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페이라스모스 (88/152)



〈 88화 〉페이라스모스

점심식사를 마친 후 디블라임 교수의 안내에 따라 컨퍼런스 회장 뒤편으로 이동했다.


정비복을 입은 사람들이 워커를 이용해 컨테이너 박스를 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차원기 한대를 통째로 옮겨오는 것은 힘들었던 건지 부위별로 분해되어 담겨오는 듯 했다.

조립  까지 외부인에게 공개를 하지 않으려는 듯 작업 안전을 겸한 높은 천막이 둘러져있어서 작업인원만 내부를 볼 수 있다는  특별 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 설렜다.


시뮬레이션 시연을 위한 모듈은 이미 준비가 끝난 것인지 검게 코팅 된 조종석 유닛이 회장 한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머리가 없어서 그런지 예전 기지에서 봤던 케루브의 시뮬레이션 모듈보다 조금  간소화 된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듈 다리가 없네요."


"다리만 없는 게 아니라 몸통 밖에 없는데..?"


이런 이야기는 못 따라오는구나..




"다리가 없어도 시뮬레이션에선 100%의 성능을 보여줄거에요."

옆에  디블라임 교수가 작업인수인계서에 서명을 하면서 나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었다.




"맞아요. 다리 따위 장식이죠."


"..나만 이 대화에 못따라가는거야?"


이것이 젊음.. 아니 세대차이구나.



"묘월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시연 담당 파일럿을  구했었습니다."


"교수님이나 저나 운이 좋았네요. 그러면 오늘 시연은 없을 예정이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만약 끝까지 못 구했더라면 제 랩의 연구원이 서툴게라도 담당했겠죠."

교수는 별일이 아니라며 웃었다.

랩 연구원이라면 대학원생일 텐데.. 그 사람들은 연구 전문이지 파일럿이 아니라 조종은 힘들 텐데.. 졸지에 한명 구했네.


교수와 시뮬레이션 모듈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컨테이너 작업이 끝난 듯 했다.


- 위잉..

기체의 각부를 이은 와이어가 당겨지며  미터의 거체가 회장에 당당하게 일어섰다.

저게 케루브2..

머릿속으로 만약 케루브의 다음 모델이 나오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던 것과 얼추 닮아있었다.

전체적으로 기존 케루브보다 얄팍해졌으며 어깨나 허벅지의 하드 포인트가 늘었고 팜플렛에서 보던 대로 유사시 현장에서 모듈 교체가 가능하도록 고안한 부분이 보였다.

케루브1은 잘만 다뤄도 최종전까지 끌고 갈 수 있었는데 2는 어느 정도의 성능을 보여줄까..


정비원이 철수한 후 한참이나 말없이 기체의 주변을 돌며 조용히 감상했다.




"교수님."


"네. 무슨 일인가요?"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잠시 후면 기자들에게 공개될 테니 먼저 사진 찍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알겠습니다. 혼자서 찍으실 건가요?"

내가 건넨 핸드폰을 받아들은 교수가 카메라를 켜서 케루브 아래에 선 나를 포커스에 담았다.




"당연히 아니죠. 너도 이리와."


"나?"

"너 말고 누가 있니."


교수와  사이에서 맴돌고 있던 주인공군의 팔을 잡아 나의 옆으로 당겼다. 이 위치라면 기체 전체의 모습과 우리 둘을 찍기엔 딱 좋은 위치겠지.



"ok. 찍겠습니다."


핸드폰을 세로로  교수가 포커스를 잡기 힘든  조금씩 뒤로 걸으며 케루브2와 우리를 한 번에 담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이 보였다.

"좀 더 가까이 붙어봐. 찍기 힘드신가보다."

모처럼이니 이 정도 거리감은 괜찮겠지? 다른 히로인도 없고.

주인공군의 팔과 옆구리 사이에  한쪽 팔을 밀어 넣어 그와 팔짱을   가까이 붙었다.




"가..가까운데."

"금방 찍을 거야. 조금만 참아."

찰칵 찰칵 찰칵

교수는 완벽 주의적 기질이 있는 것인지 한번 찍어주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고심하듯 우리를 여러 번 찍어 주었다.



"잘 나왔습니다. 모델이 좋아서 잘 나오는군요."

"모델이라면 케루브 2 이야기인가요?"


잘 나온 기체긴 하지. 정식 도장을 마치고 파일럿 홍보에 쓰면 지원률이 꽤 오를지도 모르겠다.



