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드림랜드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남자를 따라 유리벽을 넘어 들어왔다.
건물 안은 아무도 없었지만 높은 천장에 달린 조명 만큼은 황량한 로비를 비추고 있었다.
- 우웅..
앞서 들어간 남자는 출입 게이트 너머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의 앞에 놓여진 것은 플라스틱 차단막이 내려와 있는 게이트였다.
지나가려면 출입 카드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런건 없으니 그냥 꼴사납더라도 이걸 타고 넘는 수밖에...
- 툭
어느새 나의 목엔 익숙한 느낌이 드는 사원증이 걸려 있었다.
"오랜만이네..."
사회인이었던 시절 출근을 위해 사용했었던 과거의 나의 사진이 인쇄되어있는 출입 카드였다.
- 삑
목에 걸린 사원증을 뻗어 게이트의 단말기 위에 올리자 짧은 소리와 함께 입구를 막고 있던 플라스틱 차단막이 올라갔다.
먼저 가버린 나의 과거를 뒤쫓아 가려면 이 엘리베이터를 타야겠지.
엘리베이터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문이 계속 열려있었기에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안의 버튼은 많았지만 모든 버튼에는 딱 한 가지 숫자만 쓰여있었다.
'13'
이 세계에 오게 된 뒤로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숫자.
- 위이잉..
다른 선택지도 없던 무수히 많은 버튼들 중 한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며 곧바로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사무실이 나타났다.
무수히 많은 책상과 책상 사이를 가로질러 구역을 나누어준 버티컬 차단막...
사무실은 우중충한 밖과는 다르게 밝은 조명으로 밝게 비추어졌지만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적막함만 감돌뿐이었다.
- 타닥.. 탁..
적막한 사무실 사이 한 곳에서 키보드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구나."
키보드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남자는 여전히 레인코트를 입은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보드를 치고 있는 남자의 옆 까지 다가갔지만, 그는 나를 신경 쓰지도 않은 채 계속 타자만 쳐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일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려주면 되겠지.
- 드르륵
남자의 옆에 있는 빈자리에 있던 의자를 끌고 가져와 남자의 옆에 앉아 같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일은 잘 되고 있어?"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옷을 입었을 때는 내가 가장 바쁘게 일에 쫓기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그럭저럭."
"휴일까지 나올 일도 아니잖아."
분명 바쁘긴 했지만,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나올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집에 있기 싫었으니까... 끝났다."
남자는 작업이 끝난 듯 마지막 타자를 치고 키보드에서 손을 내려놓은 뒤 의자를 돌려 나를 마주보았다.
은색의 다리가 달린 검은 프레임의 안경.
미소 짓고 있지만 입만 웃고 있을 뿐 눈은 전혀 웃지 않는게 안경 너머로 보였다.
바로 앞에 마주한 사람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일부러 초점을 어긋낸 듯 한 눈.
"너는... 눈앞에 있는게 지금의 '나' 라는걸 알고 있는데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구나."
"여자는 껄끄럽거든."
여전히 웃지 않은 눈으로 나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는 입 끝만 조금 올려 웃었다.
"그러는 너야 말로 내 얼굴을 제대로 못보고 있네."
"...피차일반이야."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그를 지적하는 나조차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닮아가는 이 얼굴이 무서운 거겠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남도 아니고 우리끼리 그런 이야기는 하지말자."
내가 두려워하는 존재, 나를 만들어준 아버지의 얼굴이 닮아가는게 무서워져 거울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던 나의 옛 얼굴.
"우리? 너 뿐이겠지."
남자는 우리라는 이야기를 듣자 조금 비웃듯 웃었다.
"...무슨 소리야."
"너는 과거로부터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이런 추레한 모습을 지워버리고 말이지."
도망쳤다고...? 내가?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아무리 나라도 내가 도망쳤다는 이야기에는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좋아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이 세계의 모든 것도."
"어차피 그래봐야 넌 내 꿈이 만들어낸 과거의 허상일 뿐이야..."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나'의 입을 닫게 만들고 싶었다.
"아니. 난 과거가 아니야."
"뭐...?"
그러나 나의 앞에 앉아있는 '나'는 자신이 과거에서 기어 나온 허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나는 네가 이 세계에서 새로운 자신을 연기하기 위해 묻어버렸던."
'나'는 나를 향해 계속 피했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어른을 연기하기 위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버린. 지금도 현재하는 너의 아이 같은 욕망이다."
---
"꿈이 아니라고...?"
나에 대해 알고 있고 저 모습을 취한 것을 보면 저것은 아틀락 나챠나 렝의 거미 같은 드림월드의 주민이 아니다.
