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화 〉베레스웃사 (96/152)



〈 96화 〉베레스웃사

나는 미하일 루트를 파괴해버렸다.


미하일이 마지막 12월이 되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스스로 밝혀 줄 이름을 내가 알고 있었으니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미하일의 진짜 이름인 미샤. 그 이름을 지어 준 것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미하일의 어머니이다.

미하일의 어머니도 10년 전 게이트가 열리면서 발생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나라는 '영웅'이 있었던 덕분에 게이트를 빠르게 닫을 수 있었으나, 미하일의 고향을 포함한 대다수의 나라는 그러지 못했다.

파괴된 고향을 떠나 어린 미샤는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필리스티아 베이스로 오게 되었고, 연구 시설에서 자라면서 필리스티아 베이스의 차세대 파일럿 육성과정에 선출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 미샤라는 이름이 다른 동기들에게 깔보일까봐 걱정하여 그녀의 이름을 미샤에서 미하일로 개명해주었다.

따라서 필리스티아 베이스에 등록된 그녀의 모든 전산자료도 미하일로 알려져 있으며, 미샤는 과거속에서만 존재해야하는 이름이다.

미샤에서 미하일이 된 후 그녀는 10년간 파일럿 과정을 밟으면서 다른 동기들을 전부 재치고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뒤로 필리스티아 베이스의 이름을 물려받아 그녀는 미하일 필리스티아가 되었다.



필리스티아 베이스의 파일럿 육성과정은 모두 베레시트 계획이라는 큰 나무를 이루고 있는 한 개의 가지였다.

2호기를 위한 완벽한 파일럿의 육성. 그녀가 하브릿 시스템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도 10년간 2호기와 함께 준비 된 소녀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완벽에 가까운 파일럿과 개발 시험기의 취지에서 벗어난 정식 모델인 2호기.

최고의 자리에  그녀에게 잊혀진 과거를 상징하는 이름인 미샤를 알고 있는 것은 이제 이 세상에 그녀밖에 없었을 터였다...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미하일은 현관에 선 채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상황을 쉽게 풀기 위해 미리 알고 있던 지식을 꺼내버린 것이 독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자칫하면 필리스티아 베이스의 정보에도 없는 극비 사항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교단의 첩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는 순간이 다가왔다.




"..."

조금 긴장해버린 탓에 손이 살짝 떨려오는 것을 옷의 소매를 조금 내려 가렸다.




"마마..?"

"뭐..?"



이어지는 미하일의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꽈악!

여차하면 엘에게 아르베넷을 불러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미하일은 신발을 벗고 나의 앞 까지 곧바로 다가와 나의 손을 잡았다.


"..진짜 마마야?"

강인해보이던 녹색의 눈이 어미를 찾는 새끼새 마냥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 그럴 리가 없잖니."

"아..아니야?"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아닌 것을 맞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미하일의 표정은 조금 울것 같이 바뀌었다.




"미샤. 몇 살?"

"열일곱.."


"아까 나는 몇 살이라고 했지?"

"열일곱...."

현실적인 숫자를 지적해주자 나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이 힘이 풀려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마마는 무슨.. 그럴 파파도 없는데 출처모를 자식이 어디서 솟아 나올 리가 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마마만 알고 있는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알려줘!"


이대로 어물쩡 넘어갈 수 있을  알았지만 미하일은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다시 물었다.




"그건..."

미하일은 손을 꼼지락 거리며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상대인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비밀이야."


"뭐..?"


"비밀."

"그런 게 어딨어!"

- 탁!


미하일은 꼼지락 거리던 손을 들어 올려선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필리스티아 베이스의 훈련규약."

- 움찔!


훈련규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어깨에 올라와있던 미하일의 손이 멈추었다.


"승자의 명령은 절대적. 훈련 시절에 배우지 않았니?"

승자의 명령은 절대적. 극한의 환경을 가진 필리스티아 베이스의 훈련 과정에서 통용되는 규칙이었다.


어디까지나 교관의 명령을 생도들이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까 내가 이겼었지?"

"으읏.."

사도로 2호기를 단번에 집어던져 기절까지 시켰으니 내가 승자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 훅!


그 순간 시야가 거꾸로 돌아버려선 내 시야는 독신자 숙소의 낡아빠진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이제 내가 이긴 거지?!"

미하일은 나의 어깨를 그대로 잡은 채 밀쳐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정말로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표정이 조금 들떠선 숨도 거칠어보였다. 좁은 방에서 갑자기 움직이니 그렇지.

어깨를 잡은 손은 어느새 내 양팔을 붙잡아 나의 몸을 결박하고 있었다. 조금 움직여보았지만 상체도 미하일의 상체가 가까이 붙어선 빠져나갈 구석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맨 몸으로 너랑 내가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거야?"