"기체도  나왔지만 둘의 이야기 입니다."


몇 분 정도 연속으로 촬영을 해준 교수가 핸드폰을 건네준 것을 확인하자 정말 잘 찍힌 사진이 여럿 나왔다.

찍기 전엔 몰랐는데 찍은 사진을 보니까 정말 가깝긴 하네.. 사진으로 보니까 잘 생겼네 주인공군.



"이따가 보내줄게."

"어..응."


조금 얼떨떨해하는 주인공군에게 사진을 나중에 보내주겠다고 말하곤 가디건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어두었다.

"교수님. 시뮬레이션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조금 초췌해 보이는 인상의 연구원이 디블라임 교수에게 모듈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알겠습니다. 아까 말한 슈트도 준비되었나요?"


슈트? 하긴 컨퍼런스자리니 사복을 입고 타는 건 조금 그렇겠지..

"s사이즈를 찾느라 조금 헤맸습니다.. 그러면 저 쪽이 그 테스트 파일럿입니까?"

"네 맞아요."


s사이즈 이야기를 한걸 보면 아마  얘기겠지.




"...고맙습니다.."


아마  사람이 원래 시연을 담당할 예정이었나 보다..


---




한쪽에 준비된 탈의실에 들어가 연구원에게서 건네받은 슈트케이스를 열어보았다.

전체적으로 검정에 가까운 파일럿 슈트.. 사도의 것처럼 전신의 굴곡이 드러나는 슈트는 아니지만 베레시트의 슈트와는 느낌이 제법 달랐다.


슈트도 아직 연구 중인 것이었는지 곳곳에 미완성의 흔적이 남아있긴 했지만 당장 시연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G.M.]

G.M.? 짐? 뭔가의 약자 같지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보통 정식 런칭  까지는 적당한 이름을 붙이는 편이니 큰 의미는 없겠지.


슈트를 혼자서 갈아입고 거울을 보자 검정의 슈트에 곳곳에 금색의 라인이 들어가 있었다. 단순한 장식은 아닌 것 같은데..



"파일럿의 신체 정보를 피드백 받기 위한 센서입니다."

어느새 내 뒤에 다가와 있던 교수가 나의 의문에 답변해주듯 말했다.


"교..교수님.."

깜짝 놀랐네. 이 사람도 말없이 다가오는걸 은근히 잘하는구나.

"아직 개발 중이라 완벽하진 않지만 파일럿이 완벽하니 괜찮습니다."


"저라고 완벽할 것 같진 않은데요 하하.."


처음 몰아보는 기체니까 얼마나  할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이걸 전해 드린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교수가 품에 들고 있던 검게 코팅  헬멧을 건네주었다.

"몰래 온 데이트인데 얼굴이 알려지는 건 그렇지요?"


"데이트 아니거든요.."


교수는 내 얼굴이 업계 관계자에게 드러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지 헬멧을 준비해준 듯 했다.




"하지만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헬멧을 눌러쓰자 단순한 헬멧은 아니었던 듯 헬멧의 한쪽에 오버레이  간단한 유저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헬멧도 쓰니까 왠지 변신 히어로라도 된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들뜨는데..


파일럿 슈트를 전부 갖춰 입고 헬멧을 쓴 뒤 주인공군이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주인공군은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어색한 것인지 의자에 앉아 혼자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보고있는건.. 아까 찍은 사진인가.




- 툭툭

사진을 보는데 몰두하고 있던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우왓!... 누구세요?"

헬멧을 쓰고 있다고 누구인지 못 알아보는 건가..



"나야. 나."


헬멧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소리가 울리는 느낌이 났다.



"묘월이구나.. 모르는 사람인줄 알았어."


평소처럼 딱 달라붙는 백색의 파일럿 슈트가 아니라 몰라봤던 건가.. 아직 시연까진 시간이 조금 남아서 주인공군의 옆에 앉았다.

"넌 안 해봐도 되겠어?"

모처럼 체험 어트랙션인데 혼자만 노는 기분이 들어서 주인공군에게 조금 권해봤다.



"난 역시 1호기만으로도 벅차.. 다른걸 몰아보겠다는 너가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야."

실력이 조금 늘긴 했어도 갑자기 다른 기종을 몰아보라고 하면 역시 힘들겠지..



"그래? 아쉽네.."


너무 혼자 들뜬  같아서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저 파일럿님. 슬슬 준비해주셔야.."


