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케필 · 레브
감찰관이 떠난 것을 확인한 뒤 정리를 마치고 연구소 정문을 잠갔다.
이쪽 도시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유령단지나 다름없어졌으니 식사라도 하려면 옆 도시 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많아졌으니 택시를 두 대 부르기 보단 그냥 벤을 한대 부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벤을 불렀다.
벤에 올라타고 박사와 마주 앉은 채 한쪽 다리를 무릎 위로 꼬아 앉았다.
사람 한명 영입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미하일 때 보다 더 힘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와주신 건 감사해요."
박사는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별 말씀을."
아까 전의 싸구려 촌극으로 감찰을 넘어가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겠지. 상대가 아직 어리버리해보이는 중위여서 속여 넘기기 좋았다.
아마 감찰기록이 올라갈 내일 오전쯤이면 감찰 내용을 이상하게 여긴 감찰부에서 직접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는 이미 타브하로 이관되었으니 건드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전 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건 내키지 않아요."
하지만 나에게 보내는 감사와는 다르게 박사는 여전히 사령관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아까 전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사령관님의 부인의 죽음에 대한 것이 관여된 것 같았는데... 지금 묻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자리에는 다른 애들도 있었으니까.
"그 이야기 말인데요. 사령부 직속이 아니라면 문제 없는 거죠?"
아까 촌극을 꾸밀 때 어떻게 설득해야 할 지 생각해둔게 있었다.
"예?"
"잠깐 기다려보세요. 분명 이 쯤에..."
목에 걸고다니던 카드 지갑의 안쪽을 열어 그 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서 박사에게 건네주었다.
명함에는 베타니아의 로고가 찍혀있었고 그 아래에는 지금의 나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얼마 전에 사령관님을 통해 영업에 필요한 명함을 받은 참이었다. 건네 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건... 당신 명함인가요?"
내가 건네 준 명함을 두 손으로 받은 박사는 명함에 새겨진 이름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타브하 소속 백업기관 베타니아에요. 타브하가 싫다면 이 쪽으로 들어오세요."
사령관님에게 고용되는 게 싫다면 나에게 고용되면 되는 게 아닐까.
"백업기관이라고 해도... 결국 타브하의 밑... 그 남자의 밑에서 일하는 게 아닌가요?"
"조금 달라요. 베타니아는 타브하의 백업기관이긴 하지만 예산은 따로 배정되있어요. 당신 급여도 이 쪽에서 직접 나올 거구요."
"으응...?"
박사는 나의 설명을 듣자 조금 혼란스러워 하는 듯 했다.
결국 똑같은 돈을 받는 게 아닌가?
"사령관님의 밑에서 일하고 돈을 받는 게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 일하고 돈을 받아가는거니까 문제없지 않나요?"
"...그게 그렇게 되나요? 결국 돈을 주는 주체는 똑같은 게..."
궤변뿐인 말이었지만 박사는 내 주장에 조금 흔들리는 듯 했다.
"오히려 당신이 들어오게 되면 베타니아의 예산이 늘어나겠죠. 그 만큼 예산 배정이 높아지면 결과적으로 타브하의 예산을... 사령관님의 돈을 강탈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그런가요?"
"그래요. 오히려 베타니아에서 일하면 일할수록 사령관님이 쓸 예산을 뺏어올 수 있는거에요."
"그렇군요!"
내가 말하고도 이상한 말이었지만. 사근사근 설명해주자 박사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더니 이해했다는 듯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어수룩한 개발자들은 속여 넘기기 좋은 대상이다.
내가 예전에 맺었던 하청 계약이랑 다를 게 뭐가 있나 싶지만... 조금만 혼란스럽게 한다면 잘 속아 넘어가는 게 개발자들이다.
항상 이상한 계약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야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라도 하면서 나눠볼까요?"
"식사 말인가요?"
"오늘 당신도 고생했잖아요. 오늘은 제가 낼게요. 근처에 잘 아는 곳 있나요?"
"아 그거라면 이 근처에 밥집이... 분명 저 쪽에."
슬슬 시내로 도착한 벤 안에서 박사는 창 너머를 가리켰다.
박사의 손끝이 향한 곳은 조금은 허름해 보이지만 야근을 하는 직장인들이 자주 갈법한. 저녁 식대로 한 끼나 때울법한 곳이었다.
