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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화 〉라파 베레시트 (132/152)



〈 132화 〉라파 베레시트

"아..."


하늘 위로 손을 뻗지만 닿지 않았다.


바로 저 위에 내가 원하던 정보가 있는데. 나의 손은 닿지 않았다.

< 후... 후퇴야! >


백색의 사도의 주변으로 다섯 장의 장갑판이 모여들더니 저 멀리 하늘의 너머로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렸다.


하늘 너머로 사라져가는 사도와 반대로 나의 아르베넷은 서서히 땅 아래로 떨어졌다.

- 콰앙!


아르베넷의  발이 깨져가는 콘크리트 바닥 위로 떨어지자 약한 진동감이 조종석 안으로 느껴졌다.




[ 지직... 직... ]

"엘?"

사도를 만난 직후 계속 침묵하고 있던 엘에게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마스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

"방금 전 까지. 다른 사도와 싸웠던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 사도...? 다른? ]


엘의 대답은 어딘가 모호하게 들렸다.



[ 기억이 전혀 없어요... 누군가 그 부위를 가린 것처럼 기억엔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

엘은 사도와 싸운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엘은 방금 전 전투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록! 기록은 남아있어요! ]

엘에게 기억은 없었지만. 아르베넷에는 사도와의 전투 기록이 남아있다.

엘이 급하게 나의 눈치를 살피듯 전투기록의 재생을 시작하자 모니터 위로 빠른 속도로 전투의 기록영상이 지나갔다.



이건... 아르베넷과 같은 타입. 아니. 동일기라고 볼 수 있네요. ]

일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엘은 모든 기록을 확인한 듯 나에게 감상을 들려주었다.

"동일기?"

[ 외장은 전혀 다르지만.  안의 정보가 저 기체를 아르베넷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요. ]



엘은 사도를 아르베넷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이상해요. 아르베넷은 마스터의 이 것 하나뿐인데. 어째서 저는 저걸 아르베넷이라고...? ]

엘은 어딘가 혼란스러워했다.



"인식의 겹침... 충돌이 일어난 건가."


엘의 이야기를 듣자 엘이 사도를 만난동안 정지해있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하나만 존재해야  아르베넷의 정보가 두개가 되었으니 인식에 장애를 끼치고 멈춰버리고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같이 이야기하고 행동하더라도.


박사가 '기계천사' 라고 불렀던 것처럼. 결국은 엘도 기계인 것인가.

"...나머지도 천천히 분석해줘. 난 먼저 내릴게."


[ 앗 네 마스터. ]


엘을 조종석 안에 남겨둔 채 나는 먼저 내렸다.

---

아르베넷과 엘을 내버려둔  땅 위로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전투의 여파 탓인지 빌딩의 잔해를 치우는 작업반의 움직임이 분주해보였다.


작업반을 지나쳐 조금 걷기 시작하자 기분이 착잡해졌다.



처음으로 나와 같은 존재인 다른 사도를 만나게 되었지만 사도는 나를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사도를 모른다.


엘조차 모른다.



나는 모르는 것 밖에 없었다.



기분이 가라앉는다.

어두운 아래로 향하는 듯 한 착잡한 감각.


이 세계에 대해서 모든 걸 아는 척 하면서 살아왔지만 모르는 것들뿐이구나.


고개를 들어 폐건물 사이로 저물어가는 태양을 올려보았다.


 태양과 같은 후광을 드리운 채 나타난 사도는.

아무런 빛을 드리우지 못한 아르베넷의. 나의 팔로는 붙잡을 수 없었다.


손에 닿을 수 없는 태양처럼.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나도 멀었다.



"불확정 요소를 하나라도 더 늘리고 싶진 않은데..."


작은 주절임과 함께 약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불확정요소가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데.


공략을 전부 읽고 모든 스포일러를 알고. 재미가 없더라도. 실패는 하고 싶지 않다.


인생은 게임처럼 컨티뉴가 안되니까.

나 같은 실패를 아이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으니...

'묘월아!'

이제는 저물어 태양이 사라져버린 하늘을 올려보며 생각에 빠져있던 도중 나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자. 파란색 파일럿 슈트를 입은  나에게 달려오는 주인공군이 보였다.


"괜찮아? 다친 덴 없어?"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에서 나를 향한 걱정이 비쳐보였다.


