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베레스웃사
병문안을 온 우리를 반겨준 것은 비어있는 침대와 널부러진 붉은 파일럿 슈트, 그리고 한 장의 쪽지뿐이었다.
"..도망쳤어?"
나와 사령관의 통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세명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야 그렇겠지.. 오늘 들어온 놈이 도망치다니 전례미문의 사례다..
"..글씨 엄청 더러워."
류하연은 바닥에 뒹구는 쪽지를 들어서 그 곳에 쓰여진 글자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뭐라고 써있는거니?"
이 지역에서 쓰지 않는 생소한 언어인 만큼 서예린이나 주인공군이 읽지 못하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찾지말아달래.."
"아이고..."
서예린은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자 한숨을 흘렸다. 파일럿의 체크는 지휘관의 업무 중 하나인데 지금 그 업무 중 하나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으니 한숨이 나올 만 했다.
오늘 일어난 전투는 원래 시나리오에서 벗어난 IF 시나리오나 다름없는 격이라 주인공군이 이긴것으로 가출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 대신 미하일이 가출해버릴 줄은 몰랐다.
패배한 게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 본인을 만나야 알 수 있을텐데..
- 삑
서예린이 가지고 있던 핸드폰에서 짧은 알림소리가 울렸다.
"정보부에서 2호기 파일럿을 수색중.."
그녀는 자기 핸드폰을 꺼내어 그 곳에 적힌 텍스트를 읽어주었다.
"빠르네.."
사건이 일어난지 삼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곧바로 수색이 시작된 것을 보고 주인공군은 빠르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당연하지. 파일럿들은 항상 최중요 감시대상이야. 어디를 가도 항상 기록이 남아."
"정말..?"
"여태 몰랐니?"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군은 조금 당황한 듯 한 모습을 보였다. 여태 자신의 행동이 감시될 줄은 모르고 있었던 거겠지.
뭐 나야 프리랜서라 그런 제약이 붙진 않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지만 주인공군이나 미하일 같은 경우에는 타브하 직속 파일럿이니 그 정도의 감시는 어쩔 수 없다.
"..어디 이상한데라도 갔었니?"
보호자로써 궁금해지는데.. 주인공군이 어디 가면 안 될 곳이라도 혼자 슬쩍 다녀온 건가..
"그런건 아니야."
그냥 자신의 사생활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란 것 같다. 애초에 바른생활 소년인 주인공군이 어디 이상한 곳을 들릴 리도 없고.
"그러면 됐어.. 자 이제 나가볼까요?"
잡담은 여기까지다. 이제 이 병실을 나가서 해야 할 일을 해야지.
"나가다니 어디를?"
"미하일을 찾아야죠."
"..찾지 말아달라고 쓰여 있는데?"
류하연은 볼펜으로 분에 차서 눌러쓴 듯 한 쪽지를 흔들어보이며 찾지 말아달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정말로 찾지 말아달라는 사람이. 메모를 남기고 갈 리가 없잖아요?"
이런 메모를 남긴 이유는 오히려 정말 자기를 찾아달라는 거겠지. 더 늦기 전에 빨리 찾아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찾으러 가자."
주인공군이 나의 말에 동조해주며 병실을 나섰다.
역시 가출 예비군이라 그런지 그 마음을 이해했나보네. 뭐 가출은 안했지만..
—-
"아마 멀리는 못 갔을거에요. 따로 돈도 없고 대중교통을 탄 것 같지도 않으니까.."
김하사님의 차를 타고 시내까지 나왔다. 오늘은 체련의 날이라 신나게 족구볼을 차고 계시던데 갑자기 끌고와서 미안해졌지만..
"그런데 그 미하일이라는 소년. 인상착의는 압니까?"
"..."
서둘러 나왔지만 김하사님의 당연한 의문에 우리는 아무도 답변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찾으려고 한 건가 싶은 분위기가 우리들 사이를 감돌았다.
"금발에 녹안.. 그리고 외국 애니까 눈에 잘 띌거에요."