"저기 말인가요?"
"아... 저기는 조금 비싼가요..."
박사는 내가 묻자 조금 목소리 끝이 낮아졌다.
분명 직원들이 떠나가는데 혼자 이상한 개발에 몰두한 덕분에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겠지.
아직 다른 애들처럼 한창 클 나이인데 회식 메뉴도 눈치 보는 게 조금 불쌍했다.
"오늘은 중요한 자리니까 가장 비싼 곳으로 가요."
여기선 어른의 경제력을 보여줄 때 였다.
사실 업무비용이지만.
"저...정말인가요?"
"알고 있는 곳 있나요?"
"그... 외부 손님이 왔을 때 가던 곳이 있긴 했는데... 조금 비싸서요."
박사는 조금 신난 것 같아 보였지만 동시에 약간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상관없어요. 가죠."
"네...네엣!"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박사는 신난 듯 곧바로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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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벤은 시내 안쪽의 식당 앞에서 멈췄다.
연구소가 있는 도시가 산간지역이라 그런지 목축이 조금 잘 되는 곳이었던 듯 접대용으로 갈법한 고기집이었다.
잘 됐네. 아까 저녁은 고기로 해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던 박사와 나와는 다르게 다른 네 명은 벤에서 푹 자고 있었다.
아직 한창 젊을 때니까 졸음이 오는건 어쩔 수 없지.
"몇 명이신가요?"
입구로 들어가자 점원이 인원수를 물었다.
"다섯... 아니 여섯 명이에요."
한쪽 손을 펼쳤다가 오늘부터 한 명이 늘어난 것을 생각하고 반대쪽 손의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인원수를 알려주자 조금 안쪽의 큰 룸을 잡아주었다. 이제 우리도 제법 인원이 많아졌구나.
"비싸 보이는 곳인데 괜찮겠어?"
이 멤버 중 가장 어른인 서예린은 짐짓 가게의 분위기에 조금 압도된 것 같았다.
이 멤버들이라고 해봐야 전부 학생들 뿐. 학생들끼리 와서 먹기엔 비싼 느낌이 드는 곳이겠지.
"모처럼 놀러왔는데 가끔은 좋은 것도 먹어야죠."
"그렇구나..."
적당히 둘러앉은 뒤 메뉴판을 한번 슥 읽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한우 생갈비 십인 분에... 탄산 두병이랑 소주랑 맥주 두병씩 주세요."
여섯 명 회식이니까 일단 고기부터 넉넉히 시키고 마실 건 떨어질 때 마다 시키면...
"예?"
"어?"
"뭐?"
갑자기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묘월씨 술 마셔?"
아차...
류하연의 낮은 목소리가 내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저 손님... 전부 학생인 것 같으신데 술은..."
점원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실수에요! 실수! 탄산으로 네 병 주세요!"
예전에 회사 다닐 적 버릇이 나와 버렸다.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정신이 없네...
점원은 내 주문을 다시 듣고 알겠다는 듯 메뉴판을 가지고 돌아갔다.
"...능숙해보였어."
"벌써부터 술은 조금... 그러면 키가 안클거야."
"하하..."
미적지근한 웃음소리와 함께 진심어린 충고가 들렸다.
"응? 이 나라에선 마시면 안 돼?"
미하일만 이런 분위기가 의아하다는 듯 질문했다.
"당신은 마셔본건가요?"
박사도 따로 음주 경험은 없었던 건지 미하일의 질문에 질문으로 다시 물었다.
"훈련 끝나면 교관님이 한 병씩 주셨어."
아마 그 쪽 나라의 증류주 이야기겠지.
"역시 외국인..."
미하일의 말이 능숙했던 덕분에 그 동안 별다른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다가 이런데서 문화적 차이점이 느껴졌다.
"이 나라에서 미성년자는 마시면 안 돼."
"시시하네..."
아이들끼리 잡담을 나누던 사이 고기가 나왔고 내가 집게를 들고 불판위에 올려주었다.
- 치익 치익
아이들끼리 왔다고 허름한 부위를 내주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랬으면 아까 연구소에 세워둔 그걸 다시 타고 와서 실수인 척 가게를 밟았겠지.
"내가 구울까?"
말없이 고기를 굽고 있자 주인공군이 자기가 대신 구워주겠다며 나섰다.
