줄을 꺼내 머리를 묶어주었다.



"이제 괜찮아..?"


머리가 올려 묶여져  목덜미가 드러나자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포니테일?! 대단해!




"네. 머리만 묶었을 뿐인데 엄청 시원해졌네요. 이러면 자를 필요는 없겠네요."

혼자서는 뒤통수가 보이지 않아 묶어볼 엄두가 안 났는데 이 기회에 시도해보니 포니테일이 엄청 편리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혼자 연습해서 묶어볼 수 있게 노력해봐야지.


"다행이야.."

"하연씨는 안묶어요?"


이렇게 편한거라면 그녀도 묶어두면 좋을 텐데 이렇게 좋은걸 나 혼자서만 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머리가 짧아서.."


"그래요?"


잘하면 묶일  같은데, 짧아서 묶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봤다.


정말 길이가 어중간해서 묶더라도 너무 바짝 묶일  같았다.

"앗.. 이런데서.."

체육복 자락이 그녀의 목을 스쳐 간지럽혔기 때문일까 류하연의 입에서 묘한 소리가 나왔다.




"아 미안해요. 간지러웠죠?"


여자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건 엄청 실례되는 일이라던데.. 나 때문에 그녀가 곤혹스러워 할까봐 손을 바로 때어줬다.



".. 계속해도 되는데.."


손이 떨어지자 그녀는 조금 아쉬운 듯한 소리를 내었다.




"네? 묶이지 않잖아요."


"...둔감."

머리를 묶어주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그러는 사이에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걸어가는 주인공군이 보였다.


저 칠칠맞은 녀석..



"잠깐 주혁이한테 다녀올게요."

왠지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주인공군이 칠칠맞게 돌아다니는 꼴을 왠지 볼 수가 없어서 손수건을 들고 그에게 갔다.



"수건 가지고 다니랬지."

물이 떨어지느라 아래를 보고 걸었던 탓에 옆에서 다가오는 나를 보지 못했는지 수건으로 그의 목을 닦아주는 나를 보자 주인공군은 조금 놀란  했다.



"어..어어.. 가방에 넣긴 했는데.."

"항상 가지고 다녀."

평소부터 준비가 되어있어야 히로인들에게 배려도 해주고 그럴게 아닌가. 이마며 목에 떨어지는 물을 어느정도 닦아주었다.



"..머리 묶었네?"

조금 높은 주인공군의 시선이 나의 뒷목을 향하는걸 느꼈다.


"응. 하연씨가 묶어줬는데, 어때? 괜찮아?"


모처럼 예쁘게 묶였으니 더 자세히 보여주려고 뒤로 돌아 올려 묶여진 머리를 보여주었다.

"으..응.. 그러네.."


감상은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칠칠이.


---



체육수업이 끝나고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시원해서 머리는 여전히 올려 묶어두었다.


'야 이거..'

'와 진짜..? 쩐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쉬고 있던 남자애들이 모여서 뭔가 보고 있었다.


궁금해지는데..




"뭐 보고 있는 거야?"

조심히 기척을 죽이고 그 틈사이로 들어가 열심히 몰두하고 있는 남자애에게 물었다.

"까..깜짝이야.."

"어 안녕."


일부러 놀래키려고 한 것이었지만 한명만 놀라자 조금 실망스럽긴 했다.


"너도 이런  관심 있어?"


 보고 있었길래 나에게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는 거지.. 설마 남녀합반의 교실에서 야한걸 보고 있었을 리는 없고..


"뭔데?"

무리에 있던 남학생 중 한명이 들고 있던 것.. 잡지를 펼쳐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군사 매거진... 으으 밀덕들..



"아.. 이런  좀.."

자신만만하게 잡지를 펼쳐 보여주는 아이를 피해 뒷걸음질 치려던 찰나 잡지의 표지 한 쪽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디블라임 교수님?"

회색 정장 위에 하얀 가운을 걸친 금발의 익숙한 여성 학자.. 디블라임 교수가 찍혀있었다.


"오 디블라임 교수를 알아? 디블라임 교수는.."

나의 한 마디에 반응한  안경을 낀 남학생 한명이 나에게 설명해주려는 듯 이야기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잡지 잠깐만 볼게."


설명을 시작한 남학생을 내버려두고 잡지를 들고 있던 학생에게서 잡지를 받아 페이지를 넘겼다.

차원수의 크기 별 효과적인 제압 무기분석.. 이건 아니고.. 필리스티아 베이스 인터뷰.. 이것도 아니고..


차원기 3세대 양산 계획 특집 담당자에게 묻다.. 아 여깄다.

잡지의 넓은 면을 할애한 페이지를 펼치자 디블라임 교수가 진행한 인터뷰 기록이 써있었다.


"..디블라임 교수는 3세대 양산이 본격화되었음을 알리며.."

눈으로 인터뷰가 끝난 뒤 요약 기사를 읽으며 입으로 따라 읽었다.

진지하게 읽고 있던 덕분에 주변에 있던 남자애들도 가만히 기사에 집중하듯 잡지를 따라 읽었다.


"3세대 양산 계획의 대상 모델로.."

케루브는 2세대, 베레시트 시리즈는 4세대.. 4세대야 대중에게 공개가 안 된 테스트 타입이니 현재 공개되는건 3세대 계획이겠지.. 과연 어떤 기체가..


"케루브 II를 채택하기로... 밝...혀.."

케...루...브.... 2....?

잡지를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저기?"


옆에서 잡지를 같이 읽고 있던 남자애가 말없이 손을 떠는 나의 행동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어주었다.



"케..케루브가... 2가 나온다고..???"


손의 떨림은 목소리 끝에서도 이어지기 시작했다.

- 툭


어느새 손은 잡지를 놓쳐 책상 위에 떨어뜨리고 가슴속 가득 차오르는 벅찬 감정이 가득해져 환희에 가까운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범용성이 좋은 만능 2세대 대표 기체 케루브.

다방면에서 활용되며 여러 환경에 맞춰 독자적인 개조도 이룬 그 케루브가.. 2가 나온다고..??

원래 시나리오엔 없던 일이지만 개발 도중 테스트를 하며 애착이 많이 가던 기체가 후속기가 나온다니..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리적으로 웅장하진 못하지만..

"월말에 열리는 관계자 컨퍼런스에서 최초로 공개 될 예정이라고 한다.."

어느새 내 뒤에 있었던 건지 내가 책상 위로 떨어뜨린 잡지를 주워들은 주인공군이 뒤에 이어지는 기사를 마저 읽었다.


"헤..헤헤...헤헤헷.."


관계자 컨퍼런스..! 지금의 나의 위치라면 업무상 방문할 수 있는 지위라는걸 알게 되자 입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쟤..쟤좀 무서워..'

'누..눈이 풀린 거 같은데...'


옆에 있던 남자애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지금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챠군이 오기 전에 이런 빅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니. 탈 수 밖에 없잖아! 이 빅 웨이브에!



"주혁아아아앗!!!"


- 탁!


나의 뒤에서 잡지를 들고 있던 주인공군의 탄탄한 팔을 양 손으로 붙잡았다.

"어..어어?? 왜..??"


양 손목이 바짝 붙잡히자 당황한  한 주인공군을 바라보며 나는 외쳤다.

"견학가자아아!!!!"

케루브II 라니!! 꼭 보러 가야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