미하일에 대해 조금 스포일러를 저지르는 것 같지만 얼굴도 못 본 채 가출한 아이를 찾으려면 이 정도의 정보는 뿌려주어야겠지.
"흩어져서 찾아봐요. 선배랑 하연씨는 상가 쪽을.. 김하사님은 큰 도로 쪽을 한 번씩 돌면서 살펴봐주세요."
히로인 둘에게는 상가 안 쪽을 살펴보라고 부탁했고, 김하사님까지 내려서 찾아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주변을 돌면서 한번만 살펴봐달라고 부탁했다.
"저랑 주혁이는 골목 안쪽을 돌게요."
조금 위험한 곳이니 그 곳은 어른과 남자애가 도는 게 낫겠지.
"..괜찮겠어?"
이 도시의 골목 안쪽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서예린은 조금 걱정을 담아 말해주었다.
"괜찮아요. 얘가 있잖아요?"
한 손으로 주인공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 나?"
정작 지목당한 주인공군은 얼떨떨하게 대답했지만.
"여차하면 주혁이가 지켜줄거에요. 그치?"
"그래."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 진지하고 믿음직했다.
자 그러면 해가 지기 전에 빨리 미하일군을 찾아볼까.
...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
최근 자주 일어난 게이트의 발생으로 인한 파괴나 오래 전 부터 버려진 부지가 대부분인 곳이라 사람의 발길은 적었다.
낮에도 도심의 다른 높은 건물들의 그늘에 가려져 이 골목은 밤처럼 어두운 그늘이 항상 늘어져있는 곳 이었다.
그 어두운 뒷골목을 검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고개를 숙이며 걷는 사람이 있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꼴사납게 졌어.."
목소리에 조금 울음이 섞인 듯한, 분해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렸다.
"..쓰지말라고 들었던 하브릿까지 써놓고.. 아하트는 이겨도 그건 이길 수 없었어.."
푸른 아하트.. 베레시트 1호기와는 다르게 하브릿 시스템까지 개방한 채 싸워도 한대도 칠 수 없었던 하얀 기체.
정체도 모를 하얀 기체에게 한 방도 먹이지 못한 채 오히려 그 기체의 거대한 손에 잡아져 멀리 던져져 버렸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어른들처럼.. 당해낼 수 없었던 상대..
"으흑.."
뒷골목을 걷고 있던 2호기의 파일럿, 미하일은 목소리 끝에 묻어나오는 울음을 조금 삼키며 트레이닝복의 소매로 얼굴을 한번 문지르곤 앞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 툭
제대로 정면을 보고 가지 않았기 때문인 걸까.
자신이 점점 외진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걷던 도중 좁은 골목 안에서 두 명의 사람과 부딪쳤다.
얼핏 봐도 인상이 좋아보이지는 않는 말 그대로 뒷골목에 어울리는 내일이 없이 그저 하루를 소비하는 듯 한 인상의 남자 둘이었다.
필리스티아 베이스의 최연소 에이스 파일럿 미하일 필리스티아.
정식으로 필리스티아 라는 성을 받고 그 지위를 인정받은 미하일에게는 평생 마주칠 일도 없는 아랫바닥의 사람이었다.
"..."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은 신경이 쓰일 일도 더욱 없다는 것.
미하일은 자신이 부딪친 그 둘을 무시한 채 계속 길을 가기 위해 그 둘의 틈을 파헤쳐 걸어갔다.
"야! 너 뭐냐?"
그런 엘리트주의의 사고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용될 리가 없었다.
평범한 일반인도 아닌 바닥에 거주하는 거주민에게는 더더욱 그 건방진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애새끼가 그냥 치고 지나가?"
방금 의문을 표한 남자의 옆에 서있던 다른 남자 또한 그 행동이 자신들에게 모욕을 준 것이라 생각하곤 뒤를 돌아 미하일의 어깨를 잡았다.
"...꺼져."
