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1화 〉케필 · 레브 (111/152)



〈 111화 〉케필 · 레브

아틀락 나챠와의 전투, 그리고 드림랜드 사건이 해결된  타브하로 돌아가는 트레일러에 올라탔다.

시나리오에서 예정되었던 날 보다 일찍 처리한 덕분에 시간여유가 생겼다는 건 좋았지만... 주인공군이 벌써부터 각성하게  줄은 생각도 못했다.



둘이서만 타기엔 조금 넓은 운송용 트레일러의 좌석이지만 왠지 얼굴을 마주보기가 좀 그래서 창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대체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눈이 나처럼 붉어진 것일까. 원래대로라면 주인공군의 각성은 원래대로라면 가을 이후부터인데...

변화한 시나리오 속에서 전력이 늘어나는 건 좋긴했다. 답답할 일도 미리 예방할 수 있을 거고.



... 하지만 그 매개가 내가 되었다는 게 좀 신경이 쓰인다.


문득 십년도 더 전쯤 대학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혹시  선배가 날 좋아하는  아닐까?' 라는 생각은 본인의 착각이고. '저 새끼 혹시 날 좋아하나?' 는 들어맞는다고.


주인공군은 그렇게 취급될만한 아이는 아니긴 하지만...  다른 히로인들을 내버려두고 나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각성도 중요했지만 아론 하브릿을 이 시점에 열었다는 것도 엄청 신경 쓰인다.

적합률 언더 40은 괜히 언더 40이 아니다. 40 둘이 모여서 동시에 코어를 조종하더라도 50을 넘을 수 없는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70을 넘길 수는 없다.


아직 1호기는 하브릿 시스템을 견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데 무리하게 발동시킨 덕분에 기체의 손상도 심각했다.

전투로 파괴된 부분은 외장 장갑뿐이지만 하브릿 시스템은 기체의 내부부터 착실하게 파괴해버렸다.


팔과 다리는 근육이 안에서 터져나간 것처럼 프레임이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속부터 녹아내리듯 터져버렸고 코어와 헤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파트가 속부터 터져버렸다.

사령관은 하브릿 시스템을 알고있을테니 어느 정도 참작을 해주실 수 있겠지만... 현장 담당자인 개발부장님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큰 이벤트 두개를 동시에 겪다보니 창  풍경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골치가 아파져서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른 채 창문에 기대고 있자 창문 너머로 주인공군의 얼굴이 조금 비쳤다.




...아까 아르베넷에서 내리고 눈을 본 뒤로 나도 눈을 안 마주치고 있어서 그런건지 주인공군은 자기가 또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괜히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이상한 오해를 부를 것 같으니 이야기는 해야겠다.



"...각성 축하해."


잠깐 얼굴을 돌아보았으나 나와 같아진 붉은 눈이 신경 쓰여서 제대로 마주보고 말하진 못했지만. 이걸로 확실히 축하는 해준 거다.



"고마워!"


방금 전 까지는 무슨 주인에게 혼이 난 개처럼 풀이죽어있더니 짧게나마 축하를 해주자 금방 기운을 차린  웃었다.

그래... 지금 웃을 수 있을  웃어두렴.


이제 격납고로 돌아가면... 같이 격납고의 에폭시 바닥에 이마를 찧으면서 정비반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할지도 몰라...

특히 개발부장님 너희 아버지께....




---

격납고로 돌아가기 전 파일럿 슈트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떨리는 마음으로 주인공군과 함께 1호기의 격납고에 도착했다.



'술렁... 술렁...'

격납고의 입구에 도착했을 뿐인데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술렁임이 심상치 않았다.

우리보다 먼저 1호기가 도착했기 때문에 정비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정비복을 입은 정비원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허망함과 허무만이 가득해보였다.

그런 정비원들 앞에는 머리와 몸통만 남은 1호기가 잔해들과 함께 바닥에 널려있었다.


... 다리도 남아있지 않아서 평소처럼 정비행거에 걸어둘 수도 없었다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뭐...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저 멀리서 머리가 하얗게 센 개발부장님이 성큼성큼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 탁

개발부장님은 나와 주인공군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1호기의 잔해 앞에 멈추어 서시자 다른 정비원들의 술렁임이 가라앉아 고요해졌다.

"으..."


한참이나 팔다리가 사라진 1호기를 보고 계시던 개발부장님은 한참이나 닫고 계시던 입을 열었다.


"으...으하하 하하!!! 망...망했다!!!"

웃음소리가 너무나 컸기에 근처에 서있던 나조차도 깜짝 놀라서 몸이 펄쩍 뛰어오를뻔 했다.


항상 쿨시크한 중년 같은 모습을 보이시더니... 망하면 정말 망했다고 외치시는구나...



'으.. 히히힉!! 히히히힉!!'