아까 자신과 미하일이 배제된 채 싸웠던 전투 때문에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거겠지.




"괜찮아."

이렇게 어린 아이에게 까지 걱정을 끼쳐버렸구나.


 꼴불견이다.

내가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입의 양 끝을 올려 표정을 만든다.

웃는다.


"대단한 상대는 아니었어. 아르베넷도 멀쩡하잖아? 교단일지도 모르겠네."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적당히 허세 섞인 말을 지어낸다.


사도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교단이라고 얼버무리면 되겠지.


저 아이는 교단과 싸워가는 투사니까.

"아. 교단이라고 해도 누구인지 알려줄 수는 없어. 비밀이야."

늘 너에게 이야기 하는 비밀. 알고 있지?

약간 과장된 손짓과 함께 한 손가락을 세워 나의 입술 위에 얹어 보인다.



진실 앞에 눈을 가리우는  비밀을 핑계로 말을 돌렸다.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비밀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진실 앞에서 눈을 가리우기엔 적당한 단어였다.

이 아이는 착한 아이니까. 비밀이라고 하면 언제나 처럼 더 물어보지 않고 여기서 입을 다물어 줄 것이다.




"트레일러 한대가 무너졌대. 오늘 바로 돌아가는  무리겠다. 여기서 하루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어."

화제를 돌려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다.


내가 알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보단 어쩌면 야영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로 방향을 돌렸다.

적당히 화제를 돌리면  이상 걱정하진 않겠지.

언제나처럼. 그냥 알겠다고 해주기만 하면 돼.


"묘월아."

그러나.

주인공군은 나의 이야기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곧바로 해야  말이 있는 것처럼 나의 이름을 불렀다.




"너 정말 괜찮은 거지?"

"괜찮아. 여러  말했잖아."

이렇게 미소를 만들어 웃고 있는데.




"정말. 괜찮은 거지?"


나에게 세 번째 물었다.

"나는 정말 괜찮아."

세 번의 물음을 나는 세  부인한다.


나는 괜찮다.



"그렇지만..."


세 번이나 그렇다고 대답해주었지만.


주인공군의 표정과 말은 어딘가 걱정하는 것처럼.



어른이 아이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어른을 걱정할 필요 없어.

너는 너의 앞만 보고 나아가면 돼.



"..."

이번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평소처럼 그냥 넘어가주면 될 텐데.


"너는..."

주먹이 조금 쥐어진다.


아이는 어른의 말을 따르고  앞에 펼쳐진 길을 나아가면 되는데...



'아하트!'


눈앞의 아이에게 나의  좁은 분노를 드러낼  한 찰나 멀리서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나?"


"뭘 하고 있는 거야! 정비팀에서 계속 찾고 있어!"

멀리서 보이는 붉은 파일럿 슈트를 입은 미하일은 주인공군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르고 있었다.



"아니 아무런 연락도..."


"빨리 와!"

제법 급한 일이 생긴 것인지 미하일은 주인공군을 보채고 있었다.

가장 먼저 땅에 떨어졌던  커스텀 케루브였으니 정비 상의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난 먼저 가볼게."


"응."

잠깐 나의 눈치를 살피던 주인공군은 등을 돌려 미하일이 부르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달리다가.

잠깐 멈춘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곤.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나를 걱정해준 아이에게 화를 낼 뻔 하다니.


나는 아직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



폐건물의  사이로 붉은색과 파란색 파일럿 슈트를 입은 소녀와 소년이 걷고 있었다.



"정비팀이 급하게 부른다며? 이쪽 길이 아니지 않아?"

"..."

푸른 소년은 먼저 걸어가는 붉은 소녀를 불렀지만. 소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소년의 부름에도 멈추거나 되돌아보지 않던 소녀는 조금 더 걷다가 하얀 슈트의 소녀가 있던 곳에서 한참 멀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발을 멈췄다.



"...너 마마한테 뭘 하고 있던 거야."


붉은 소녀는 푸른 소년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붉은 소녀의 표정은 약간의 의심과 짜증이 있었지만. 눈앞의 푸른 소년.

동료에 대한 신의가 남아있는 듯 의심과 짜증에서 그칠 뿐 불쾌로 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내가? 묘월이한테?"


