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케필 · 레브
"뭐야 이게..."
조명 아래에 은은하게 빛나는 금색의 사자를 보자 숨이 턱 막혔다.
아니... 뭘 어떻게 만들어야 저 훌륭한 프레임이 네 발로 걷는 짐승의 모습이 되어있는거지?
정말로 이게 그 쉐모트 프레임을 쓴 거라고? 다음세대에 근접한 완벽한 프레임을 만든 주제에... 네발짐승을 만들어?
"사자..."
"어째서...?"
할 말을 잃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케필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감성을 가진 안경소녀만큼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금색의 사자 앞에 팔짱을 낀 채 당당하게 섰다.
케필... 번역하면 사자. 그래 말 그대로 프로젝트 이름부터 사자가 들어가 있긴 하구나...
하지만 저 사자는 이 세계에서 차원기의 기본 설계방침을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차원기의 기본설계 원칙은 코어와 파일럿간의 적합성이다.
'두 발로 걷는 사람이 두 발로 걷고, 두 손을 사용하는 차원기를 움직인다.'
가장 심플하지만 그 만큼 핵심적인 원칙이다.
코어에 대해선 아직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블랙박스지만, 두 발로 인간처럼 걷는 장비를 다룰 때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네 발로 움직이는 차원기라니. 이래선 두 발로 걷는 인간은 기본적인 기동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너. 이게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니?"
연구소 짬밥은 좀 먹었을 안경소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기합입니다!"
"...뭐?"
"기합으로 움직일 수 있어요!"
- 퍼억!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연구소에서 비과학적인 근성론을 이야기 하길래 나도 모르게 안경소녀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푹 질러 버렸다.
"허윽..."
안경소녀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엎드린 김에 이야기 해보렴. 우리 발이 몇 개 달렸지?"
"두...두개...요..."
"저 사자의 발은 몇 개?"
"네 개..."
따로 힘 조절을하고 때린 게 아니라 그런건지 안경소녀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겨우 일어나서 이야기를 계속 했다.
"어떻게 조종하라는 거야..."
"조종계통엔 문제없어요... 코어에 두 발로 걷는걸 각인시켜주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코어를 두개 넣었어요..."
"...제정신이니?"
한 개의 코어를 운용하기도 힘들 텐데 두개? 두우우우개???
이론상 코어 하나에 다리를 두개씩 배당하면 운용 가능하긴 하겠지만... 그건 네 발로 달리는 동물이라기보다 사람 두 명이 서로 몸을 감싸안은 채 엉거주춤 달리는 꼴이나 다름없다.
"...테스트 운용은 해봤어?"
"시...시험 가동을 하긴 해봤는데... 파일럿이 견디지 못해서 기절해버렸어요..."
"하아..."
용케도 저런 장난감을 테스트 파일럿을 불러서 태우기도 했구나.
테스트 파일럿이 기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범용적 운용에 맞추기 위해 대부분 적합률이 아슬아슬한 사람들을 위주로 뽑는데... 그런 사람이 코어를 두개씩 다룰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박사가 이런 장난감이나 만들고 있었다니... 휘하 직원들이 진저리가 나서 떠나갈 만 했다.
"여기에 들어간 제작비용은 얼마니?"
"코어 두개간 싱크를 맞추느라... 중형 코어 열개와... 아까 보신 프레임을 다섯 개 만들 정도..."
"..."
들어간 비용이 너무 황당해서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개인 연구소인 만큼 운용비용은 항상 부족할 텐데 이런걸 만들어대면... 투자자도 손을 땔만 했다.
"쉐모트 프레임을 써서 만든건... 이거 하나야?"
아직 우리가 못 봐서 그런거지, 조금 제대로 된 기체가 있지 않을까?
사자의 양 옆에 닫힌 격벽을 보니 이 안엔 제대로 된 기체가 있을 거란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무...물론 이거 한대가 아니죠..."
안경소녀는 나의 눈치를 엄청 보면서 다른 제어패널에 손을 올렸다.
그래 한 대 정도야 기행으로 넘길 수 있지.
나도 예전에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다른 이상한 걸 만들어서 넘겨준 적도 있었으니. 기행 하나 정도야 실수로 넘겨줄 만 했다.
- 삑... 덜컹
제어패널의 잠금이 풀리자 격벽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여...여기 있습니다아..."
격벽이 열리고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붉은 색의 거대한 독수리였다.
---
격벽 안에 있던 것은 거대한 강철의 날개를 가진 붉은색의 기계로 만들어진 독수리였다.
사자가 끝났더니... 이번엔 독수리?
"보세요! 최초로 비행이 가능한 차원기입니다! 이번건 테스트 비행도 끝났어요!"
"와아..."
세기의 발명품이 공개되는 순간이었지만 우리들은 영혼 없는 감탄사만 내주었다.
"빨간색! 멋있어!!!"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미하일만 감탄을 외쳤다.
메뚜기까지 있으면 콤보 하나 완성이네... 앞에서 본건 호랑이가 아니라 사자였지만.
