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케필 · 레브
덧 씌워진 게이트에서 내려온 차원수는 거대했다.
방금 전 까지 기체와 비등했던 크기의 갑각형 차원수를 걷는 것만으로 뭉개버릴 정도의 거대한 크기를 가진 차원수.
네 발로 걷지만 이 세상의 어느 짐승과도 닮지 않은 듯 한 이형의 모습은 보는 것 만으로도 불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 대형 차원수... >
통신망 너머로 주인공군의 참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예전과는 다르지만 대형 차원수의 위력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있었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가장 빠르게 깨닫는 것 같았다.
< 대형... 이 나라에도... >
방금 전까지 웃고 있었던 미하일도 어느새 웃음을 멈추고 기체를 땅에 내린 뒤 조심스럽게 이형의 괴물을 경계했다.
"이런 장난감으로... 대형을 잡으라고?"
타브하에 두고 온 아르베넷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무기조차 제대로 쥘 수 없는 결함기를 가지고 대형 차원수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옆 도시의 지원부대는 대형 게이트에서 발생한 다른 차원수 때문에 오지 못하고 있어... >
< 대형차원수의 이동경로는... 이 연구소 건물을 지나서 바로 옆 도시...! >
통신망으로 들려오는 보고는 어느 것이나 절망적인 것이었다. 지원조차 받기 힘든 상황에 이대로 내버려두면 대형 차원수는 연구소를 밟고 사람들이 있는 도시까지 넘어가게 된다.
그나마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대형 차원수 '베헤못'은 호전적인 차원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무슨 일에도 멈추지 않고 그저 걸어가기만 할 뿐인, 그 위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남겨도 힘이 다 해 제압될 때 까지 걷기만 하는 차원수다.
박사가 타브하에 합류하게 된 이유는 연구원들의 사직도, 연구 성과의 실패도 아닌 대형 차원수 베헤못으로 인한 연구소의 파괴였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다른 성과들을 모두 버려둔 채 완성된 프레임 하나만 들고 타브하로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인원이 전부 빠져나간 연구소에서 차원수들을 피해서 하나라도 건져온게 오히려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겠지...
"이대로 후퇴하자. 이 기체로 상대할만한 상대가 아니야."
지금은 박사 혼자만이 아니라 타브하에서 온 우리들이 있지만 대형 차원수를 상대로 이 기체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 할 수 있어요! >
퇴각을 제안하자 통신망 너머로 안경소녀의 외침이 들렸다.
"... 지금은 장난 할 때가 아니야."
안경소녀의 외침에 나는 조금 신경질 적으로 대답했다.
정규 파일럿이 셋이나 있다고 해도 이런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기체들로 대형 차원수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 이 곳에서... 차원수를 없애버리기 위한 기체의 개발이 10년간 저의 일이었어요. >
자신의 작품에 대한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차원수 그 자체를 증오하는 듯 한 목소리가 통신망 너머로 들렸다.
"... 연구자로써의 집념은 인정해줄게. 하지만 이 기체의 모습으로는 무리야. 코어와 동조율이 너무 낮아."
아무리 신형 프레임을 썼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난 이형으로는 싸울 수 없다.
무기조차 제대로 들지 못해서 입에 겨우 물고 있는 기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인간형이면... 할 수 있는거죠? >
"그렇긴 한데... 숨겨둔 기체라도 있니?"
양산형 기체라도 적어도 두대 정도 있다면 베헤못의 진행경로를 바꿔 볼 정도의 여력은 생길 것이다.
< 후후후... 기체는 이미 여러분들과 함께 있습니다! >
"...뭐?"
기체라면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게 전부일 텐데... 설마 가변이라도 되는 건가?
< 드디어 이 프로젝트의 진짜 성과를 보여드릴 때가 왔습니다! 오퍼레이터 소녀! 이걸 눌러주세요! >
안경소녀는 마치 내가 이 질문을 하길 기다려왔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웃더니 쉘터 옆에 앉아있을 류하연에게 뭔가 시키기 시작했다.
< 이... 이걸? 누르면 안 될 것 같이 생겼어... >
< 잔말 말고 눌러주세요! 이런건 원래 소심해 보이는 소녀가 누르는겁니다! >
< 소... 소심... >
- 꾹
통신 너머로 류하연의 충격을 받은 목소리가 들렸으나 결국 안경소녀의 지시에 따라 버튼을 누른 듯 했다.
