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드림랜드
"나는 너를 원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이야?"
묘월이의 사념체. 아니 묘월이가 감춰두었던 모습인 검은 묘월이는 나를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애정이 아닐 것 같았다.
검은 묘월이의 두꺼운 안경 프레임 너머로 빛이 없이 초점을 흐린 듯한 탁한 붉은 눈이 보였다. 적어도 내가 아는 애정을 가진 사람은 저런 눈을 하지 않는다.
"엘. 잠시만 자리를 띄워주거라."
"마스터라도 지금의 마스터는 위험해보여요."
엘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려는 듯 조금 경계하는 듯 했다.
"단지 이야기를 할 뿐이다. 내가 이 소년을 해칠 것 같더냐?"
"마스터라면... 알겠어요."
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나와 묘월이의 곁을 조금 물러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그림자 뒤로 숨기 원한 '나' 대신 나서줄 너를 원한다는 이야기다."
엘이 멀어진 것을 확인한 검은 묘월이는 흐린 눈을 한 채 아래에서부터 나를 올려보았다.
"대신 나서달라고...?"
묘월이는 결국 애정이 아닌 부탁의 의미로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림자는 언제까지나 본체의 그늘 아래에 드리워지는 법이지."
검은 묘월이는 자기의 손을 들어 올려 하늘위에 떠있는 어둑한 광원을 향해 뻗어 올리자 옅은 그림자가 작은 테이블 위로 드리워졌다.
"그림자인 내가 잠든 겉면의 '나'대신 활동하기 위해선 드림랜드의 사람이 아닌 자와의 계약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를 원한다고... 하지만 잠든 묘월이는 깨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야?"
"잠든 인격은 계속 잠들 뿐이다. 하지만 나 역시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나'다. '나' 라는 실체는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지."
검은 묘월이가 나를 원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나가기 위해서...
"내가 아는 묘월이는 그러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
"주혁아."
묘월이는 안경을 벗어 원피스의 가슴 깨에 걸쳐두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계속 네가 알고있는 '나'야."
묘월이는 언제나 내가 알고 있던 묘월이의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다.
"단지 잠들어있는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나'야."
하지만 묘월이의 눈은 여전히 웃고 있지 않았다.
"나의 목적은 이 세상의 구제. 너의 목적인 구원과 같아."
"구제... 세상을?"
"내가 모두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어. 너는 단지 그 길에 올라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비어있지만 나를 피하지 않는 눈은 나에게 구제와 구원을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나설 수 없어. 나는 언제까지나 누군가의 그림자로 남기를 원해."
"그래서 나를 원한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나와 계약을 맺어주지 않을래?"
"...그건 할 수 없어."
나는 묘월이가 주는 길에 올라서기를 거절했다.
"겉면의 모습을 빌려도 너는 나를 따르려 하지 않는구나."
묘월이의 입가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 구우우...
검은 아르베넷에게서 작게 울부짖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사도이자 현존하는 유일한 신성인 나를 섬겨라."
묘월이는 다시 한 번 나를 원하고 있다.
---
"나의 대행자가 되어라. 나의 대행자가 되어 나를 섬기면 너에게 모든 걸 주겠다."
"섬기다니 무슨..."
나의 앞에 선 검은 묘월이는 여전히 나보다 작았지만 지금은 나보다 더 크게만, 닿을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너에게 힘을 주마. 나를 섬기면 금단의 영역인 적합률 80을 넘기게 해주마."
"...80을 넘는다고? 어떻게?"
적합률을 처음 측정하던 날 묘월이가 해주었던 말. '적합률 80을 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검은 묘월이는 그 영역을 뛰어넘게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교단의 간부들처럼.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주마. 너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최강의 파일럿이 될 수 있다. 나와 나란히 설 수 있는 힘을 주마."
"너와 같은 힘..."
검은 묘월이는 나에게 타브하 최강의 파일럿인 그녀와 같은 힘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래. 힘이 부족해 구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구원할 힘을 얻게 된다. ...십년 전 처럼 더 이상 잃지 않아도 된다."
- 사르륵...
나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모여 검붉은 잔의 모양으로 변하며 그 잔 안에는 붉은 피와도 같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잔을 들어 사도의 성혈을 받아라. 너를 구원자가 되게 해주겠다."
"안 돼."
"뭐...?"
나는 이 잔을 받을 수 없다.
"...힘은 스스로 얻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누군가에게서 거저 받는 힘은 나의 힘이 될 수 없다.
내가 인형사를 상대로 1호기만을 믿고 자만했던 것처럼. 단지 주어지는 힘은 나의 것이 아니다.
"힘은 필요하지 않다는 건가... 그렇다면 두 번째 제안을 하마."
- 구우우...! 쾅!
검은 아르베넷은 주먹으로 땅을 내려찍어 나와 묘월이가 서있던 땅을 반으로 쪼개어 갈랐다.
- 으적!... 쩌적..!
갈라진 땅 밑으로 푸른빛이 보였다.
"저건... 도시?"
땅 밑 깊은 곳 아래에서 푸르게 빛나 보이던 것은 도시였다.
"나를 섬겨라. 저 작은 도시를 시작으로 모든 세상을 너에게 넘겨주마. 네가 모두를 다스릴 수 있게 해주마."
은은하고 푸르게 빛나는 도시는 잠들어있는 것처럼 고요해보였다.
"무능한 지도자가 사람을 얼마나 괴롭게 만드는지 십년 전에 충분히 겪어보지 않았느냐."
십년 전 게이트가 열렸을 때,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었을 때 지도자들은 자신의 몸만 보전하기 바빴다.
만약 그 때 누군가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어머니는...
"강력한 통제는 질서와 구원으로 이어진다. 모두의 의사를 통솔하는 자리에 도달하게 해주마."
