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라파 베레시트
출장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서 하루 만에 돌아왔지만. 십대 소녀들과 같이 하룻밤을 지내는 건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특히 우리 오퍼레이터가 그렇게 잠버릇이 나쁠 줄은 몰랐다. 하루만 지내서 다행이었지. 며칠 더 머무르는 거였다면 밤에 슬쩍 빠져나와서 널찍한 주인공군의 숙소에서 잤을지도 몰랐다.
기지에 돌아오고 며칠 동안 박사의 연구소에 있던 화물들이 운반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쉐모트 프레임의 경우 연구소의 자산으로 등록이 되어 있었는데 소속이 옮겨지면서 별 문제 없이 인수할 수 있었다.
인수과정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개인자격으로 매입할 수밖에 없었다. 세달간 번 돈이 많긴 했지만 이 돈으로는 프레임의 손 밖에 못 샀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박사는 자연스레 타브하에 들어오게 될 예정이었지만 예정을 앞당겨 몇 달 빠르게 데려온 덕분에 완파된 1호기의 개수 작업을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
기존에 계시던 개발부장님까지 두 명의 개발자가 한 기체에 붙게 될 터인데. 둘 다 고집이 강한 성격인데 잘 넘어갈 수 있으련 지 모르겠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박사를 맞이하기 위해 다른 멤버를 각자의 근무처에 보내두고 곧바로 사령부로 향했다.
전입과정을 거치려면 박사가 어쩔 수 없이 사령관님을 직접 만나봐야 할 텐데... 그래봐야 오 분 남짓 안되는 시간일텐데 별 일은 없겠지.
- 콰앙!
나의 예상은 늘 빗나가기 마련이었다.
사령부 입구 쪽에서 흰 가운을 입은 소녀가 어딘가 짜증이 난 듯 한 얼굴로 자판기를 걷어차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부대의 기물을 걷어차서 쓰나. 세금이 걷어져서 만든 물건이다.
가운을 입은 소녀. 박사에게 인사를 할 겸 다가가다가 문득 인사말이 고민 되었다.
'안녕?' 너무 친근한데.
'안녕하세요 박사' 너무 정 없어 보이고...
'어이 박씨.' 이건 좀 그렇다.
나는 위계가 엄격히 나뉜 조직 구조를 싫어한다.
타브하에 개인 사업자 겸 민간 협력자로 들어온 이유도 군에 소속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부하에겐 친근하게 가야지.
"어이 박사."
결국 고른 인사말은 마지막으로 고민하던 거랑 별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직함은 불러주었다.
"어... 보스 어서 오고."
박사도 친근하게 받아주는 것 같네. 어떻게 보면 정답이었나 보다.
인사는 친근하게 받아주었지만 표정은 별로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건가.
"낮부터 왜 그렇게 죽상이에요."
좋은 보스의 자격은 부하의 고민을 잘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이다.
과연 박사는 어떤 고민이 있었던 걸까.
"그 남자가 꼴 받게 하잖아요!"
"그 남자?"
"사령관!"
- 따악
"악!"
엄지와 중지를 모아 박사의 이마 위를 튕겼다.
"사령관님을 그렇게 거리낌 없이 부르는게 아니에요."
나와 박사는 같은 직장이지만 박사에게 사령관님은 외부 거래처 사장님 같은 분이다.
과거에 일이 있었더라도 비즈니스 관계에선 어른다워야지.
"그치만... 알겠어요."
박사는 내 눈치를 한번 보고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닥페나 한잔 할래요?"
"좋죠."
대부분의 비즈니스 회화는 음료나 한잔 하면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바로 일 이야기를 꺼내는 것 보단 뭐라도 한잔 하면서 나누는 게 좋겠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어 자판기 앞에 섰다.
박사를 영입할 때 박사가 주장하던 계약조건 중 하나가... 기지 내 모든 자판기에 닥페를 들여 달란 것이었다.
