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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화 〉라파 베레시트 (133/152)



〈 133화 〉라파 베레시트


트레일러 두 대가 망가진 덕분에 기지로 귀환하진 못했고 무너진 도시의 외곽에서 야영을 했다.


야영이라고 해봐야 애들은 멀쩡한  안에서 재우고.


나는 밤새 경계를 섰다.

정비원이나 기타 인력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경계를 설 필요는 없었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아르베넷의 안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렇게 밤을 새버린다면 머리가 부스스해지거나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거나, 어딘가 세상의 더러움이 남을  한데.

아르베넷의 안은 시간을 되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언제나 말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밤을 새웠다면 피곤을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피로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피로 역시 뇌물질의 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으니까 피로조차 정화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르베넷은 언제나 완벽한 상태로 나를 유지시켜준다.

 이상 어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애와 어른의 경계선에 서있는 나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재 상태만 아슬아슬하게 유지시켜주는 그 기로에 나를 머물러 둘 뿐이었다.



어제 주인공군과 조금 다툴 뻔 했지만 미하일이 주인공군을 데려간 뒤로 다시 만나보진 못했다.

내가 저녁식사 자리에 참여했다면 얼굴 정도야 볼 수 있었겠지만 왠지 만나기 불편한 느낌이 들어서 내가 먼저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어제 다시 만났더라면  같은 대화가 반복되고 나도 모르게 화를 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어제는 미하일 덕분에 화를 내는 것을 피할 수 있었지만.

만약 오늘 다시 얼굴을 보게 된다면 또 다시 화를 내게 되어 버리지 않을까.

나도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른인 척 재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웃기지도 않는 화를 내게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안에서 내리지 않고 그저 싸움만 반복하는 게 모두를 가장 쉽게 도울  있는 방법이 아닐까?




- 삑 삑

또 치졸한 망상에 빠져가던 무렵. 6시를 알리는 알림이 계기판 위로 울렸다.

어느덧 밤은 끝나가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새벽까지 별 일은 없었다.

만약. 이제는 어제가 되어버린. 백색의 사도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 때는 대화조차 응하지 않고 한 번에 조종석을 노려 격추 시킬 생각이었다.



그 안에 어린아이가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망설임조차 생기지 않았다.



사도 속의 어린아이는 나의 아이들을 노렸다.

 행위 자체만으로 나에겐 그 사도는 적으로 자리 잡았다.




 안에 있는 것은 현재를 위협하는 불확정 요소일 뿐 나의 아이가 아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생아.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나의 아이들뿐이지.

출처조차 모르는 사생아가 아니다.




나는 남의 아이까지 돌봐줄 정도로 어른은 되지 못했다.


피로는 쌓이지 않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해도 떠올랐으니 조금은 눈을 붙여볼까.




흐뜨려져 가는 정신을 쉬게 해주기 위해.


나는 무릎을 안은 채 눈을 감아.


잠깐의 잠 속에 빠져 들어갔다.


---


"분명 여기쯤일 텐데..."

하얀 소녀가 잠에 든 무렵. 푸른 소년은 파일럿 슈트만을 걸친 채 무너진 시가지의 사이를 걷고 있었다.

소년이 향하고 있는 곳은 어제의 전투기록을 복기하면서 확인한 장소였다.

폐건물 사이로 무너진 콘크리트의 잔해 속을 해쳐나가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소년이 향하는 장소는 야영지에서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다.

걸어가기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장비 테스트를 위해 임시로 발급받은 커스텀 케루브를 타고 갔더라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소년이 그 곳을 가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 그런 일에 기지의 자산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소년은 목적지까지 걷고 있었다.



소년의 동료인 붉은 소녀가 들었다면 고리타분한 놈이라고 한 소리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소년의 마음속에선 그런 행위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목적지까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다녀오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기 때문인 걸까.




"후우..."

소년은 파일럿 슈트의 허벅지 옆에 메어 둔 군용 단검이 잘 고정되어있는지  번 더 확인하곤 길을 걸었다.

본래 용도는 기체에서 비상탈출을 했을 때 어딘가 배선에 몸이 묶이거나, 혹은 조난이  경우를 대비해 마련 된 장비였지만.


소년이 지금 폐건물을 지나 시가지로 가고 있는 목적엔 부합한 물건이었다.

어제 붉은 소녀가 자신에게 조언 해주었던 것.

하얀 소녀에게 꽃이라도 가져다준다면 어떻겠냐는 말을 듣고 소년은 꽃이 있을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밤새도록 어제의 전투기록을 복기하며 찾아봤었다.

전투기록과 훈련기록을 대조한 결과 멀지 않은 곳에 꽃이 피어있는 장소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야영지에서 이십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장소에 있었으니. 잠깐 아침운동을 핑계로 자리를 비우기엔 적합한 거리였다.

그렇게 걸어나온  십오 분이 지났을 무렵. 무너진 시가지의 위를 올려보자 무너져나가는 건물 사이로 사람이 살던 흔적이 드문드문 보였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 까진 예전 도심의 중심이었던  한 커다란 건물의 잔해와, 곧곧이 깨지긴 했지만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도로가 일자로  뻗어있었다.

아스팔트가 깨진  사이로 잡스러운 풀이 자라 무릎 근처까지 올라오기도 했지만. 두꺼운 파일럿 슈트 덕분에 귀찮은 쓸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온 길에서 어떤 건물은 어제 자신의 조작 실수와 전투의 여파로 흔적이 제법 남아있었다.


소속을  수 없었던 기체.

