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베레스웃사
"엘을.. 알고 있어?"
"선생님도 엘을 가지고 있었는 걸?"
미하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나선 나의 옆에 부유하고 있는 엘의 윗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정말 타브하에도 엘이 있구나. 내가 옛날에 봤던 엘이랑 똑같이 생겼네?"
"옛날에..?“
"선생님이 데리고 있었던 엘은 더 시끄러웠는데.. 묘월의 엘은 얌전하네?"
미하일이 계속 엘을 건드리던 탓에 조금 스트레스를 받은 것인지 엘은 미하일의 손길을 피해 나의 뒤에 스윽 숨었다.
방금 전 그녀의 말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선생님' 이라는 사람이 엘을 가지고 있다니..
"미샤. 선생님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니?"
"필리스티아 베이스에서 내 교육을 담당해주던 선생님이 있었어."
아까부터 미하일이 언급하고 있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짐작이 가는게 없었다.
"그 선생님이 데리고 있던 게 엘이야."
필리스티아 베이스에는 미하일을 제외하고 큰 비중이 있는 캐릭터는 원래 시나리오에 없었을 텐데.. 이것도 정식 버전에서 새로 추가된 내용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대로 '선생님'이란 사람이 엘을 데리고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나와 같은 사도..
"엘.. 혹시 다른 개체에 대해 알고 있니?"
[아뇨 마스터.. 저는 저를 제외한 개체에 대한 정보가 없어요..]
엘은 자기를 제외한 다른 개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에게 감추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엘에겐 다른 사도와 엘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어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너 처럼 예쁜 은색의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어."
미하일은 엘이 나의 뒤로 피하자 조금 아쉬운 듯 나의 뒤로 손을 뻗다가 내 머리카락을 조금 집어서 매만졌다.
"어제 네가 날 찾으러 왔을 때도 처음엔 선생님이 다시 온 줄 알고 쳐다봤었는데.."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어?"
"순직하셨어."
미하일은 손끝으로 만지고 있던 나의 머리카락을 놓고 조금 슬픈 듯 이야기 했다.
"10년 전에..?"
이 세계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죽은 시점은 10년 전 게이트와 관련이 깊다.
사령관님의 부인도, 주인공군과 미하일의 어머니도 대부분 10년 전 사건에서 사라졌으니.. 하지만 그녀가 필리스티아 베이스에 온 시점을 생각하면 시간이 맞지 않는다.
"아니야. 5년 전에."
미하일이 만난 다른 사도는 5년 전 사라졌다.
"얼어붙은 땅에 은색의 거대한 차원수가 나타났다고 급하게 출격하셨어.."
필리스티아 베이스 주변의 얼어붙은 땅이라면 아마도 영구 동토쪽.. 생명이 없는 땅에 차원수가 나타났다는 게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임무에서 돌아오지 못하셨고.. 여러 번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어.. 선생님이 사라진 곳은 새하얀 눈 뿐.."
미하일은 그 이야기를 어제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처럼 슬픈 눈을 한 채 나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전부 날 떠나버리고 있어.. 싫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미하일에게 팔을 뻗어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등과 머리를 조금 쓰다듬어 주었다.
"마마는.. 어디에도 안갈 거지?"
그녀는 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조금 울었다. 지금만큼은 마마라고 부르는 것을 받아주었다.
"..계속 너의 곁에 있어줄게. 미샤."
미하일의 곁에 남을 수 없었던 다른 사도를 대신해서라도 나는 나의 아이들의 곁을 계속 머물며 지켜 줄 것이다.
---
미하일을 진정시켜준 뒤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에 갈 준비를 마쳤다.
학교에 가는건 좋은데 그 동안 미하일은 어떻게 해야 하지? 기지에 있는 탁아소에라도 맡겨두어야 할까? 조금 큰 아이긴 하지만 다른 애들이랑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 위잉
기지 내 탁아소 까지 가는 길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동안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미하일군과 함께 등교해주세요. 전학 관련 수속 처리는 끝났습니다.'
사령관님에게서 온 문자. 미하일도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다는 것 같았다.
"미하일. 같이 학교에 가자."
필리스티아 베이스에서 모든 교육을 대신 받느라 학교생활을 해본 적 없는 미하일이 십대 다운 학창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조금 미소가 지어졌다.
"게엑.. 학교는 싫은데.."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정작 미하일 본인은 학교에 가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학교는 다녀야지. 학교를 나와야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거야."
비록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받아두는 정도는 좋지 않을까. 평화로워 진 시대가 오면 파일럿이 아닌 다른 일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법이니 말이다.