아까 나에게 슈트를 건네주었던 초췌해 보이는 연구원이 슬슬 준비가 되었다는 듯 나를 찾았다.


"여기서 응원하고 있을게. 잘 다녀와."

"잘 보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게."

주인공군을 등진 채 한쪽 손을 여유 있게 들어보여줬다.

이런 시연 정도는 네가 보는 동안 멋지게 끝내주마.




"그..금방 끝내버리시면 곤란한데요.."


연구원은 그래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 하고 와야지..



---




교수의 강연이 끝나갈 쯤 시뮬레이션 모듈에 탑승했다.

이전에 임대해서 사용해본 케루브1의 시뮬레이션 모듈보다 좌석도 넓고 훨씬 쾌적한 느낌이 들었다.

< 대인 전투 시뮬레이션 세팅 완료되었습니다. >


아까와는 다른 연구원의 목소리가 시뮬레이션 모듈 너머로 들렸다.


"2는 얼마나 좋아졌을지 기대 되는데요."


< 소프트는 이미 완성단계니까 실 기체랑 똑같을 겁니다. >


연구원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케루브2에 대해 장담했다. 과연 얼마나 좋아졌을지 기대되는데..

< 가급적 다양한 움직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보여주는  많아야 투자가 많아져서요. >


"열심히 해볼게요."


이 자리에 불러준 교수에게 빚도 있으니 열심히 해봐야지.

- 위이잉..



좌석 위에서 팬이 도는 소리와 함께 시뮬레이션 모듈이 작동되었다.


기존 케루브보다 넓어진 모니터는 정면뿐만 아니라 좌우와 조금 아래까지 살피기 좋은 시야각이 잡혔다.



- 우웅..

구현이 완료된 배경은 넓게 펼쳐진 평지였다. 도심보다 보여줄 만한 각도가 많으니 평지를 고른 듯 했다.

상대는 케루브 3대.. 무장은 표준장비.. 시연회니까 저번 시뮬레이션처럼 특수 임무대를 내세울 필요는 없겠지.

- 탕! 탕! 탕!

이 쪽으로 다가오던 케루브가 멈춰서더니 라이플을 갈기기 시작했다. 거리가 제법 있으니 이 정도는 달리면 금방 피할 수 있었다.

- 파바박!


조금 움직인다고 페달을 내려밟았는데 평소 케루브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딜레이가 없이 금방 달리는걸 보고 확실히 개선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 푸욱!

가속도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가장 오른쪽에 있던 케루브의 복부에 기체의 주먹을 꽂았다.

- 기이잉..!!

주먹을 꽂자 손등 위에서 짧은 칼날이 솟아나와 케루브의 조종석을 완전히 작살내었다. 주먹으로만 끝낼 샘이었는데 새로운 무장이 추가되었구나.

조종석이 꿰뚫리자 움직임을 멈춘 케루브를 방패삼아 다른 두기와 거리를 좁혔다.


- 탕! 탕! 카앙!

기체의 팔에 늘어져있는 케루브의 라이플을 쥐어 다른 두기를 향해 발포하자 한 기의 머리에 명중해 자세제어 장비가 무너진 듯 움직임을 잃어가는게 보였다.

- 콰앙!

케루브2의 하드 포인트에 장착되어있던 탄창  개를 던진 뒤 움직임을 잃은 케루브의 라이플 대신 한쪽 어깨 뒤편에 장비되어 있던 강선이 짧은 전용 라이플을 쏘았다.

던져진 탄창이 라이플의 사격에 명중하자 유폭이 일어나며 움직임을 잃던 케루브를 완전히 멈추게 했다.

정말 유용한 전술인데 학교에선 왜 이게 안된다는 거지.



이제는 너무 너덜 해져 방패막이로도  수 없게 된 케루브를 던지고 남은 한기를 견제했다.

- 철컹..


거리가 좁아지자 마지막 케루브는 근접전으로 들어갈 생각인 것인지 어깨 뒤에 장비된 대검을 꺼내 쥐었다.

모처럼의 시연회니 라이플로 시시하게 끝내는 것 보다 똑같이 근접전으로 마무리해주는게 좋겠지.

- 철컹


라이플이 장비되어 있던 곳이 아닌 반대쪽의 어깨에 장비 된 단검보다는 길고 표준대검보다는 짧은 검을 역수로 쥐었다.


- 슈우우..!