"...죄송합니다."
안경소녀는 나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먼저 사과했다.
이번엔 먼저 잘못을 인정했으니 따로 때리진 않았다.
"...비행원리는?"
"단거리 활강을 반복해서... 인간이라도 조금은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무기는 들 수 있니?"
독수리의 모습을 한 만큼 사람의 팔은 달리지 않았고, 날카로운 두 발만 아래에 달렸는데 과연 라이플 하나라도 들 수 있을까.
"...무기를 장비하면 무게 때문에 비행이 안되는 문제가 있어요."
"멋있게 생긴 쓰레기네!"
"쓰...쓰레기..."
미하일의 순수한 평가가 안경소녀의 가슴을 후벼 파내었다.
산 넘어 산이다.
무기를 들 수 없는 병기라니... 비행이라는 기술만큼은 칭찬할 만 했지만, 그 발상이 실용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말 그대로 쓰레기나 다름없다.
"...예산은 얼마나 썼니?"
"케필이랑 비슷하게 썼습니다..."
연구원들이 그만두는 이유를 점점 알 수 있었다.
"용케 부도는 안냈네."
"개발비용을 매꾸느라 이것저것 부업을 뛰긴 했어요..."
"부업?"
"다른 연구소의 연구 과제를 돕는다던지..."
"입구에 있던 프레임을 이야기하는 거야?"
입구에 있던 쉐모트 프레임을 제외하더라도 특이한 프레임이나 차원기와 관련없어보이는 장비들이 제법 있었는데, 그것들이 아마 부업의 일부였으리라.
"네... 별로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과학엔 언제나 돈이 필요한 법이에요."
안경소녀는 조금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안경을 벗어서 가운 소매로 안경알을 닦아내었다.
"기묘하게 생긴 프레임이 하나 있던데..."
들어오는 길에 천막에 덮인 특이한 프레임을 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주인공군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었다.
"눈썰미가 좋군요 소년. 그건 놋 베이스의 발주품이에요."
안경소녀는 나의 눈치를 보던 것과 다르게 주인공군에겐 당당하게 말했다.
"...놋 베이스."
주인공군은 놋 베이스의 이름을 듣자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 폐쇄도시에서 있던 일 때문에 주인공군에게는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놋 베이스에서 발주했다고?"
"네. 자체 개발을 위해 프레임만 도와달라고 하더라구요. 돈은 많이 받았어요."
개발 전문이 아닌 대인전투 파일럿을 양성하는 곳에서 자체 개발에 도전한다고?
"디블라임 교수..."
"엇 아는 분인가요? 확실히 그 쪽 프로젝트 리더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옛 시나리오에는 없었던 디블라임 교수. 그녀의 등장이 케루브2를 시작으로 이 세계의 차원기 개발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그녀의 등장과 차원기의 개발이 시나리오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두 번 정도 만나본 인상으로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고멜 프레임이 어떤 건지 설명해줄 수 있어?"
격벽 안에 고이 보관 된 박사의 장난감 보다 천막 아래에 덮인 기묘한 프레임이 더 신경 쓰였다.
"...그건 제 주도로 이루어진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외주 프레임 개발 작업에 조수가 주도해?"
"아... 아아! 연구소장님 이야기였어요! 크흠흠..."
안경소녀의 말을 조금 지적해주었더니 엄청 당황해버려선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수상해."
류하연은 안경소녀를 조금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 아무튼! 연구소장님은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셨어요! 외주 작업 비용까지 다 쓰셨구요."
"...장난감을 두개나 만들어놓고도 돈이 남았니?"
"장난감이라뇨!"
앞에서 본 사자와 독수리를 장난감 취급하자 안경소녀는 화를 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요. 아직 이걸 못 보셔서 그런말이 나오는거에요."
"아직 뭐가 남았어...?"
장난감을 두개나 만들어놓고도 또 뭔가 만들었다니. 아마 사자 옆에 닫힌 마지막 격벽 하나 안에 들어있는 거겠지...
"이걸 보고도 그런 반응을 보이실 수 있을까요!"
- 삑!
짧은 비프음과 함께 마지막 격벽이 열렸다.
그 안에 있던 것은... 두 발로 서있는 푸른 용이었다.
---
"... 그래. 그래도 이건 두발로 서있네."
두 발로 서있는 푸른 용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하늘을 나는 비룡이라기 보단 땅을 걷는 지룡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공룡과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머리의 모양이 용과 비슷하게 생겼으니 용이라고 하겠다.
"차원수의 디자인에서 모티브를 따왔죠."
두 발로 서있다고 평가해준 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듯 한 안경소녀는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이었다.
"...멋있다."
"뭐...?"
나의 옆에 서있던 주인공군이 작게 감탄을 흘렸다.
미하일은 붉은 독수리를 보고 빠졌던데 너는 푸른 용을 보고 끌리는 거니...
하지만 이것도 역시 나의 기준에선 한숨이 나오는 설계를 가진 기체였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있긴 했지만 용의 앞 팔은 짧아서 무기를 제대로 들 수 있을까 의문이 가는 길이였다.