"그래. 거미가 자리를 마련해준 덕분에 이렇게 네 앞에 마주설 수 있게 되었지."
저것은 드림월드와 관계없는 나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욕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엘을 다른 곳에 보내버린 것도..."
"성가복을 입은 소녀 말인가? 자신을 찬양해줄 존재... 그 아이를 그렇게 보고 있었군."
"내가 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엘이 성가복을 입고 있던 것도 나를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낸 모습이라고...?
"'나'의 비밀에 대해 누군가 엿듣는 건 '나'의 신도라도 싫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쫒아주었다."
내 앞에 있는 '나'는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항상 남을 위하는 척 하면서 자신의 안위만 몰래 챙기던 나의 웃음...
"..."
나는 '나'의 말에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못했다.
이 모습은 이 세계의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의 과거였으니까.
"...역시 이 모습은 서로 불편함만 주는 것 같군."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나'와 다르게 계속 그 시선을 피하고 있자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슈우우..
그림자가 발아래에서 솟아올라 '나'를 한번 감싸더니 그 모습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림자가 사라진 곳에서 '나'는 과거의 모습이 아닌 지금의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 머리색만큼은 은발이 아닌 어두운 검정색을 띄고 있었다.
"이걸로 불편한건 없겠지. 이제 제대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해보자고."
검은 머리의 소녀는 안경다리를 한번 집어 안경을 다시 올려쓰며 이야기 했다.
내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버릇...
"소녀의 몸이라는 건 역시 좋군. 과거와 다르게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검은 머리의 소녀는 자신의 몸에 맞게 줄어들은 양복을 한번 살펴보며 적당히 딴청을 피우듯 말했다.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서 남을 사랑할 수 없는 녀석이. 사랑받는 외모라니 참 얄굽군."
"...네가 나의 욕망이라는 건 무슨 소리야."
이대로 내버려두면 계속해서 나의 깊은 곳을 파내려가는듯한 말을 듣게 될 것 같아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말 그대로다. 나는 네가 어른행세를 하기 위해 묻어둔 솔직한 감정이다."
"솔직한 감정...?"
"모르는 척 하긴. 그 소년을 챙기는 일 부터가 선의로 하는 일이 아니지 않나?"
검은 머리의 소녀는 주인공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원래 시나리오를 유지하기 위해 주인공군을 도와주는 것뿐이야."
"거짓말."
소녀는 나의 말을 부정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지 마... 내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노력?"
소녀는 나의 말을 끊었다.
"너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린 소년을 앞에 내세웠을 뿐이다. 그래, 제단 위에 바치는 번제물처럼 말이야."
소녀는 주인공군을 제물로 여겼다.
"마음만 먹는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잖아? 타브하도. 교단의 최종목적도."
"..."
"이 깊은 꿈 밑에 잠들어있는 것을 끌어올려주는 것도 혼자 이룰 수 있을 텐데. 너는 그저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소녀는 나의 방관을 지적했다.
"넌 직접 무대 위에 올라서고 싶지 않아서 다른 배우를 올렸을 뿐이다. 그게 그 소년이지."
"내가... 주인공군을 대신 올렸다고?"
어디까지나... 시나리오를 지키기 위해... 이야기의 주인공을 올렸을 뿐인데...?
"개발자군이 만든 이야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그랬을..."
"얼굴도 모르는 이의 핑계는 듣고 싶지 않다. 누군가 너에게 기대하는 게 무서울 뿐이잖아?"
무릎 위에 얹힌 나의 손이 작게 떨렸다.
"너는 다른 누군가가 대신 그 기대를 짊어지길 바랬을 뿐이다. 그 사실을 여러 핑계를 대며 묻어두고 있었을 뿐이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녀의 지적에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네가 너를 대신해서 제단 위에올린 번제물에게 가진 감정을 모를 것 같은가? 다름 아닌 욕망인 내가."
"주인공군을... 그렇게 이야기 하지 마!"
계속해서 주인공군을 제물로 취급하는 소리에 저항하듯 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비어있는 사무실에서 그 소리는 넓게 울려퍼졌지만 둘만 있는 공간에서 듣는 이는 없었다.
"너는 태워질 번제물인 소년에게... 음?"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던 검은 머리의 소녀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
"... 신의 대화를 엿듣다니. 그 죄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모습을 드러내라 부정한 거미여."
- 차라라락!
검은 머리의 소녀가 손을 뻗자 손 너머에 있는 버티컬들이 모두 사라졌다.