솔직히 나와 박사 아니면 이 기지에서 닥페를 마실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까 싶었지만 인재를 데려오는데 이 정도 계약조건이면 싼 투자다.
- 덜컥 덜컥
동전을 몇 개 쏟아 넣고 닥페를 두 번 누르자 빨갛고 뚱뚱한 캔 두개가 떨어졌다.
"받아요."
묵직한 캔 하나를 박사에게 던져주자 박사는 두 손으로 음료를 바로 받았다.
음료를 건네준 뒤 벤치에 박사와 함께 앉은 뒤 캔을 따자 합성 된 듯 한 체리향이 올라왔다.
"..."
박사는 아직도 사령관님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싫은 듯 표정이 조금 착잡했다.
출장을 다녀온 후 둘 사이에 있었던 옛날이야기를 사령관님에게 직접 들었다.
사령관님의 부인과 박사는 자매처럼 친했다고 한다. 나이차를 생각해보면 젊은 엄마와 딸 뻘이었겠지만.
사령관님 역시 박사와는 잘 지내던 사이였지만. 10년 전의 사고로 부인이 게이트 안으로 실종된 일 이후로 박사와의 사이는 나빠졌다고 한다.
사령관님의 부인... '영웅'의 희생은 게이트를 닫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지만. 어린아이였던 박사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던 것 같았다.
출격을 말리지 못한 사령관님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게 굳어졌다던데... 이런 일은 시간이 해결해줄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필요를 가장해서라도 가끔씩 서로 얼굴을 마주하게 해주는 것 뿐.
지금의 박사에겐 알단 기지에 적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오늘은... 끄흑."
일정을 이야기 해주려는 게 탄산 때문에 옅은 트림이 나와 버려서 입을 막았다.
작은 몸에 닥터페퍼 한 캔은 너무 버거운 탄산이긴 하다.
"흠흠... 오늘은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할 거에요."
"쓸데없는 일 아닙니까 보스..."
박사는 인사치레를 다니는 것이 싫은지 표정이 조금 찌푸려졌다.
"인사하러 다닌 것도 근무시간으로 들어가요."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겠어요!"
근무시간으로 인정해주면 뭐든 할 수 있는 법이지.
---
박사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베레시트 1호기(완파됨) 가 관리되는 제 1 격납고였다.
왠지 빈손으로 오긴 그래서 박사와 같이 BX에서 비타민 음료를 몇 박스 사서 들고왔다.
"너무 많이 산게 아닌가요..."
박사는 고작 몇 박스를 들게 시킨 것을 가지고 힘겨워했다.
이게 다 운동부족이다. 매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으니까 체력이 떨어지는 거야.
사실 나도 들고 오면서 조금 무겁긴 했다.
무겁게 박스를 들고 온 격납고는 생각보다 한가해보였다.
얼마나 한가했냐면 오늘이 주말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다들 여유로워보이고 할 일이 없는 듯 늘어져있었다.
정비인원들 중 일부는 배드민턴을 치고 있기도 했고. 한 쪽에선 족구를 하고 있었다.
오늘 체련의 날이 아니지 않나? 라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1호기가 부서진 지금은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박사를 가장 먼저 부서장에게 소개해드리는게 예의라 생각해서 개발부장님을 찾아봤지만 보이질 않았다.
'저...저기에.'
부품이 담긴 궤짝 위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던 정비원이 나를 알아본 듯 했다.
주인공군 때문에 자주 들렸으니 내 얼굴 정도는 이제 다들 알고 있겠지.
'파괴자가 왔다!'
뭐?
'저...정말이다. 기지의 모든 기체를 파괴하는 파괴자가 왔다...'
나를 본 정비원들의 반응은 소란스러웠다.
날 보고 파괴자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제가 파괴자라구요?"
납득할 수 없는 별명이 하나 더 늘어날까봐 눈이 마주친 정비원에게 물어보았다.