'테에에에...!!'

개발부장님이 광소하시자 다른 정비원들도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그 앞에서 웃기 시작했다.

출격 두 시간 만에 최신예기가 완파가 되어 돌아왔으니... 다들 미쳐버리는 것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모두 미쳐버린다...

"죄..죄소..."


광소의 현장에서 개발부장님에게 뭐라 사과라도 드리려고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식은땀이 빗줄기처럼 흐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 지금 핥아본다면 내 사과가 거짓말을 하는 맛은 아니라는 건 알게 될것만 같았다...

정비원들에게  잘못이라고 당당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인공군이 혼자 격납고에 오면 얼 타다가 크게 혼날까봐 같이 와준 건데... 정작 도우러  준 내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한테 맡겨."

- 툭


"어..? 어.."


광소의 현장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주인공군이 나의 어깨를 한번  두들긴 뒤 정비원들이 모인  가운데로 걸어갔다.


지금만큼은 저 용기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어쩔셈인거지...



'저... 저기에! 1호기의 파일럿이 왔습니다!'


주인공군이 정비원들을 지나 1호기의 앞에 서자 정비원들의 술렁임이 더 커졌다.



"아...아들아 이게 대체 어떻게  거냐... 1호기가 왜... 너가 그런건 아니지...? 눈은 또 왜 빨개서..."

한참을 웃던 개발부장님은 주인공군의 앞에 비틀거리며 다가오셔서 거의 넋이 나간 채 횡설수설하듯 이야기를 하셨다.




"싸우다 부쉈습니다! 눈은 모르겠어요!"


주인공군은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무..뭐... 네가 부쉈어...?"


자기 아들이 벌인 일은 아니라고 믿고 싶으셨던 건지 당당한 외침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조금씩 저으시며 머리가 떨리시는 게 보였다...



"교단이 너무 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공군은 허리를  꺾어 숙이면서 크게 사과를 외쳤다. 정말 사과해야 하는건 나인데...


"어... 어흐억... 헉... 내 역작이..."

다시 한 번 당당하게 선언한 주인공군의 외침을 들은 개발부장님은 자기 아들의 옷소매를 잡더니 거의 혼절할 것 같으셨다...

"그래도... 머리는 아직 남았으니..."

개발부장님이 그나마 남은 1호기의 머리와 몸통을 보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려는  하셨다...




- 뚜둑... 쿵!


하지만 그 순간 희망은 무참하게 짓밟혀버렸다... 큰 소리와 함께 1호기의 몸통에서 머리가 분리되어... 1호기는 토르소가 되어버렸다.




"허흐윽..."


1호기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을 본 개발부장님은 서서히 몸의 균형을 잃기 시작하셨다...



'부장니이이임!!!'

개발부장님이 그대로 쓰러져 버리려던 찰나 정비원들이 달려들어서 겨우 붙잡아 주었다...

미...미안해요 개발부장님... 원래 이런 일은 적어도 지금은 없어야하는데...

모두의 시선이 주인공군에게서 목이 떨어져버린 1호기로 모인 틈을  주인공군은 정비원들의 사이를 빠져 나왔다.

"가자 묘월아."


간결하고 임팩트있게 개발부장님을 혼절시킨 아들... 1호기의 푸른 불꽃같이 타오르는 효자다 정말...



"으...응 가자..."


주인공군이 대범하게 나서준 덕분에 내가 모두의 앞에서 에폭시 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해명할 일은 없어졌다.

지배권을 빼앗긴 아르베넷과 전투를 한 사실을 숨겨 줄 줄이야...




이렇게 의지가 될 줄은 몰랐다. 먼저 격납고를 나서는 주인공군의 등짝이 듬직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




격납고를 빠져나온 뒤 긴 복도를 함께 걸었다.

드림랜드 속에서 부서진 1호기는 어쩔 수 없지만... 문득 까망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깨어나면 네가 원하던 것을 얻을 것이다. ...네가 조심스러워하는 그 소년조차 말이야.'


내가 원하던 게 뭐길래 대신 성취해주겠다는 건지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리고 주인공군을 얻게 해준다는 표현도 걸렸다...

그 표현만 듣는다면 마치 내가 주인공군에게 보호자로서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사모하는 듯 한 느낌을 주는데...

내가 주인공군을 그런 눈으로 볼리가... 그냥 조금 잘 생기고 솔직한 애일뿐인데...


문득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혼란스러워져서 고개를 크게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원래 아저씨였고... 주인공군의 나이가 몇인데... 내 나이를 반으로 쪼개면 얼추 비슷한 나이인데... 걔 나이에  나이를 더해서 절반으로 나눠도 전역하고 대학 졸업을 준비할 정도의 나이다. 그것보다 더 어린 애한테... 그것도 남자애한테 설랠리가 없지 않나...