대검을 양 손으로  케루브가  뒤의 버니어를 점화하며  쪽으로 달려왔다.


- 샤아아아아..!


페달을 강하게 내려밟아 달려오는 케루브를 향해 뛰어들었다.

- 사카악..!

강하게 베는 소리와 함께 달려오던 케루브와 나의 기체는 서로를 등졌다.


- 파삿.. 삿.. 기이익.. 까앙!


잠시 후 나를 등지고 있던 케루브1은 사선으로 갈라져 상체를 땅 위로 떨어뜨렸다.

시뮬레이션은 종료되었다.




---


시뮬레이션 모듈에서 내리자 회장의 반응이 들뜬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관계자 설명회가 아닌 스포츠 중계라도 보는 것처럼 관중들이 들 떠 있었지만 굳이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아서 얼른 대기실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왠지 부끄러우니까..

"후우.."


헬멧을 벗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수고했어."


주인공군은 대기실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손수건을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번엔 챙겼네. 잘했어.."


늘 가지고 다니라고  번씩 말해주었더니 드디어 손수건을 챙기고 다니는구나. 조금은 발전했네.

"잘 봤습니다. 묘월."


디블라임 교수도 담당 연설이 끝난 듯 대기실에 들어오며 나의 시연을 잘 봤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교수님 덕분에 재밌는 체험도 해보네요. 슈트도 신기했구요."


"유능한 파일럿의 도움을 빌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불편한 점은 없었나요?"


"불편한 점이라면 역시.. 반응속도는 좋은 편인데 조금 더딘 부분은 여전히 있네요. 어깨쪽 실린더의 압력이나.."

곧바로 피드백을 보내주자 교수는 끄덕여주며 들고 있던 차트에 그녀의 모국어로 무언가 메모를 갈겼다.



"..역시 실제 파일럿의 피드백이 중요합니다. 이 뒤에 같이 식사라도 어떻습니까? 마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교수는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 건지 저녁이라도 함께하며 케루브2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는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오늘은 주혁이랑 다니기로 약속했거든요."


옆구리에 끼고있던 헬멧을 그녀의 품에 건네주며 제안을 거절하고 나의 옆에 서있던 주인공군의 팔을 붙잡았다.


"묘월아.."


"다음에 또 기회가 오면 뵐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주인공군의 팔을 살짝 잡은  그와 같이 교수를 등진 채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퇴장 조금 멋있을지도..



"묘월!"

교수가 아쉬운 듯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보지 않고 서서히 멋지게 나가야..



"파일럿 슈트는 반납해야합니다!"

아.. 그렇지..

떠나던 발걸음을 슬쩍 뒤로 돌려 돌아와.. 탈의실로 향했다..

---



민망하긴 했지만 후다닥 옷을 갈아입은 후 교수에게 다시 작별인사를 건넨 뒤 빠져나왔다.

퇴근시간에 가까운 시간이 되자 슬슬 컨퍼런스 회장도 정리를 시작한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게 보였다.


"오늘 지루하지 않았니?"


나의 손에 이끌려 원하지 않은 출장을 나온 주인공군에게 소감을 물었다.


너무 내 멋대로 끌고다닌 것 같아서 반성이 되기도 했고.. 다음엔 그냥 혼자 올까.



"아니야. 생각보다 재밌던데."


나의 걱정을 만류하듯 주인공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다음에도 같이 와줄래?"

그래도 다음번은 거절하겠지..




"좋아."

"응?"


"다음에도 같이 와줄게."


"고..고마워."


주인공군도 역시 파일럿이라 그런 건지 아예 흥미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음에도 같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왠지 조금 기분이 들떴던 탓인지 말이 조금 더듬어졌다.



"흠흠.. 이제 우리도 숙소로 돌아갈까? 이 쪽은 더 볼게 없으니까.."


컨퍼런스가 끝난 이 주변은 정말 별게 없으니까 밤 시간에 놀더라도 숙소 주변에서 노는게 낫겠지.



"그래. 그러면 숙소로 돌아..응?"

- 툭

컨퍼런스 회장 앞에 맡겨두었던 코인락커에서 캐리어를 꺼내던 중 바닥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툭 


 투두두두둑

- 쏴아아!



하나씩 떨어지던 소리는 곧 장대가 되어 땅을 적시기 시작했다. 더운 곳이긴 해도 소나기 까지 쏟아질 줄이야!