"그...그거야 당신이 기지에서 부순 기체가 벌써 세 대 가까이 되지 않습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정비원은 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해주었다.
내가 부순 기체라고 해봐야... 자폭시킨 케루브와 1호기의 조종석 커버... 1호기의 관절... 1호기...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긴 하다. 정말 기지 내 파괴 사례에 대부분 내가 관여하고 있었네...
'이번엔 뭘 부수러 온 겁니까...'
'임시로 만든 케루브 만큼은 안 돼...!'
정비원들은 날 경계하고 있었다. 너무하네 정말.
"너무해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나에게 불리한 분위기를 뒤집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조금 숙이고 울 것 같은 목소리를 써봤다.
'아...아니 저희가 정말로 그러는 게 아니라...'
'넌 왜 어린애를 울리고 그래!'
'장난으로 한건데...'
조금 울먹거린 연기를 한 것뿐인데 분위기는 금방 바뀌었다.
정비원들도 진심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겠지.
"흠흠 이제 괜찮아요. 뭐 사실이긴 한걸요."
'그...그런가요.'
나를 울린 것으로 지목받은 정비원은 내가 괜찮다고 하자 안도하는 듯 했다.
"제 불찰이긴 했어요. 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은 늘 있으니까 빈손으로 오진 않았어요."
음료박스를 사오길 정말 잘했다. 이럴 때 나눠주면 분위기는 조금 가벼워지겠지.
'이야 감사합니다!'
정비원들에게 음료를 한 병씩 나누어주자 방금 전 분위기는 잊어버린 듯 한 병씩 받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소녀는 누구입니까?'
음료를 받아가던 정비원들 중 한명이 나의 뒤에 서있던 박사를 보고 누구냐며 물었다.
나와 함께 온데다가 연구원용 가운을 걸치고 있으니 누구인지 궁금하긴 하겠지.
"이쪽은..."
"무슨 일인데 이렇게 소란스러워."
박사를 소개하려던 찰나 우리의 뒤에서 조금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평소와 같은 기름때가 묻은 정비복이 아닌 정비고 티셔츠를 위에 입은 개발부장님이 계셨다.
밑에 족구화까지 신고 계신걸 보니 아까 족구하고 계시던 건 이 분이었구나.
"안녕하세요 개발부장님."
"어어."
인사를 건네며 음료를 한 병 건네 드리자 한손을 척 올려서 인사를 받아주셨다.
어느 정도 안면식이 생기니까 제법 사이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개발부장님. 이 쪽은..."
"과장님!!!"
박사를 개발부장님에게 소개시켜주려던 찰나 박사가 먼저 개발부장님을 보고 환하게 인사를 했는데... 과장님?
"어? 네가 왜 여기 있어."
개발부장님은 박사를 알고 있었던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동시에 반갑다는 표정도 걸려있었다.
개발부장님의 대답을 들은 박사의 얼굴은 여태까지 본 것 중 가장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만나서 반갑네... 연구소에 한번 찾아가봐야 했는데 못간건 미안하다."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에헤헤..."
박사는 마냥 웃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론 여기서 일하는 거야?"
"타브하에 직접은 아니고 한 다리 걸쳐서 에요."
"한다리?"
"베타니아 소속이에요."
"또 베타니아가 한명 늘었군."
베타니아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개발부장님은 나를 한번 슬쩍 쳐다보았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슬슬 그놈을 좀 용서해줘."
"...그건 안돼요."
개발부장님이 용서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박사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둘 사이를 소개할 수고는 덜었지만 기껏 밝아진 분위기가 무거워지려 하고 있었다.
"흠흠...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난 건 알겠어요. 반가운건 알겠지만 작업일정을 알려드려야죠?"
"아. 그랬죠. 보스."
박사는 다른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가자 안도한 듯 나의 이야기를 거들어주었다.