"통제가 구원..."
- 쌔애액...!
나의 앞에서 그림자가 갈라지며 그 안에서 푸르게 빛나는 도시와 다르게 붉게 타들어가는 것이 솟아나왔다.
"그걸 위한 성찬을 주마. 인간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가 아닌 진짜 성체를 너에게 내려주마."
"성체...?"
아틀락 나챠가 이따금씩 말했던 성체...
"교단의 아이들이 가진 것과 같은 차원기말이다."
"인형사나 아틀락 나챠와 같은..."
일반적인 세계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미지의 것과 같았던 기체들...
"그래. 넌 이 코어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수정 두 쪽을 잘라 이어붙인 것과 같이 생긴 것은 나의 앞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성배와 성찬. 너는 이 세계의 인간 중 최초로 성찬식을 눈앞에 두고 있는거다."
나의 앞에는 검붉은 잔과 붉은 코어가 놓여있었다.
"...통제는 구원으로 이어질 수 없어. 그건 지배일 뿐이야."
나는 코어를 받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저걸 받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게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힘도... 지배도... 필요 없다는 거냐."
두 번이나 주어진 제안을 거절하자 묘월이는 작게 몸을 떨었다.
"저 교단조차도 여럿이 나누어 받은 성찬식을!"
- 찰팍!
묘월이가 손으로 잔을 쳐 날려 버리자 그 안에 든 검붉은 것이 그림자 속으로 떨어져 사라졌다.
"오직 너만을 위해 준비해주겠다는데! 그걸 거절하겠단 거냐!"
- 챙!
붉은 코어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져가듯 서서히 그림자의 속으로 사라졌다.
- 꽈악!
"너는 그냥 내가 내려주는 것을 받고 나를 대신해 나서주기만 하면 된다!"
"으윽..."
검은 그림자는 나의 멱살을 잡아 공중으로 나를 띄워 올렸다.
"받을...수 없어..."
- 쿵!
나의 몸이 아까까지 우리가 앉고 있던 소파 위로 내던져졌다.
"마지막 제안을 하도록 하마. 신성도 지배도 필요 없다면. 시작과 끝 그 자체인 나를 주겠다."
"뭐...?"
두 가지 제안을 거절한 나에게 묘월이는 자신을 주겠다고 말했다.
"네가 이 몸에 연심을 품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
나는 침묵했다.
"네가 나의 대행자가 되어준다면 이 몸을 하사해주마."
소파에 던져진 나의 몸 위로 검은 묘월이가 올라탔다.
"...무슨 뜻이야?"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할 신성인 내가. 그저 여자로써 너에게 안기겠다는 뜻이다."
나의 위에 올라탄 묘월이는 고혹스럽게 웃었다. 빛을 잃은 붉은 눈이 그 웃음을 단순히 소녀가 아닌 여자로써 돋보이게 만들었다.
"너는 그저 내가 주는 것만을 받아들이면 된다. 나의 몸마저도 말이지."
묘월이의 서늘한 팔이 나의 가슴 위를 서서히 쓸어갔다...
- 탁!
"...그래선 더욱 안 돼."
그 작은 손목을 붙잡아 쥐어 더 아래로 내려오려는 손을 멈추었다.
"어째서 거절하는 것이냐... 나에게 사랑받고 싶지 않은 것이냐? 계속 그런 시선을 보내놓고서!"
움켜쥔 손목 위로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너는... 목적을 위해 마음 없이 몸을 주려고 하고있어."
내던져졌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몸 위에 올라탔던 묘월이를 내려주었다.
"나는 너에게 단순히 주어짐을 받는 입장에 서고 싶지 않아."
내려진 묘월이의 눈을 응시한 채 세 번째 제안을 거절했다.
"...소녀가 스스로의 연심을 고백했는데도 무정하게 내버리는 것이냐?"
묘월이는 나를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그건 연심이 아니야. ...네 고백은 비어있어."
나는 묘월이의 고백을 받아줄 수 없었다.
잠시 후 나에게 거절당한 묘월이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
"...하하하하하!"
- 쉬이익..! 파악!
고개를 떨어뜨렸던 묘월이가 점점 크게 웃자 그 발밑에 모인 그림자가 어지럽게 땅을 때려대었다.
"나는 결국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조차 없구나."
"묘월아..."
"그렇기에 나를 대신해 줄 대행자가 필요했던 것인데..."
- 구우우...
멀리서 검은 아르베넷이 슬픈 듯 낮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결국 무대 위로 끌어올려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구나..."
- 쩌적.. 쩍... 쌔애액..!
하늘이 찢기며 십자로 갈라진 붉은 게이트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 모작의 소년! 준비가 끝났습니다! >
- 슈우우...!
게이트가 열리는 것과 동시에 저 멀이에서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아틀락 나챠의 성체가 이 쪽을 향해 낮게 날아오고 있었다.
"묘월아 나는..."
"됐다. 더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
묘월이는 몸을 돌려 나를 등졌다.
"마스터!"
여태 나와 묘월이를 위해 떨어져있었던 엘이 하늘의 이상을 느끼자 묘월이에게 달려갔다.
"...마스터. 울고 있는거에요?"
"누가 울고 있다는 거냐... 나는 홀로 온전한 신성이다."
- 그오오...
검은 아르베넷이 천천히 걸어와 묘월이만을 자신의 어깨 위로 올려 태웠다.
"마스터..."
검은 아르베넷은 숙였던 몸을 올려 그 아래에 남은 나와 엘 만을 내려 보았다.
"가자 아르베넷... 실연당한 소녀의 아픔이 가라앉을 때 까지 싸우도록 하자."
- 그오오오오오...!
검은 아르베넷만이 무너져가는 세계 속에서 그 주인을 대신하는 것처럼 슬프게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