"으아 아아.."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머리부터 푹 젖어가기 시작했지만 일단 캐리어를 끌고 회장의 처마 밑으로 피했다.

하지만 주인공군도 나도 머리부터 상의가 푹 비에 찌든 게 보였다.

"비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원래 출장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수 없는 법이야.. 자."


비에 젖어 무거워진 가디건을 벗고 캐리어를 열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두었던 수건을 두개 꺼내 하나를 주인공군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택시 불렀으니 금방 올 거야. 일단 돌아가자마자 씻자."

...



택시가 금방  덕분에 숙소까지 바로 갈  있었다. 에어컨을 튼 택시 안이 조금 으슬하긴 했지만 어깨를 조금 붙이고 있으니 따뜻해서 견딜만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얄궂게도 비는 바로 멎었다.. 마가 낀 건가..

사령관님이 잡아주신 숙소는 고급 호텔이었다. 출장차 방문한 것이니  모텔을 잡아주셔도 되었을 텐데..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체크인을 하기 위해 호텔의 카운터로 바로 갔다.




"체크인 하려구요. 미리 예약해뒀어요."


캐리어 안에 넣어두었던 예약 확인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두 분에 방 두개.. 잠시 만요."

미소를 짓고 있던 직원은 출력물을 받아 카운터에 있는 pc에 번호를 입력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1403호와 1405호가..."


맞붙은 방을 잡으실 줄 알았는데 한 칸 건너뛰었네. 오늘 컨퍼런스 때문에 예약이 많았나...



"아.."


예약을 확인하던 직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뭔가 좋지 않은 징조 같은데..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버부킹이 되어버려서.. 숙소를 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바로 전액 환불 해드릴테니.."


직원은 새하얘진 얼굴을 한 채 곧바로 나를 향해 사과하기 시작했다. 역시..



"오버부킹..?"

주인공군은 그 뜻을 잘 모르는 건지 나를 쳐다보았다.


"방 하나에 다른 손님과 같이 중복 예약을 잡았다는 거야.. 후.."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나는 몰라도 주인공군은 따뜻한데서 재우지 않으면 감기 걸릴 거 같은데..




"뭐야 그게.. 그러면 우린?"


"아마 다른 델 찾아봐야겠지?"

화가 나긴 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캐리어를 끌고 다른 곳을 찾아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바로 쉴  있는 다른 데를 찾아봐야지. 찜질방이라도 가야하나..



"손님!!"

호텔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아까 직원보다 직급이 높아 보이는 남자 직원이 달려와 우리를 막아섰다.



"정말..죄송합니다.. 우리 직원이 실수를 해서.."


급하게 달려온 직원은 숨을 헐떡이며 횡설수설 말하기 시작했다.


"저희가 다른 예약도 꽉 밀리다보니.. 일반 룸은 전부 나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나가고 있잖아요?"

더 오래 젖은 채로 놔두면 쟤 감기 걸릴  같단 말이야. 빨리 따듯한 곳을 찾아가고 싶다. 이 이상 귀찮게 하면 컴플레인을 넣어야지.

"타브하에서 오셨다는 걸 모르고.. 우리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방 하나는 바로 준비했습니다.. 룸서비스도 무료로 전부 제공 해드리겠습니다.."


타브하라는걸 언급한걸 보면 사령관이나 기지 차원에서 자주 이용하던 곳 같은데 어떻게든 결점을 남기고 싶진 않았나보다.

사령관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직원의 얼굴이 카운터의 직원처럼 하얗게 질려가는게 보였다. 잘못하면 오래 지속  거래가 끊길가봐 긴장한 거겠지..



"고작  하나요? 우리는  명인데?.. 역시 사령관님께 말씀드려야하나."

하지만 방 두개를 뺏어놓고 하나만 주다니.. 그깟 룸서비스 하나만 가지고 나를 회유할 샘인가.




"대신 일반실이 아닌 특실로.. 일박 팔십만원의.. 스위트룸 하나를 바로 준비했습니다.. 두개까지는 저희가 방이 정말 꽉 차버려서.."


일반 숙소가 일박 십만원일텐데 일박 팔십만원의 스위트룸.. 거절하기엔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좋아요. 안내하세요."

"가..감사합니다..."

내가 마지못해 받아들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묘..묘월아?"


"춥겠다. 빨리 들어가서 씻자."


방이 넓으니 둘이  정도의 공간은 충분하겠지. 이 김에 좋은데서 하룻밤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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