나의 냉정한 대답에 내 손목을 쥐고 있던 힘이 조금 약해졌다.


"파일럿으로 싸워서 이겨야지. 맨몸으로 싸워서 이기는  아무 의미가 없잖아."


"그치만 그 때는.. 2호기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골야트의 팔도 떨어졌고.."


파일럿으로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하자 미하일은 조금씩 말끝이 흐려지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하브릿까지 열어버린 주제에?"


"그건.."

"내가 막아줘서 다행이었지. 만약 그게 열린 채로 닫지 못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


 손목을 감싸 쥔 손의 힘이 완전히 풀려버리자 그녀의 몸을 가볍게 밀어낸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네 이름을 알고 있는 이유를 알고 싶으면. 나중에 이겨보렴 미샤."

"알았어.."

다행스럽게도 큰 위기 없이 이 자리를 넘길 수 있었다.




---



그 뒤에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냉장고를 뒤져봤지만 전에 어디서 받은 포도주스와 아침 대신 먹는 칼로리 스틱이 전부였다.



"초대해놓고 이런 것 밖에 없네 미안해. 내일은 맛있는걸 먹으러 가자."


"이 정도면 .. 괜찮아."


어쩐지 가정 형편이 안 좋아져서 아이를 달래는 듯 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지만.. 미하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혹시 매일 MRE만 먹다보니 별 다를 게 없다고 여기는건가.. 나중에 꼭 맛있는걸 먹여야겠다.



- 뚝

칼로리 스틱을 반으로 잘라 미하일에게 건네주었지만 그걸 받은  먹지 않았다.


"안 먹고 뭐하니?"


"그게.."


벌써 시간이 저녁을 한참 넘어버려 배가 고플 텐데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답답했지만 먹지 않는다면 먹여주면 그만이지.

"아 해봐. 아-"

"아..아."


미하일의 손에 들린 칼로리 스틱 조각을 집어 입에 넣어주니 그제서야 먹기 시작했다.




"잘 먹네."


외국의 음식이라 경계하고 있던 건가? MRE에 들어있는 것도 이거랑 비슷할 텐데?

- 뽁

유리병에 담긴 포도 쥬스를 하나 열어 컵에 담아 건네주었다.

"마시는 건 혼자 마실 수 있지?"


이것도 먹여달라면 고개를 잡은  억지로 흘려 넣는.. 물고문 같은 이미지 밖에 연상이 되지 않는다.


"이..  정도는 혼자 마실 수 있어."

컵을 양 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마시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키는 나보다 머리 반개 정도 더  주제에 2호기에서 내려 직접 마주하니 아이 같은 구석이 남아있었다.

미하일이 잘 먹는 것을 보고나서야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역시 취사기구를 설치할 수 없으니 불편한 게 많네.. 정말 관사로 옮길 준비를 해야 할까.


...




식사를 마친 뒤  포장지를 적당히 구겨 버린 뒤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먼저 씻을래?"

"머..먼저..?"

집주인보다 먼저 씻는 게 미안해서 그런 건지 선뜻 나서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씻어. 칫솔은 찬장에 여분이 하나 있으니까 그거 쓰고."


"아..알았어."

2호기를  때는 그렇게 날뛰더니 남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느라 그런 건지 약간 불편해하는  같았다.

그냥 자기 집처럼 편하게 침대에 드러누워도 되는데 뭘 저리 살핀담.




...

"다 씻었어.."

샤워를 마친 미하일은 자기 짐에서 꺼냈던 파자마 비슷한 옷으로 갈아입은  욕실에서 나왔다.



"나도 씻고 올게. 졸리면 침대에서 먼저 누워있어도 돼."

"으..응."

물 온도가 맞지 않았나? 샤워를 끝냈는데도 편안한 기색이 없어 보이는 듯한 미하일을 뒤로 하고 나도 갈아입을 속옷만 집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


---



샤워를 마치고 속옷만 입은 채 돌아왔더니 제법 긴 시간이었는데도 미하일은 먼저 잠들지 않고 침대 한쪽에 앉아서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안 자고 있었어?"

미하일의 옆에 앉아서 잘 때 입는 파자마의 바지를 올려 입으며  먼저 잠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그게.."


 이야기라도 있었던 건가?


"여..역시 이긴 사람의 뜻을 따라야하니.."

미하일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곤 흔들리는 눈으로 힘들게 이야기를 꺼내는 게 보였다.


"나..나를 마음대로 해도 돼!"


미하일은 눈을 감은 채 양 팔을 뻗어 펼쳤다.



"...뭐?"