"난 파일럿인데..?"
"1호기의 파일럿이나 오퍼레이터도, 부 지휘관도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미하일은 혼자서 집 보고 있을 거야?"
"아하트 까지.."
"나도 열심히 다니고 있어."
마지막으로 나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자 미하일은 표정을 잠깐 찡그린 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 아니 묘월이 다니면 나도 갈래.."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겨우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
그렇지만 미하일의 교복은 당연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관계로 미하일은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등교하게 되었다.
검은 가죽 부츠를 신고 그 위에는 딱 달라붙는 진, 그 위에는 후드 집업을 걸치고 어제 썼던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조금 불량한 아이처럼 보이는 패션이었지만 원판이 미소녀라 그런지 불량이라기 보단 보이시에 가까운 패션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스타일이 좋은 체형이니까 좀 더 예쁜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스커트 같은건 안입니?"
옆에 선 나는 언제나와 같은 조금 짧은 디자인의 교복 치마를 걸치고 있었으니 다리가 쭉 뻗은 그녀라면 나보다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치마는 조금 부끄러워서.."
"아쉽다.. 한 번 보고 싶은데."
자존심 같은 이유 때문에 입지 않는 줄 알았지만 그런 문제는 아니었나보다.
"그..그러면 다음에 입을게.."
내가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이자 미하일은 다음에 입어보겠다며 조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정말?"
"..응."
"고마워."
부끄러워도 도전해보는 행위가 대견해 보이길래 조금 웃어줬다.
이야기를 나누며 언제나와 같은 정류장에 도착하자 아침에 출발이 조금 늦은 덕분에 주인공군이 먼저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주혁아-"
평소엔 당연히 내가 인사를 받는 쪽이었는데 늦게 나오니 내가 인사를 하게 되는 날도 있구나.
"어 안녕... 미하일?"
주인공군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가 내 옆에 선 미하일을 보고 잠깐 멈췄지만 그녀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내 옆에 선 미하일도 어색하게나마 손을 조금 들어 올려 인사를 건넸지만 어제 사과를 했더라도 둘 사이에 아직 미묘하게 어색한 감정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 푸슈우
어색한 분위기의 둘 사이의 분위기를 깨듯 기지 버스가 도착했다.
평소처럼 주인공군과 둘이 앉으려다가 혼자 남을 미하일이 신경이 쓰여서 적당한 자리를 찾다보니 맨 뒷자리가 눈에 띄었다.
학창시절 잘 나가는 애들만 앉는다던 대형 버스 맨 뒷좌석.. 뭐 지금 버스는 기지내 일반인들도 타는 버스였지만 저기에 앉으면 되겠지.
창가자리에 먼저 앉자 나의 옆에 미하일이, 그리고 그 옆에 주인공군이 앉았다.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을게. 도착하면 깨워줘."
어제 일찍 자서 별로 피곤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자는 척을 하면 주인공군과 미하일이 나를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른은 한발 뒤로 물러서서 지켜봐주고 있을게. 젊은 애들끼리 이야기 나누고 있으렴.
안락한 시트의 느낌을 느끼며.. 머리를 조금 뒤로 기대었..다...
...
".. 출발한 지 삼분도 안되서 벌써 자고 있어."
잠깐 눈을 붙이겠다는 그녀는 잠깐이 아니라 정말 푹 잠들어서 시트에 완전히 몸을 눕히고 있었다.
1호기의 파일럿은 어색한 버스에서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모르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그것은 2호기의 파일럿도 마찬가지였다.
"아..안녕?"
1호기의 파일럿은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너도 학교 다니는 거야?"
"응.."
"그렇구나.."
기껏 마련된 자리였지만 친구의 친구끼리는 서로 어색한 것처럼 둘 사이의 구심점인 그녀가 없으면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 덜컹
버스가 운행 중 튀어 나온 곳을 한번 밟은 듯 버스가 흔들렸다.
- 툭
창가에 기대어 편하게 잠든 그녀의 머리가 흔들려 2호기 파일럿의 가슴 위에 머리를 기대 얹었다.
"마마가 나에게 기대서자고 있어.."
2호기의 파일럿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가슴 위로 기대어진 은발의 소녀의 머리를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기대어 주었다.
"마마.. 엄마?"
"묘월은 내 마마가 되어줄지도 몰라."
"뭐..? 그게 무슨.."
그는 2호기의 파일럿의 발언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황당함에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지만.