"작업일정? 우리 일이 없는데?"
격납고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개발부장님은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하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셨다.
"내일부터 바빠지실 거에요. 슬슬 올 시간이... 아 왔다."
- 삐이!
격납고 앞쪽에서 트레일러 트럭이 후진하여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화물이 도착하자 그 근처로 정비원들이 모여들었다.
"저기에 들은 게 일감이겠군."
엄중하게 포장된 화물을 보자 개발부장님은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는 듯 입 끝에 조금 미소가 걸렸다.
"쉐모트 프레임. 1호기를 개수 할 새로운 프레임이에요."
---
1호기를 개수할 쉐모트 프레임을 넘겨준 뒤 격납고를 빠져나왔다.
오늘부터 바로 개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개발보다 그 이전의 설계가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법이다.
그나마 완성된 프레임에 외장을 씌우는 작업이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그건 그렇고.
"헤헤..."
아까부터 박사의 표정이 유난히 밝아 보인다... 개발부장님을 만나고 부터 쭉 저런 표정이다.
"그런 아저씨의 뭐가 좋다고..."
"그 말 취소하세요! 보스! 그 분이 얼마나 멋진 분인데요!"
멋져...?
"흔하게 널린 어린 남자애들이랑은 전혀 다르다구요. 세월을 겪은 눈에 더 멋져진 백발까지... 빠져들 것 같아요."
흔한 공돌이 인상 아닌가.
박사의 표정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 라기 보단 키다리 아저씨를 만난 소녀의 느낌.
"빠져든다니... 전 모르겠네요."
그냥 흠모 정도면 괜찮을지 몰라도 상대는 유부남이야. 부인은 사별했지만... 나이차가 스무 살은 넘을텐데.
그런 아저씨의 뭐가 좋다는 건지 나로써는 모르겠다.
"묘월아?"
박사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2격납고로 향하던 중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낮으면서 소년의 티가 남아있는 목소리... 주인공군의 목소리였다.
"안녕."
"안녕하세요. 소년."
박사는 주인공군의 아버지를 좋아하는 주제에 그 아들에겐 관심이 없어보였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인사차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야. 너는?"
우리의 뒤에 있었던 주인공군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1호기가 놀고 있으니까 얘도 할 일이 없던 거겠지...
"방금 전 까지 아버지랑 족구하고 있었어."
부자간에 공놀이도 할 정도로 친해진 건가.
알아서 운동도 잘 하고 있네.
정말 운동을 안하는 건 이 기지에서 나 혼자뿐인가...?
"덥진 않아?"
방금 전 까지 열심히 뛰고 있었던 듯 이마에는 땀이 조금 맺혀있었길래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가는 검은 안경태안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나는..."
"보스 안 갈건가요?"
"아. 지금 갈게."
내가 발을 멈추고 주인공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먼저 걷던 박사가 가운에 손을 찔러 넣곤 나를 불렀다.
"미안해. 박사 때문에 조금 바빠서... 다음에 봐."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근무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어주고 박사를 향해 뛰어갔다.
"...뭔가요 보스."
"뭐 말이에요?"
박사는 멀리 떠나가는 주인공군과 나를 한번 번갈아 본 뒤 나의 얼굴을 보고 히죽거리고 있었다.
"당신도 저 소년에게 빠져있는게 아니에요?"
"네?"
내가 빠져있다고?
"보스. 표정이 풀려 있었습니다."
"...평소 같은 표정이었는데요?"
언제나와 같은 표정이었을텐데.
"무자각이 가장 나쁜 겁니다.. 저 소년도 고생 좀 하겠군요."
박사는 마치 어른마냥 으스대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뭘 어때서.
으스대는 박사가 조금 얄미워져서 먼저 걸어갔다.
"아앗 같이 가요 보스! 저 여기 길 몰라요!"
뒤에서 쫒아오는 박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와 엘의 격납고.
베타니아 베이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