그걸 벌충하듯 어깨 양쪽엔 큰 포가 두개 달려있었는데... 사실상 저게 유일한 장비겠지.
저렇게 포격을 할 거라면 그냥 포탑에 발을 달아서 운용하지 그래?
"이...이건 괜찮죠?"
안경소녀는 여전히 나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굳이 인간형을 벗어나야 할 이유가 있는 거야?"
인간의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짐승의 살점을 입히다니...
"인간형은 재미없어요!"
"시험기동은 해봤고?"
"... 테스트 파일럿을 부를 비용이 없었어요."
그나마 앞의 두 대보단 멀쩡하게 생긴 기체인데 테스트조차 하지 못하다니. 이것 역시 결함품이었다.
"이것을 끝으로 모든 연구원이 연구소를 떠났어요... 협력으로 붙은 재단들도 죄다 떠나버려서 급여도 줄 여력이 없었어요..."
안경소녀는 푸른 용 앞에 서서 한숨을 작게 흘렸다.
"남은 건 저와 닥터페퍼 뿐이네요..."
"남은 건 너 뿐만이라고? 연구소장님은...?"
안경소녀의 한탄을 듣던 서예린은 작은 모순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아 아차차! 연구소장님도요! 둘이에요! 둘! 페퍼씨까지 셋!"
안경소녀는 엄청당황해하며 음료까지 인원수에 넣기 시작했다.
"...이상한데."
계속되는 안경소녀의 발언 실수에 주인공군까지 점점 안경소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연구원들이 떠나자 이 도시의 상권은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없어지니까요."
단 한명의 기행이 작은 도시의 몰락을 가져오는구나...
"그래도 군은 남아있지 않아? 그 사람들이라면 상권이 남을 정도는..."
아무리 도시에 사람이 없어지더라도 게이트를 대비해서 군은 남아있을 것이라는 게 서예린의 생각이었다.
"...옆 도시와 방위권이 통합되어서 사태가 터지면 그 쪽 군이 오게 되었어요."
군부대까지 이전할 정도라니... 이 지역은 정말 죽은 거나 다름없구나. 우리가 숙박하던 숙소도 옆 지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설마 이런 연구소만 있는 곳에 게이트가 열릴 일은 없겠지?"
주인공군은 무거운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가벼운 이야기를 꺼냈다.
- 흠칫!
주인공군이 입을 열자 안경소녀를 제외한 모두가 주인공군에게 시선을 보냈다.
- 삐이이! 삐익!
그 순간 안경소녀의 가운 주머니 안에서 비프 음이 두번 울렸다.
설마... 아니겠지.
"게이트 반응이에요! 위치는 바로 이 근처..."
안경소녀는 백색의 가운 안에서 조그만 모니터가 달린 탐측장치를 꺼냈다.
"너 정말..."
"일부러 그런건 아니야..."
내가 주인공군을 노려보자 주인공군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에 뭔가 말할 것 같으면 그냥 입을 막아버리던지 해야겠다.
"어휴... 옆 도시의 군부대가 올 때 까지 안전한 곳으로 가서 기다리자."
오늘은 전투를 하러온게 아니라 스카웃을 하러 온 거였으니 전투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안경소녀는 나의 제안을 듣고 눈치를 살피다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쪽을 향해 곧바로 오고 있어요..."
연구소인 만큼 코어가 많이 모여 있으니... 차원수들이 곧바로 이 쪽으로 오는 게 당연했다.
우리는 차원수가 몰려드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고.
"저기... 타브하에서 오셨다는 건 여러분들 중에 파일럿도 있는 거죠?"
안경소녀는 우리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테스트 부대인 만큼 파일럿 비율이 높은 부대이니 파일럿이 있을거란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일단 그렇긴 한데..."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에 살짝 눈을 감은 나를 대신해서 주인공군이 대답해주었다.
"총 몇 분이나 계신가요?"
"세 명이야. 나머지 둘은 오퍼레이터와 현장 지휘관..."
"세 명... 잘 됐네요!"
"잘되긴 뭐가 잘되었단 거야. 기체도 없잖아."
여차하면 엘을 통해 아르베넷을 부르면 곧바로 올 테지만 제법 거리가 먼만큼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령관님에게 스스로 뛰쳐나간 기체에 대한 해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중요한 문제였고...
"기체라면 있습니다!"
"기체가 어디에 있는데? 전부 프레임들뿐인데... 앗."
안경소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반박을 해주려다가 눈치 채고 말았다.
확실히 이 곳엔 탈 수 있는 기체가 있긴 했다.
그걸 차원기라고 봐도 될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정말 그걸 타라고...?"
"3대나 보셨잖아요! 마음에 드는 걸로 얼른 골라타세요!"
"독수리 타도 되는 거야?!"
"그럼 나는 저 용으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오직 나 뿐만인 것 같았다.
결국 나와 주인공군, 그리고 미하일은 최신 프레임이 쓰인 박사의 장난감을 각자 골라 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