"으음.."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 기대어 자는 소녀의 얼굴이 행복해보였으니.. 일단 소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입을 닫았다.
---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이렇게 푹 자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버스에서 내리자 미하일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였고, 주인공군은 뭔가 떨떠름해 보였다.
내가 자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무튼 미하일을 교무실에 바래다주고 온 후 교실에 들어왔다.
"안녕 묘월씨.."
"안녕하세요 하연씨."
평소와 같은 아침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어제.. 미하일은 잘 찾았어?"
"네. 별 일 없이 잘 찾았어요."
"사나워 보이던데.."
류하연은 어제 오퍼레이터로 1호기와 2호기의 전투 기록을 실시간으로 들었으니 미하일에 대해 오해할만도 했다.
"사납다뇨. 어제 집에서 같이 잤는데 착한 아이던데요."
미하일이 착한 아이라는걸 류하연에게도 알려줘야겠지. 미하일은 잠버릇도 얌전한 착한 아이다.
"같이 자..?"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은 류하연의 눈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혁이랑 호텔에서 같이 잔 것도 모자라서 또 남자랑 한 침대에서 자다니 정말 난교토.. 웁."
"이..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세요!"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류하연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
입은 막았지만 류하연의 눈은 왠지 무서워보였다.. 꼭 해야 할 말을 못했다는 듯 한 표정..
- 드르륵
류하연의 입을 막고 있는 동안 담임 교사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학생이 왔습니다."
교탁 앞에 선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전학생?'
'여기에?'
'어떤 애지?'
전학생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반 분위기가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역시 십대에겐 새로운 친구가 등장한다는 것은 큰 가십거리가 되는구나.
"외국에서 온 학생입니다.."
'와! 외국!'
외국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다른 아이들은 좀 더 들뜬 듯 제법 분위기가 시끄러워졌다.
- 쿡
"힉"
옆구리에서 자그마한 통증이 느껴져 돌아보니 류하연이 내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전학생.. 미하일이야?"
"네 맞아요."
"토끼의 난교 상대.. 문란할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어.."
미하일에 대해 계속 오해를 하고 있네..
"..자꾸 미하일에 대해서 나쁜 소리만 하시면 하연씨에게도 나쁜 짓 할 거에요."
옆구리를 찌른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엮어 손을 쥐어주고 조금 경고를 보내듯 웃어주었다.
- 덜컹!
나에게 손이 잡힌 그녀는 조금 놀란 듯 의자가 조금 흔들렸다.
"뭘 그렇게 크게 놀라요.. 농담이에요."
"저..정말?"
- 드르륵
류하연과 잡담을 나누던 사이 교실 문이 열리고 미하일이 들어왔..는데 교실에 후드 쓰고 들어오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외국 애? 잘 생겼다..'
'미남일지도..'
앞쪽에 앉은 여학생 몇 명이 담임 교사 옆에 선 미하일을 보고 잘 생겼다는 등의 이야기를 자기들 끼리 나누었다.
"안됐지만 난 미남이 아니야."
미하일이 그 이야기를 들은 듯 머리 위에 눌러 쓰고 있던 후드를 걷자 예쁜 금발이 어깨 위로 내려왔다.
- 찌익
칠판 앞에 놓여있는 마커를 쥔 뒤 칠판에 자기 이름을 멋지게 적었으나.. 자국어로 적은 탓에 다른 사람들은 읽을 수 없었다.
"미하일 필리스티아 .. 라고 써있네."
담임 교사는 그 언어를 읽을 수 있었던 듯 아무도 읽지 못하는 학생들을 대신 해서 미하일의 이름을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잘 부탁해."
미하일은 조금 어색한 우리말로 인사를 건넸다.
'와! 미소녀!'
미하일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다른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애들이 환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멋져..'
당당한 미하일의 모습에 여학생들은 성별은 상관없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자였어?"
미하일을 본 류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어제 찾았다는 이야기만 했었지 미하일이 여자라는 이야기는 오늘 아침에도 해주지 않았구나.. 그래서 아까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미하일 양의 자리는 저기에.."
"저기 앉고 싶은데요."
"..어디 말이지?"
담임 교사가 미하일의 자리를 지정해주던 중 미하일은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가 있다고 당돌하게 담임 교사의 말을 끊었다.
- 뚜벅 뚜벅.
교실 바닥에 미하일의 워커 굽 소리가 조용하게 울리더니, 나의 옆 자리에 멈춰 섰다.
"여기에 앉고 싶어요."