한 남자가 미하일의 어깨를 붙잡자 미하일은 방금 전까지의 울음이 섞여있던 목소리를 지운 채 간결하게 말했다.
"뭐?"
"꺼지라고. 슬럼가 새끼 주제에."
"슬럼..?"
사람과 부딪쳐놓고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을 슬럼이라 부르는 행위가 남자들에게 고깝게 보일 리는 없었다.
- 후욱!
"쪼그만 새끼 주제에!"
더 이상 대화를 이을 생각도 없는 것인지 어깨를 잡은 남자는 곧바로 미하일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 미하일에게 닿지 못했다.
- 빠악!
"우욱..!"
그 자리를 피한 미하일의 주먹이 곧바로 남자의 턱 아래에 꽂히자 남자는 곧바로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새끼가!"
방금 전 까지 미하일의 어깨를 잡던 남자가 쓰러지는 것을 본 다른 남자는 미하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 빠아아아악!!
달려드는 남자를 향해 미하일은 주먹이 아닌, 다리를 곧바로 올려들어 정강이로 남자의 사타구니를 올려 차버렸다.
"우욱...윽..ㅆ.."
사타구니를 걷어차인 남자는 얼굴이 점차 파랗게 질리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약해빠진 새끼들 주제에.. 나는.. 강하단 말이야!"
남자 둘을 각각 일격에 쓰러뜨린 미하일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
미하일을 찾기 위해 골목을 한참 해맸지만 미하일은 커녕 그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무리한 재개발의 폐해로 미로같이 꼬인 도시의 골목을 해매는 것은 그야말로 모험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날도 점점 어두워져가는데.. 더 어두워진다면 정말 전문 수색요원들을 부르거나 헬기를 띄워야할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가급적 일이 커지기 전에 내 손에서 해결하고 싶다.
"주혁아. 여기서 부터 흩어져서 찾자."
"뭐? 안 돼. 널 혼자 보낼 수는.."
호위라고 데려와놓고 흩어져서 찾자는 이야기를 꺼내자 주인공군은 납득하지 못한 듯 바로 부정했다.
"괜찮아. 지금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어."
"그래도.."
대부분 골목도 거의 살펴봤고 여기서 두 갈래로 나눠진 곳이니 나눠서 찾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데..
"하자면 해. 내 몸은 내가 지킬게."
조금 강하게, 상황이 급한 만큼 억지를 부렸다. 정말 안 되면.. 뭐 아르베넷이라도 부르지.
"..알았어."
고집을 부리자 통한 듯 주인공군도 고개를 끄덕이곤 나와 다른 골목으로 달렸다.
...
이제 이 곳이 마지막 골목이다.
이 곳이 아니라면 주인공군이 있던 곳이 정답.. 아니면 우리 모두 틀렸을 수도 있겠지.
골목 끝에 있는 것은 버려진 개발 예정지.. 건물의 골조가 올라가다 만 공사 현장이었다.
너덜해진 차단막 안쪽을 발꿈치를 들어 살펴보니 철골 위에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있는 검은 트레이닝 복을 쓰고 스포츠캡을 눌러쓴 미하일을 찾을 수 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탈출한건 아니었구나..
현장의 차단막 밑에 뚫린 구멍을 통해 기어들어간 뒤 청바지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혼자 주저앉아있는 미하일을 향해 다가갔다.
"한참 찾았잖아. 이런 데 있었구나."
"..넌 누구야?"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미하일은 푹 숙인 고개를 조금만 들어 나를 한번 쳐다봤다.
"미하일 필리스티아.. 베레시트 2호기의 파일럿이지?"
"..타브하의 사람이야? 난 거기로 안갈 거야."
그래도 대화가 이어지는 것을 보니 이야기를 나누면 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
미하일이 앉아있는 철골의 옆에 쌓인 흙먼지를 털곤 조금 거리를 두고 옆에 나란히 앉았다.
"억지로 돌아오라고 하진 않을게."
"...정말?"