- 기이잉..
스피커 너머로 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동시에 기체의 모니터가 붉게 번쩍거렸다.
[TRINITIY :: SIGNAL OK])
모니터 위로 떠오르는 붉은 글자.
"트리니티...? 잠깐 기다려 박...!"
- 덜컹!
"꺄악!"
모니터 위로 떠있는 말도 안 되는 시그널을 막으려고 소리쳤지만 조종석이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말이 끊겨버렸다.
- 그오오오오오!!!
저 망할 안경소녀의 선언과 함께 내가 타고 있던 금색의 사자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삼위일체라니... 정말로 합체잖아!
---
< 뭐 뭐야 기체가 멋대로 움직여! >
< 어? 어어? 얘 왜 울고 있어? >
기체가 울부짖기 시작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통신 너머로 다른 두 명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 쿵! 쿵!
타고 있던 기체가 갑자기 일직선으로 멋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방향은 대형 차원수 쪽이잖아! 멈춰!"
- 철컥! 철컥!
조종간을 여러 번 당겼지만 이 쪽에서 움직임을 제어할 수 없는 듯 사자는 멋대로 대형 차원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그 오오!
어느새 사자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푸른 용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 파샤삿!
< 우와아아아앗 !>
푸른 용의 머리가 분리되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 철컹!
그 후 머리가 없는 몸통이 반으로 갈라지며 몸통의 양 옆에 달려있던 작은 팔과 다리가 몸통 안으로 접혀 들어갔다.
"엉망이네..."
기체를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알게되고 포기하듯 조종간에서 손을 놓고 변형 과정을 지켜봤다.
반으로 갈라진 몸통 안에 억지로 우겨넣은 듯 한 인간형의 골격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정말 신형 프레임을 쓴게 맞긴 하지만...
"읏!"
그런 감상을 하고 있을 틈도 없이 내 사자가 멋대로 몸이 갈라진 푸른 용의 틈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혀를 깨물 뻔했다.
- 휘익!
사자가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 쿵!
"아흑!"
갑자기 기체가 거꾸로 돌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바람에 조종석의 천장에 머리를 찧었다.
안에 타고 있어서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모니터 위로 뜨는 시그널을 보니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 수는 있었다...
사자의 몸이 꺾인 채 푸른 용의 틈으로 끼워지고 있었다!
- 철컹!
내 앞의 조종석 밑바닥이 열리며 무언가가 솟아 올라왔다!
"우와 아앗!"
- 퍽!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것에 놀라 버려서 발로 걷어 차버렸다.
"아악!"
이 비명소리... 주인공군?!
내가 걷어찬 것은 주인공군의 등짝이었다!
"미! 미안해 주혁아!"
합체란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 아래에서 튀어 나올 줄은 몰랐다...
- 콰앙!
졸지에 걷어차 버린 주인공군에게 사과를 하고 있던 찰나 쉴 틈도 주지 않고 조종석 위로 무너지는 듯 한 소리가 났다.
"아야 야야야... 여긴 어디야..."
나의 머리 위로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
- 삐! 삐! 삐!
정신없이 세 명이 모이게 된 조종석 안에선 시끄러운 경고음이 연달아 울렸다.
"다...다들 괜찮니..."
"어깨가 엄청 아파..."
"어지러워..."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합체였던 만큼 모두 상태가 멀쩡하진 못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메인 조종석의 모니터를 살펴보자 기체의 곳곳에 주황색 불이 들어와있었다.
사용이 불가능한 붉은 색은 아니지만 주황이라는 건 언제 파손될지 모른다는 경고의 의미였다.
특히 각 기체가 결합한 부분의 내구성이 최악인 듯 했다... 결합이라기보다 추돌에 가까운 형태였으니까.
분명 5분 전 까지만 해도 신형 기체치고 공간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세 명이 모이니까 조금 비좁은 게 애초에 셋이 탈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 같았다.
세 명이 웃기지도 않은 자세로 일렬로 늘어앉아있는게 조종석을 피격당하면 동시에 파일럿을 셋이나 잃을 수 있는 구조였다.