미하일은 나의 옆.. 류하연이 앉은 자리 위에 당당하게 손을 얹은 채 이 자리에 앉고 싶다고 말했다.
"거긴 이미 다른 학생이 앉은 자리잖니..?"
담임 교사는 미하일의 행동을 보고 조금 한숨을 쉬며 다른 자리에 앉으라는 듯 적당히 이야기 했다.
"주인이 있으면 뺏으면 그만. 조그만 애는 저리로 가."
미하일은 당돌하게도 류하연의 두 눈을 바라보며 도발을 걸었다!
"헤에.."
류하연은 당돌한 미하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질 수 없다는 듯 미하일의 눈을 노려보았다!
히로인끼리 신경전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왜 그 대상이 나지?.. 이런 이벤트의 주역이 되어야 할 주인공군은 맹하게 이 쪽을 보고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면.. 내가 수습해야겠지.
- 따악!
"아얏!"
필통을 손에 들고 미하일의 머리를 때렸다.
"아침부터 억지 부리지 말고 빈자리에 가서 앉으렴."
"아..알았어."
미하일은 나에게 머리를 한대 맞자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곤 순순히 나의 뒤에 비어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묘월씨.."
미하일을 자리에 곧바로 돌려보낸 나에게 류하연은 감동한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대단해..'
'외국에서 온 전학생을 한방에..'
'역시 일인자..'
아침 조례를 방해하는 미하일을 자리에 돌려보냈을 뿐인데.. 뭔가 이상한 소문이 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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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지평선이 펼쳐진 아름다운 소금의 바다.
그 위에는 맑고 푸른 하늘과 바다의 색과는 이질적인 검게 빛나는 관이 놓여 있었다.
- 쾅!
검은 관의 뚜껑이 큰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뚜껑이 사라진 관에는 갈색 피부의 가느다란 다리 한 짝이 관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이윽고 관의 양 옆을 다리와 같은 색을 띈 갈색의 가느다란 손이 집고 관 안에 있는 자는 몸을 일으켰다.
"잘-- 잤다--!"
관에서 몸을 일으키며 쾌활하게 외친 것은 갈색의 피부를 한 나신의 은발 소녀.
- 파악 !
그녀의 뒤로 방금 날아간 검은 관의 뚜껑이 소금의 바다 위로 떨어져 잔잔했던 물결 위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아하 하하하! 얼마 만에 일어난 거지?"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4447일 하고 13시간 만입니다. ]
나신의 소녀 옆으로 소금의 바다에서 하얀 원반모양을 한 물체가 떠올라 소녀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오랜만이야 엘!! 너도 자고 있었던 거야?!!"
[주인님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몸이니 말입니다.]
소녀의 옆에 있는 엘 이라 불린 원반은 소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구나! ..응? 이 땅에 나만 있는게 아닌가보네?"
몸을 완전히 일으켜 기지개를 키던 소녀는 잠깐 이질감을 느낀 듯 움직임을 멈추곤 양 주먹을 들어 올려 적을 경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뭐 여기 있는건 아니지만!"
[네. 주변에 탐지 되는 생명 반응은 없습니다.]
소녀는 방금 전 까지 취했던 날카로운 경계 자세를 풀곤 다시 쾌활하게 웃었다.
"바다 너머로 형제의 반응이 느껴져!"
[다른 사도 말씀이십니까?]
"그런 딱딱한 단어로 형제들을 부르지 말아줘! 엘!"
[알겠습니다 주인님.]
소녀의 입에서 나온 형제라는 단어를. 그 옆에 떠오른 엘은 사도라고 불렀다.
"엘! 형제들을 찾으러 가자!"
[주인님의 육신을 준비하겠습니다.]
- 쿠우우..
소녀가 누워있던 관의 뒤로 소금의 바다가 갈라지며, 그 속에서 하얀 거인이 솟아올랐다.
단단한 갑각을 방패처럼 두른 하얀 기체.. 아니 사도의 육신은 소녀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떠올랐다.
- 사아아..
어느새 소녀의 발아래에 있던 관은 녹아 사라지듯 모습을 감추었다.
"아버지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 까지 실컷 놀아야지! 이번엔 다시 안잘 거야!"
소녀가 있는 곳은 거대한 소금의 바다.
그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넓은 소금의 바다뿐이었다.
일찍이 게이트가 열리고, 게이트로 인한 오염이 너무나도 높아 생명이 접근할 수 없는 죽음의 땅.
신의 분노를 샀다는 뜻을 따 베레스웃사라 불리는 소금의 바다 위에서.
사도라 불리는 소녀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