당연히 자기를 설득해서 데려갈 줄 알았었던 건지 돌아오라고 억지로 권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고개를 들어 녹색의 눈으로 이제야 나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은색..."
"그래. 네 금색과는 다른 느낌이지? 눈도 서로 다르고."
금발의 녹안, 어떻게 보면 외국인에게는 충분히 발현 가능한 유전형질이었기 때문에 적합자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 있겠지만 에메랄드처럼 맑은 녹색의 눈이 미하일이 적합자라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응.. 나와는 달라.."
미하일과 눈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조금 경계가 옅어진 듯 했다.
"왜 돌아가기 싫은 건지 이야기해줄 수 없을까?"
예쁜 에메랄드 색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미하일에게 도망친 이유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항상 아이와 이야기 할 때는 눈을 제대로 마주보고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은 상담사의 자세라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기억이 난다.
"..졌어."
"1호기와 싸워서 이겼잖아?"
"..쓰고 싶지 않은 하브릿을 억지로 써서 이겼어.."
자기가 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아직 제어가 힘든 하브릿 시스템을 억지로 꺼내 썼겠지.
자신의 실력이 아닌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승리를 따냈다는 게 마치 부정행위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에 상대한 아저씨가 너무 강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져버렸어.."
1호기를 상대로 부정행위를 저질러 이길 수 있었지만 그 뒤에 나타난 아르베넷은 부정행위를 써서도 이길 수 없었다..
날뛰는걸 조금 막으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집어던진건 너무했나.. 은근 크게 상처가 되었나보네.
"어른한테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면 안 되는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져버렸어.."
미하일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우울해하는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동시에 그 우울감을 풀어줄 해답도 찾아버렸다.
"..아저씨에게 진게 아닌데?"
"응..?"
"그거 나야."
"뭐...?"
2호기를 쓰러뜨렸던 파일럿의 정체가 나라는 것을 밝히자 미하일은 조금 당황해하는 듯 한 표정이 그 얼굴 위로 지나갔다.
"목소리는.. 아저씨였는데?"
"보이스체인저. 외부 회선은 전부 목소리를 변경해서 쓰고 있어."
"..이렇게 작은 여자애인데?"
이야기를 들은 미하일은 자신을 꺾은 상대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나라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은 듯 눈을 껌뻑였다.
"여자애는 파일럿 하지 말란 법 없잖아? 아까 봤었겠지만 나는 상-당-히 강해."
"정말..?"
축 쳐져있는 미하일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것 같은 어중간한 어른이 아닌, 여자인 나와 싸웠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자 조금 우울감이 해소되는 것 같아보였다.
미하일에게는 내가 말한 이야기가 회복책이 될 수 있었다.
"세상엔 나보다 어린데도 강한 사람이 있었구나.."
"어리진 않아."
"응?"
"같은 나이야. 열일곱."
어려보이는 외모 때문에 동갑이라고 생각하진 못한 것 같다. 저 나라 애들은 십대때 정말 부쩍부쩍 커버리니까 한참 연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나 타브하로 돌아갈 수 있을까?"
미하일은 가지고 있던 고민이 덜어진 듯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이 아닌 자신감을 서서히 회복해가는 듯 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까는 돌아가지 않겠다면서?"
미하일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분위기가 가벼워졌으니 조금 농담 정도는 해줘도 되겠지.
"..민폐를 끼쳤으니까. 필리스티아에서 데려다 준 캡틴에게도.. 타브하의 사령관에게도.."
"사과하면 돼."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과하면 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항상 일만 저지르고 다녀서.."
스크립트 위에서 항상 건방져 보이는 듯한 태도 아래에 이렇게 상냥한 마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단지 표현하는 방법이 서투를 뿐, 미하일도 역시 나와 개발자군이 만들어낸 아이 중 한명이니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소가 지어졌다.
"사과하는 동안 따라다니면서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고.. 고마워.."