혼자서 생각하다보니 얼굴이 후끈하고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있게 될 리가...

"묘월아."



- 폴짝!


"응?!"


혼자 상념에 잠겨있을 때 멈춰서 나를 부르길래 너무 놀라서 살짝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버렸다.


"아니...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멈춰 서있길래. 어디 아픈거 아니지?"

"아... 아니야. 그냥 1호기가 신경이 쓰여서..."

"역시... 그렇지?"

개발부장님과 정비원들 앞에선 당당하게 말했지만  둘이 남아보니 평소와 같이 조금 곤란해 하는 십대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부서진 건 어쩔 수 없어...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부서진 원인이 나에게 있으니 그 해결도 내가 할 수 밖에 없다. 정비 실력은 없지만 정비를 도와줄 사람은 알고 있으니까...


"...무리하지 마."


"어?"

"혼자서 너무 무리하려고 하지 마. 방법을 찾을거라면 같이 찾아보자."


"그래..."

왠지 모르게 드림랜드에서 빠져나온 뒤로 계속 이렇게 나를 신경써주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공군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을 겪었길래... 까망이가 대체 뭘 저질렀길래... 하지만 그 덕분에 조금은 철이  것 같았다.



"응? 그 안경은 뭐야? 눈 나빠졌어?"

성숙해진 주인공군에게 감탄하는 사이 셔츠 위에 꽂힌 검은 안경이 신경 쓰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뭘...?"

주인공군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았다. 안경이 뭐가 어때서... 원래 쓰고 다니진 않았을 텐데?



"학생이 쓰기엔 조금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한번 써봐."


잘 모르겠지만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겠지? 의외로 어울릴지도 모르고.


"한번 써볼까."

정작 안경을 가지고 다니는 본인은 뭔가 탐탁치 않아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유는 모르겠다.



- 슥

주인공군은 셔츠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서 귀 위에 어설프게 걸쳤다.


... 안경을 써보지 않은 애구나. 어설픈 착용방법이 정말 안경을 써본 적 없다는  티가 났다.



"고개좀 숙여봐."


제대로 씌워주기 위해 손을 까닥까닥 내리자  다른 말없이 알아서 허리를 낮춰주었다.


양 손으로 은색의 안경다리를 잡고 코 위에 잘 얹어주자 깔끔하게 착용이 되었다.


"...어때?"


안경을  주인공군은 허리를 다시 올려 똑바로  채 나를 내려 보았다.

"..."


그 모습을 보고 잠깐  말을 잃었다... 안경을 쓰니 십대  같던 이미지가 사라져서 조금 성숙하게 보였다.


정말 잘 생기긴 했구나... 괜히 히로인을 꿰고 다니는 주인공이 아니네.

"...묘월아?"

아무 말 없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조금 불안한 듯 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멋있다."


솔직하게 칭찬해주었다. 학생이 끼기엔 너무 어른 티 나는 안경이 아닌가 했지만 주인공군이 끼니  어울렸다.

"다행이다..."

내가 별로라고 할까봐 걱정이라도 했던 건지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어? 잠깐만... 너 눈 색이 원래대로..."


"뭐? 진짜?"


주인공군의 눈이 나처럼 붉은 색이 아닌 원래의 짙은 갈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이네..."


주인공군은 복도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원래대로 돌아온 눈의 색을 보고 감탄했다.


- 슥

"앗 다시 빨개졌다."


주인공군이 거울 앞에 서서 안경을 벗자 다시 눈이 붉게 변했다.



- 슥

다시 쓰니 원래의 짙은 갈색으로 돌아왔다.

"신기하네... 뭔가 특별한 안경인가? 어디서 난거야?"

안경 렌즈에 비추어지는 눈뿐만 아니라 프레임 안쪽으로도  색이 변하는 것을 보면 컬러렌즈 같은건 아닐 텐데...




"네가 준거야."


"...내가?"

"정확히는 네 안의 사념이 준거야."

까망이가 주인공군에게 안경을 줬다고...? 왜? 쓰러뜨린 증표 같은 건가?

"그렇구나... 좋아 보이는 안경이니까 꼭 쓰고다녀."


까망이가 준거라면 해를 끼칠  같진 않고 뭔가 도움이 되는 물건이니까 준거겠지... 내 욕망이라고 해도 주인공군을 해칠  같진 않았다.


"왜?"

"비...비밀이야! 쓰...쓰고다니라면 쓰고 다녀 그냥!"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 이유를 묻길래 나도 모르게 조금 소리쳤다.

"알았어. 쓰고 다닐게."

평소처럼 비밀이라고 얼버무리자 주인공군은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까망이가 준 선물이라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둘이 같은 눈 색을 하고 돌아다니면... 오해를 살  같아서 조금 부끄러우니까.


...이건 주인공군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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