어딘가 어설퍼보이지만 어른이 되려는 듯한 모양새가 남아있는 듯한 검은 안경테를 걸친 푸른 소년은 붉은 소녀의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질문을 의문으로 답할 뿐이었다.



"난 그냥 괜찮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정말 그게 다야?"

"응."

소녀는 잠깐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쉰 뒤 안도한 듯 표정을 바꿨다.

"너 같은 애가 마마한테 뭘 했을 리가 없겠지..."

"그래...?"

소년은 어딘가 안도한   소녀의 표정에 긴장이 조금 풀린  말끝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대로 마마와 너를 조금만 더 내버려뒀으면. 싸웠을지도 몰라."

"내가? 묘월이랑?"

"자꾸 질문으로 대답하지 마... 마마의 그런 표정 처음 봤어. 조금만  건드렸으면 크게 화를 냈을지도 몰라."

소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금색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자신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막았다는 것에 대한 자기만족과 안도를 나타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눈치를 봐오며 자란 소녀는. 어른의 감정을 읽는 데 익숙했던 것이리라.

어른 앞에서는 그저 아이처럼. 말을 잘 듣고 원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


"...고마워."


"둔감한 녀석. 나한테 빚 하나 진거야 아하트."

소녀는 주먹을 내밀어 두꺼운 파일럿 슈트 위로 소년의 어깨 위를 툭 쳤다.

소년과 소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기 보단 소년과 소년의. 어딘가 남자아이들 끼리 내비칠 것 같은 손짓이었다.


"널 불러낸 용건은 이게 끝이야. 다시 가봐. 잠깐은 마마를 혼자 있게 해주자."


소녀는 하얀 소녀와 소년을  자리에서 잠깐 분리해내는게 목적이었던  자신이 있어야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잠깐만 미하일.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떤 거야?"

돌아가던 소녀는 잠깐 발을 멈춰 소년을 돌아보고 물었다.




"그... 여자애의 화를 풀리게 해주려면 뭘 해주는  좋을까?"

"그걸 똑같은 여자인 나한테 묻는 거야?"


소녀는 소년을 조금 한심하다는 듯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응. 지금 내가 물어볼 상대는 너 밖에 없으니까."


"나 밖에 없다... 내가 의지가 된 거네!"


소녀는 눈앞의 소년이 자신을 의지하는.


소년보다 자기가 위에 섰다는 느낌에 밝은 미소와 자신감이 얼굴에 비쳤다.



"응. 지금은  조언이 필요해 미하일."

"이번만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꽃이라도 가져보가는게 어때?"


"꽃?"


"어릴 때. 선생님에게 꽃을 선물해드리면 늘 좋아하셨어. 마마도 좋아하지 않을까?"



소녀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의 스승에게 꽃을 꺾어 선물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선생님과 하얀 소녀였으니 아마 하얀 소녀도 꽃을 좋아하지 않을까.



"꽃... 그래 그게 좋겠네. 고마워."

소년은 소녀의 조언을 듣고 자기가 풀던 문제의 해답을 발견한 것처럼 밝게 웃었다.




"..."


소녀는 잠깐 소년의 미소를 응시했다.



"...미하일?"

"아하트.  바보냐?"


"어? 왜? 갑자기."



소년은 자신을 어딘가 비난하는 소녀의 물음에 의아해했다.

"그런 미소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나 보여주는 거야."

"좋아하는 여자?"

"그래. 나한테 보여줘봐야 아무 소용없어!"




- 퍽!


"악!"


소녀는 조금 웃은 채 주먹을 모아 쥐어서 소년의 어깨 위를 내질러 쳐냈다.


이번엔 아까 전의 것과는 다르게 힘이 실린  슈트 위로 묵직한 소리가 났다.




"조금은 여자의 마음을 배워봐. 바보야."

금발의 소녀는 자기 어깨 위를 한 손으로 감싸 쥔 소년을 뒤로  채 돌아가 버렸다.




소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자신과는 다른.

어딘가 신비한 인상을 가진 하얀 순백의 소녀는.


완벽한 자신으로썬 위로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얼빠진 것처럼 어설픈 저 소년은.

하얀 소녀를 위로해줄  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소년이 이루어주면 된다.


이제는 기억을 더듬어 볼 수도 없는 어머니와 닮은 하얀 소녀가 위로받을 수 있다면.


붉은 소녀는 한발 뒤로 물러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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