원래 이럴 땐 가장 막내가 나서서 굽는 법인데. 좋은 태도네. 뭐 이제 막내는 아니지만...
"아니야. 내가 할께. 피곤하지 않아?"
"...태울 거 같으니까 내가 할게."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자 어쩔 수 없이 집게를 넘겨주게 되었다.
탈 날까봐 바싹 익혀서 건네주려고 했는데 뭐 자기들이 굽겠다면 어쩔 수 없지.
괜히 손이 놀게 되서 어색한데 이럴 땐 분위기를 돌릴 겸 한잔씩 하는 게 좋겠지.
식탁위에 놓인 음료 유리병을 하나 집은 뒤, 병목을 들고 한번 슥 흔든 뒤 팔꿈치로 병 아래를 툭 쳤다.
왜 하는 동작인진 모르겠지만 회식 땐 이 동작을 한 번씩 하게 되곤 한다.
역시 이래야... 응?
다시 한 번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거래처분들이 보여주던 모습이네요."
"우리 오빠가 집에서 저러던데..."
나는 어색하게 유리병을 식탁 위로 다시 슬쩍 올려두는 수밖에 없었다.
소주도 아니고 탄산인데 이래봐야 탄산이 쌓여서 넘치기만 하겠지... 아래를 쳐버린 병을 밀어두고 다른 병을 따서 급하게 빈 잔에 채웠다.
"...음주토끼."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류하연의 질타가 다시 들어오자 가슴 한쪽이 아팠다.
방금 행동은 오해할 만 했으니까 어쩔 수 없긴 하다.
"토끼?"
박사는 이 별명을 이해하지 못한 듯 혼자만 토끼라는 단어에 의문을 품었다.
"머리가 하얗고 눈이 빨갛잖아... 그래서 토끼래."
주인공군은 이 멤버에 처음 껴드는 박사를 위해서 대신 설명해주었다.
"아하... 그래서 토끼군요. 베스트하게 매치되는 별명입니다!"
벌써 몇 개월째 들은 별명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길을 걷다가 누가 토끼라는 이야기를 꺼내면 한번 돌아보게 될 정도로 익숙해진 별명이었다.
토끼 이야기 덕분에 방금 전 까지 꽂히던 시선이 거두어져서 다행이다.
이 사이에 반쯤 채운 잔을 한잔 씩 건네주었다.
"오늘 모두 고생했어요. 갑작스런 전투도 있었지만... 뭐 잘 해결 됐잖아요?"
전투라는 이야기를 듣자 주인공군과 미하일은 조금 멋쩍게 웃었다. 둘도 분명 오늘은 힘들었겠지.
"오늘 회식 자리는 새로 들어온 박사를 환영하는 자리에요. 빈손으로 타브하에 돌아가게 되면 어쩔까 걱정 좀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네요."
괜히 내가 일찍 개입한 덕분에 영입하지 못하면 어째야하나 걱정을 좀 했지만 다행히 박사의 영입은 별 문제 없이 성공했다.
"되게 지휘관님 같은 멘트네."
지휘부끼리 별도 회식을 가져본 적이 있는 듯 한 서예린과 류하연이 조금 웃었다.
"회식 때 아버지 같기도 하고..."
주인공군도 1호기를 정비해주는 개발부 회식에 끼었던 적이 있었던 건지 개발부장님의 예를 들었는데...
어라... 혹시 다른 회식자리에 껴본 적이 없던 것은 나 뿐? 난 아무데도 불려간 적이 없었는데...?
설마 나 아싸였나...? 이 자리도 다들 마지못해서 온 게 아닐까...?
"아...아무튼 건배해요! 건배!"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급하게 건배를 외쳤다.
"건배!"
- 챙
음료뿐인 잔이지만 서로 유리잔을 맞부딪쳤다.
... 정말 이 자리가 불편한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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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곳이어서 그런지 고기는 맛있었다. 서비스도 좋았고.
마지막 식사는 뭐로 할 거냐는 점원의 물음에는 비빔냉면으로 전부 통일했다.
고기 뒤엔 비빔냉면이지 역시. 한 메뉴로 통일시켜야 주문도 빨리 나오는 법이다.
육수 한 그릇과 같이 나온 비냉위에 손수 육수를 전부 부어주고 가위로 잘라주었다.
박사만 내 행동을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뭐 아무러면 어떤가.