- 삑
< 어떻습니까! 세 대의 메카가 한대로! 이게 바로 케필 레브 입니다! >
이 안에 타고 있는 우리들의 심정을 모르는 것인지 안경소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모니터에 외부에서 찍은 화상을 보내주었다.
모니터에 비친 기체의 모습은...
푸르고 튼튼한 두 다리 위에 달린 금색의 바디.
몸체 위로는 메카닉적인 특성이 담겨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을 닮은 우뚝한 콧대와 입이 달린 헤드가 달려 있었고 금색의 몸체 뒤로는 붉은 날개가 거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 팔에는 아까 공중으로 날아갔던 용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들려있던게 아니라 왼팔에 '달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현용 기체라 봐줄 수 없는... 얼마 전 다같이 보았던 프로파간다 영화에도 나오지 못할 법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걸 차원기라 부를 수 있을지 조차 모르겠다. 장르가 바뀐 기분이다. 리얼계에서 슈퍼계로 변한 듯 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왜 가슴에 사자 얼굴이 달린 거죠?"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기체의 가슴에 사자의 얼굴이 달려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가동 폭을 깎아먹을만한 요소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 멋있기 때문입니다! >
"촌스러!"
< 그럴 수가... >
미하일이라면 멋있다고 해줄 줄 알았는데 미하일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사자의 심장..."
이래서 케필 레브 라고 이름을 붙였던 건가. 직설적이면서 참 난처한 이름이다.
"결합하자마자 관절에 주의 경고가 떴는데...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기합으로 해결하면 그만입니다! >
"하연씨. 한대 후려쳐주세요."
< 알았어. >
- 퍼어억!
- 어흑!
통신 너머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경소녀의 낮은 비명이 한번 울렸다.
나는 정신론을 가장 싫어한다.
< 다...당신은 너무 폭력적이에요... >
"...그래서 이 기체라면 저 대형 차원수를 막을 수 있는건 맞죠?"
정작 토벌대상인 대형 차원수 베헤못은 이 소동을 눈에도 두지 않고 계속 천천히 걸어 나가고 있을 뿐이었지만.
< 가능합니다. >
그나마 안도할 수 있는 답변이 들렸다.
"코어를 4개나 쑤셔 박았으니... 뭐라도 할 수 있겠죠."
기체의 준비 과정이 요란하긴 했지만 코어를 네 개나 썼다면 그 성능만큼은 확실하겠지?
< 아. 실제로 조종에 쓰이는 코어는 두개 정도입니다. >
... 이러면 합체 전이랑 다를 게 뭐가 있다는거지.
"조종은? 세 명인데 각자 역할이라도 나눠진 거야?"
코어를 연결하는 건 공학적인 문제지만 파일럿을 셋이나 태운 의미가 하나쯤은 남아있길 바라면서 안경소녀에게 한 번 더 질문했다.
< 메인 파일럿 혼자서 조종하는 구조입니다. 다른 두 명은 응원이라도 해주시는게... >
"...하연씨 한대 더 부탁드려요."
- 빠악!
- 아앗! 악! 정강이!
스피커 너머로 비명소리가 작게 울렸다.
결국 합체의 의미가 허무하리만큼 없는 기체였다...
"...정말 이걸로 해치울 수 있는 거지?"
< 미...믿어주세요! >
안경소녀는 어느새 나에게 대답할 때 조금 신중하게 대답하려는 듯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하아..."
그래. 전문가의 말을 믿지 않으면 뭘 믿겠어. 한숨이 조금 나왔지만 까짓것 해보는 수밖에 없다.
"파...파이팅!"
"나랑 아하트는 응원하고 있을게..."
주인공군과 미하일은 어느새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조금 피곤해진 탓에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았다.
"가자 얘들아."
조종간을 잡고 비좁은 좌석에서 페달을 내려밟자 기체가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막상 움직여보니 조금은 일반 기체다운 조작감이 느껴졌다.
기체에 대한 더 이상의 불만은 나중으로 미루자. 당장 문제는 눈앞의 대형 차원수. 단지 걷고 있었지만 걷는 것만으로 바닥이 푹 꺼지며 지나간 자리는 건물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 기체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오른손에 대검을 쥐고 베헤못을 향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