이어지는 이야기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티셔츠에 머리를 밀어 넣고 있던 내 손이 멈췄다.


"아..아까 혼례의식을.. 했으니까.."

"혼례의식 이라고..? 아..."

정말로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미하일이 사는 국가의 혼례의식에는 신부를 데려와 첫날밤에 맛있는 것을 먹이고 술을 준  첫날 밤을 보내는 풍습이 있다.


이걸 어떻게 알고 있냐면 원래 12월 이벤트 때 함께 하룻밤을 보내면서 미하일이 아닌 미샤라고 불러달라는 이벤트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술은 준 적이 없는데? 설마 포도쥬스를 술이라고 착각한 건가.

- 따악!

"아얏!"


"헛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잘 준비 하렴."

눈을 감고 있는 미하일의 이마를 검지 손가락 끝을 당겨 한번 따악 하고 때렸다.




"아..안하는 거야?"


딱밤을 한대 맞자 눈을  미하일은 여전히 긴장한 채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여자끼리 혼례를 할리가 없잖니."


하긴  해. 자식 같은 애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품을 리가 없잖아. 미하일도 주인공군도 전부 자식.. 주인공군은... 물리적으로도 무리다..

'나는 상관없는데..'


마저 티셔츠를 입는 동안 미하일의 기어가는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녀석 히로인을 진심으로 채가는 녀석이니까 여자끼리라도 가능하긴 하겠구나..


대충 못들은 걸로 넘어가자.



"알았으면 침대에서 자. 난 바닥에서 잘게."


손님을 맨바닥에서 재울 수는 없으니까 이불은 여벌용으로 하나  있으니 내가 그걸 바닥에 깔고 누워 자면 되겠지.




"침대 넓은데.. 같이 자도 되지 않아?"

침대에 누운 미하일은 침대의 넓이를 확인하곤 같이 자도 되지 않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독신자 숙소의 침대는 성인 남자 기준으로 맞춰 생산된 거니 여자애  정도면 조금 좁아도 같이 잘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같이 잘까.."

역시 딱딱한 바닥 보다는 침대에서 자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불을 끄고 미하일의 옆을 비집고 들어갔다.

조금 좁긴 했지만 불편하진 않게 잘만한 공간이었다.


"잘  미하일."

"잘자.."

오늘 제법 여러 일이 있었던 덕분에 미하일도 나도 금방 잠들었다.


---

평소보다 조금 후덥지근한 느낌이 들어서 알람보다 먼저 일어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왠지 몸이 무거운  엄청나게  차원수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같은 일은 없었고, 미하일이 나의 몸을 껴안은  자고 있었다.




"마마.."

아직 잠꼬대를 하는 미하일의 얼굴은 깨어있을 때의 긴장 가득하던 모습이 아닌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잘 때는 그냥 보통 여자애 같구나.


[잘 주무셨나요? 마스터.]


미하일이 깨지 않도록 조심히 밀어내고 의자에 앉아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모금 마시곤 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

"어제 창을 놓고 온 것 같은데.. "


엘과 어제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 현장에 두고 온 창이 문득 생각났다.

2호기를 견제하겠다고 꺼내서 던진 것은 좋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솟아난 창이라 수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는데..

[창이라면 어제 바로 회수했어요.]

"다행이야.. 역시 엘은 유능해."


역시 엘은 알아서 맡겨두면 잘 해주는 유능한 부관이다. 그런 유능한 부관의 가운데를 문질러 쓰다듬어주었다.

[어제  소녀가 말한 '하브릿 시스템' 이라는 건 뭔가요? 마스터.]

"'아론 하브릿' 말이지?"

하브릿 시스템.. '아론 하브릿' 1호기와 2호기에만 탑재 된 핵심 기능.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엘에게도 알려주는 게 나쁘지 않겠지.

"으응.. 마마 어디.."


엘에게 아론 하브릿에 대해 설명해주려던 때 미하일이 잠에서 일어나 덜 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잠꼬대나 할 줄이야.. 어제 당당하게 깽판을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귀여움이었다.



"일어났니 미샤? 가서 세수 하고 와."


"엘..?"


미하일은 손을 올려 눈을 부비곤 나를 한번 쳐다보고, 옆에 있는 엘을 계속 바라보았다. 아까 내가 엘이라고 부른걸 엿들은 걸까.


엘에 대해 설명해줘야 하나.. 공중에 떠있는 원반체를 보면 신기하게 느껴지겠지.



"타브하에도 엘이 있어..?"

미하일은 나의 옆에 있는 엘을 이전에 본 적이 있던 것처럼 이야기 했다.

"..뭐?"

미하일은.


내가 모르는 다른 엘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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