사라진 버티컬 차단막 사이에서 나타난 것은 녹색의 메이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내린 녹색 머리의 소녀.
녹색의 머리 위에는 붉은 루비가 여덟 개 달린 은색의 티아라가 단정하게 얹혀있었다.
교단의 간부.
드림랜드를 관리하는 이.
아틀락 나챠다.
---
"죄송합니다. 성자님의 꿈을 엿볼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틀락 나챠는 긴 메이드복의 끝자락을 잡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어디까지 들었지?"
검은 머리의 소녀는 표정을 지운 채 아틀락 나챠를 추긍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구나. 부정한 짐승아."
- 슈아악..!
검은 머리의 소녀가 손을 뻗자 아틀락 나챠는 발밑에서 솟아오른 그림자에 묶여 공중에 목이 매달렸다.
"끄흑..! 끅.. 정말로... 아무것도... 저는 단지... 드림랜드의 이상을... 확인하려..."
목이 매달린 아틀락 나챠는 자신의 목을 조이는 그림자를 붙잡은 채 발버둥 칠뿐이었다.
"교만한 짐승아. 신성한 대화를 엿들은 죄는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검은 머리의 소녀가 손을 비틀자 그림자는 아틀락 나챠의 손과 발을 묶었다.
"너의 팔과 다리를 잘라 내주마. 평생 배로만 기어 다니도록 해주겠다."
- 까드득.. 까득..
"까흑..! 끅..!"
아틀락 나챠를 속박한 그림자중 일부가 변해 날카로운 톱날처럼 변하여 팔과 다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만해! 아파하고 있잖아!"
나는 그 행동을 막기 위해 검은 머리 소녀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나에게는 거미가 줄에 매달려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만둬!"
나는 그저 조금이라도 행동을 멈추기 위해 검은 머리 소녀의 코트를 잡고 흔드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뭐 네가 그렇다면... 알겠다."
- 쿵!
아틀락 나챠를 붙잡고 있던 그림자는 형태를 거둔 채 붙잡혀 있던 녹색의 거미를 책상 위로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나챠군!"
책상위로 집어던져진 아틀락 나챠를 지키기 위해 곧바로 뛰어가 그녀의 몸을 살펴보았다. 목에 검붉은 멍이 들어있지만 다행히 숨은 제대로 쉴 수 있는 것 같았다.
"히끅...흑.."
아틀락 나챠는 겁에 질린 듯 덜덜 떨며 자신의 목을 붙잡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자비를 보여줬다면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라. 부정한 거미야."
"히익...!"
아틀락 나챠의 주변에 남아있는 그림자가 언제라도 다시 그녀를 묶을 수 있다는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뭐가 좋을까... 그래. 그 같잖은 몸을 가리는 옷을 전부 내려놓은 채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머리를 바닥에 찍어 조아려라. "
"뭐...?"
나는 검은 머리 소녀의 입에서 나온 발언을 듣고 경악했다.
"살기 위한 소녀의 진심어린 목숨구걸... 네가 가장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검은 머리의 소녀는 일부러 나를 한번 흘긋 본 뒤 눈꼬리를 조금 올려 웃었다.
"그게 무슨소리야! 아이를 그렇게 희롱하다니...!"
아틀락 나챠에게 일렁이며 다가오는 그림자를 막아서자 그림자는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번엔 그 소녀도 지키겠다는 건가? 고작 번제물을 위한 제물에게 정을 주다니."
내가 앞에 막아서자 그림자는 다시 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성자님... 저 자는 대체 누구인가요...? 어째서 드림랜드에서 저런 힘을.. 쓸 수 있는 거죠...?"
나의 뒤에 매달린 아틀락 나챠는 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몸을 떨고 있었다.
"이 조그마한 세계를 다룰 수 있다고 우쭐해하고 있구나 거미야.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는 네가 가진 꿈 보다도 크거늘."
그림자를 거두었지만 언제라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것처럼 검은 머리의 소녀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여유롭게 이야기를 이었다.
"저 녀석은..."
그러나 나는 아틀락 나챠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저것이 나의 또 다른 일면. 감추었던 욕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자기 자식들에게도 끝내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구나."
욕망에 대해 말할 수 없던 나를 보고 검은 머리의 소녀는 실망에 찬 듯 한숨을 쉬었다.
"위선에 가득 찬 정의로운척 하는 녀석 대신 나의 입으로 직접 말해주겠다."
소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는 알레프이자 타브다."
시작과 끝...
"결여되지 않은 완전한 감정. 나의 이름은 곧 '에메트'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스스로를 에메트... 진리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