옆에서 도와주겠다는 말을 듣자 미하일은 서툴지만 고맙다는 말을 나에게 건넸다.
나의 아이들을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식의 잘못을 같이 사과하는 것도 부모의 몫이니까..
—-
해도 벌써 저물었고 밤이 깔려오자 공사현장은 어두워져서 더 오래 머물기엔 위험해보였다.
"더 늦기 전에 이제 돌아가자."
먼저 일어난 뒤 미하일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응.."
손을 잡은 미하일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 쿵! ...찌이익
바닥 아래에 있던 자재에 걸려 넘어져버리며 나를 바닥에 깐 채 엎어져버렸다.
"아야 야야.."
등에 조금 충격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내가 넘어진 곳은 맨 흙바닥이었던 듯 뭔가 박히거나 찔린 느낌은 없었다.
"괜찮아?!"
나의 위에 올라탄 미하일은 그 표정에 어쩔 줄 모르는 당황이 보였다. 자기 때문에 넘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 걱정이 될 만했겠지.
"괜찮아. 별 일 아니야.. 응?"
괜찮다는걸 알려주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는데 입고있던 티셔츠가 철골 끝에 걸려버렸던 듯 옆구리부터 가슴 위쪽이 찢겨버렸다.
"아하하.. 조금 민망하긴 하네."
다행히 몸에 상처는 없었으니 돌아가는 동안 잘 가리기만 하면 그만이다.
"내가 윗옷 벗어줄게. 이거로 가리면.."
미하일은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상의를 나에게 벗어주려는 듯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거기 너. 묘월이에게 ...뭘 하고 있는 거야?"
그 순간, 뒤늦게 공사현장에 도착한 주인공군과 나와 미하일은 눈이 마주쳐버렸다.
"별 일 아니야 그냥.."
- 파악!
순식간에 달려온 주인공군은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의 위에 올라탄 미하일을 거칠게 밀쳐버렸다.
"이 새끼가.. 묘월이에게..!"
- 탁!
"..무슨짓을 하는 거야!"
주인공군은 화가 난듯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밀쳐진 미하일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는 것을 내가 가까스로 팔을 들어 잡아 붙들었다.
"저 새끼가 너한테.. 널..! 겁탈하려고..!"
"그딴 일은 없었어! 그냥 넘어진 거야!"
나와 미하일을 두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역겹다는 기분이 들어서 주인공군에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머리에 피가 쏠린 듯 흥분한 주인공군의 팔을 붙들었지만 힘의 차이 때문에 점점 한 팔을 붙잡은 나의 양 팔이 끌려갔다..
"아..아아.."
갑작스럽게 밀쳐진 미하일은 조금 충격을 받은 듯 옆으로 넘어진 채 작은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미하일에게 사과해!"
아무리 주인공군이라지만 터무니없는 오해로 미하일을 밀친 것은 화가 났다.
"내가 왜! 이게 다 저 녀석이 뛰쳐나간 것 때문에..!"
오해라는걸 알게 되어도 머리 가득 오른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은 듯 목이 붉어진 주인공군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여자애는 때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었어?!"
"여자.. 뭐..?"
주인공군에게 밀쳐진 덕분에 미하일은 모자가 벗겨져 모자 안에 넣고 있던 고운 금색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길게 흘려졌다.
나를 위해 트레이닝복의 상의를 벗어주려던 덕분에 트레이닝복 안쪽의 티셔츠 위로 보이는 봉긋한 가슴..
"2호기의.. 파일럿이..여자애라고?"
이제서야 주인공군은 미하일이 누구인지 알게 된 것 같았다.
여자아이(히로인)이면서 다른 히로인을 가로채는 히로인 강탈자.
그것이 미하일.. 아니, 미샤.. 미샤 필리스티아.
베레시트 계획 2호기의 파일럿이자 히로인인 동시에 히로인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 캐릭터다.
서서히 힘이 빠져 아래로 내려가는 주인공군의 팔을 놓고 옆으로 넘어진 미하일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실망했어. 주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