식사가 끝난 뒤 계산을 마치고 카운터에 있던 박하사탕 하나를 입에 넣고 굴리고 있자 박사가 어깨를 두들겼다.
"저는 연구소로 돌아갈게요. 아직 정리할게 조금 남아있어서요... 가까운 시일 내에 뵐게요 보스."
회식자리에서 조금 친해진 박사는 나를 보스라고 불렀다.
나쁘지 않은 별명이네. 실제 직속상사기도 했으니까.
작별인사를 마친 박사는 따로 택시를 불러서 연구소로 돌아갔고. 우리는 숙소까지 걸어서 돌아가기로 했다.
"그거? 내가 있던 곳에서는 당연했는데?"
미하일도 회식 덕분에 다른 히로인들과 친해진 듯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예전에 학교에선 류하연과 약간 신경전을 보인적도 있었지만, 결국 그 나이대 애들이 그렇듯 처음이 조금 엇갈려서 그랬을 뿐. 시간이 지나면 친해지기도 하기 마련이다.
친해진 세 명이 앞서가는 덕분에 나와 주인공군은 단 둘이 남겨져서 뒤를 따라 걷는 꼴이 되었지만.
"잘 먹었니?"
아무 말 없이 걷자니 조금 어색해서 슬쩍 사탕을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먼저 말을 걸었다.
이미 나보다 머리 한개 이상은 더 크지만. 아직 한창 클 나이대의 아이니까 잘 먹어두면 좋을 텐데. 여자애들만 있는 자리에 껴서 불편하지는 않았을까.
"덕분에 잘 먹었어."
돌아오는 대답은 간결했지만 만족스러움이 담겨있었다.
잘 먹었다니 다행이다. 조금 마른 체격 같아보여서 걱정을 좀 했는데...
옆으로 걸으면서 슬쩍 쳐다보니 약간 살을 찌워도 괜찮을 것 같은 몸이다. 남자애라면 등빨이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에 같이 운동이라도 시작하자고 해볼까... 솔직히 나는 운동이 싫지만 같이 한다면야...
"...아까 했던 이야기 진짜야?"
"어떤 이야기?"
대답을 듣고 혼자 생각에 빠져 걸어가던 중 조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만 돌려 쳐다보았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
아까 적당히 박사의 정체에 대해 둘러대기 위해 했던 그 이야기 말인가...
"물론이지. 다 알 수 있어."
이럴 땐 자신감 넘치게 대답해줘야 의심을 사지 않는다.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더라도 대응하기 좋겠지.
"나도 한번 봐줄 수 있을까?"
"그럼! 봐줄게. 한번 보자."
태도가 짐짓 진지했기에 심각한 질문이라도 될까봐 걱정했지만 잠깐 바라봐 달라는 것 정도면 뭐.
나의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군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낮추어 나를 바라보았다.
검고 고급진 안경테 아래로 비치는 진갈색의 눈동자.
알 수 없는 안경 덕분에 붉어진 눈은 가려졌지만. 고작 색이 변한다고 그 사람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릇이 바뀐다고 그 안에 깃든 영혼마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걸음을 멈추고 주인공군의 눈을 응시했다.
아주 예전에 죽어버렸던 나의 눈동자와는 다른 밝은 눈. 활력이 느껴지는 듯 한 젊은 눈이었다.
예전 삼월에 심문실에서 바라보았던 것과는 다르게 주인공군의 눈은 그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조금 일찍 어른이 되어가는 듯 한 눈.
하지만 현실에 꺾여가는 눈이 아니라. 어디론가 나아갈 듯 한 맑은 눈이었다.
마치 희망을 담은 듯 한 눈을 왠지 모르게.
나에게 없었던 것을 갈구하는 것처럼 계속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이렇게 변하지 않았더라도.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 깃들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여자아이가 아니었더라도.
저 눈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
"...묘월아?"
감상에 잠긴 나를 깨우는 듯 한 목소리 덕분에 생각이 가라앉았다.
"어땠어?"
"비밀이야."
한참이나 말없이 눈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이 왠지 부끄러워져서 적당히 둘러내버렸다.
"그렇구나."
주인공군은 나의 비밀이라는 말을 또 다시 평소처럼 넘겨주었다.
나는 그에게.
나에게 없었던 희망을 품은 눈이 너무나 부러워서.
한참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