임시 코드 '언노운'이 남겼던 장갑판  장은 회수된 듯 건물의 옆에는 뻥 뚫린 자리만 남아 있었다.



결국  기체는 뭐였던 것일까.


대체 무슨 기체였기에 하얀 소녀의 마음이 그렇게 크게 흔들렸던 것일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슈트의 손목 위를 누르자 손목 위로 푸른빛을 띄는 홀로그램 지도가 나타났다.

홀로그램 지도는 대략적인 목적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건물의 틈만 지나 조금만 더 걸아 간다면 소년이 향하던  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소년이 건물의 틈을 빠져나오자.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피어오른 하얀 꽃들이 보였다.


그러나.


소년과 꽃의 틈 사이에는.


어제 밤에 무너져 버린 듯 지반이 침하되어 있었다.




소년의 눈앞에 목적지가 있었지만.

  없었다.



---




"낭패네..."


소년의 입에서 조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제 전투가 거칠긴 했지만 설마 하루사이에 길이 무너져 내렸을 줄은.



꽃이 바로 십 미터도  되는 거리에 자라고 있었지만.


바로  앞에는 족히 오 미터는 넘을 듯한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은 탓에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지만 설마 하루 만에 길이 무너졌을 줄은.

다른 곳에는 더 많은 잔해가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구덩이를 지나가지 않으면 저 너머로  수는 없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을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가짐엔 어긋나지만 기체를 가져와서 쉽게 건너 가버릴까.



- ♪



소년이 고민하는 사이.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왔다.

현악기를 켜는 듯 한 소리.




"바이올린...?"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바이올린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곳에 사람이?"


심각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오염도가 있어서 사람이 살기 적당한 곳은 아니라고 했는데.

만약 이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어야 한다.



소년은 잠깐의 고민을 내려놓고.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기 위해 달렸다.



- ♬


소년이 달리는 동안.


어딘가 슬픈 음색을 띄는 현을 켜는 소리는. 소년이 달려갈 때 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지나가는 길에 멀리서 지나쳤던 광장.

 곳에서 확실히 음색이 들리고 있었다.



...

"헉...헉..."

무거운 파일럿 슈트를 입고 달렸기 때문인 건지 소년의 입에선 거친 숨이 내쉬어졌다.

소년은 파일럿이  뒤로 체력을 늘리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했지만 아직 십대인 소년에겐 파일럿 슈트의 무게는 버거웠으리라.




이마에 작게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소년은 다시   마음가짐을 다졌다.

얼른 한 사람 몫을 해내기 위해.

그 소녀를 돕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조금 숨을 가라앉힌 뒤 광장을 향해 걸어 나가자.



- ♩



광장 한 가운데 무너져 내린 분수대의 위에서 음색이 들려왔다.

무너진 분수대 위에 서있는 것은 낡은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소녀.


검은 단화와 하얀 스타킹. 그 위에는 스타킹과 대비되는 검정색의 플레어스커트.

다시 위로 백색의 블라우스와 허리를 잡아주는 검정의 코르셋 조끼와 리본  타이.



안개가 조금 깔린 광장의 분수대 위에서 소녀는 두 눈을 감은 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소년은 잠시 소녀의 모습을 보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의 머리는.


소년의 곁에 있어주었던 하얀 소녀처럼. 은백색의 머리색을 띄고 있었다.



- ♬



소년이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는 동안.


소녀는 연주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바이올린을 켰다.



자기가 섣불리 말을 걸었다가 이 연주를 망치게 될까봐 그런 것일까.


소년은 자신이  곳에 달려온 이유를 잠깐 잊은 채.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끼이이...



잠시  음이 멎고. 소녀는 바이올린의 활을 내려놓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소녀의 눈은 소년의 예상처럼 붉었다.




지금 자신의 눈처럼.




-  짝

눈을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어색하게 박수를 쳤다.

"박수를 바라고 연주한  아니에요."


소녀는 분수대 위에서 소년을 내려 보며 짧은 말을 던졌다.


"연주는 잘 들었어...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혼자 다니긴 위험한 장소일텐데..."


소년은 연주에 대한 칭찬과 함께 눈앞의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분명 이 곳은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된 곳일 텐데 어떻게 이 곳 까지 온걸까.  근처에는 사람이 사는 곳은 전혀 없을 텐데.


어떻게 자기보다 어려보이는 어린아이가 여기까지 온 것일까.

"위험한 곳을 지나가게 되더라도. 두렵지 않아요."


"응?"


"아버지께서 지켜주시고 있으니까요."

"아버지...? 보호자가 있다는 거니?"

소년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눈앞의 소녀의 복장은 깔끔했다.



만약 이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면 저렇게 깔끔한 복장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


소녀의 말처럼 어딘가에 보호자가 있다는 것이리라. 몰래 경치를 보기 위해 들어온 민간인 정도 되는 것이겠지.

"그렇구나... 아무튼 여긴 위험한 곳이니까 얼른 돌아가렴."


"비슷해요. 연주가 끝나는 대로 돌아갈 예정이었어요. 다시 올 생각도 없어요."


소녀는 정말 연주를 하기 위해 이 곳에 있었던 것인 듯 바이올린을 케이스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건가요?"

"연주 소리가 들리 길래 혹시 민간인이 있을까봐  거였는데..."

"군인이에요? 군인처럼 보이진 않는데?"

"군인은 아니야."


소년이 입은 파일럿 슈트는 분명 군용품이긴 했지만. 아직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은 군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를 찾아오기 전에 다른 목적이 있던  아닌가요?"


"꽃을 찾으러..."

"꽃?"


소년의 대답에 소녀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걸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하려고 하거든... 이 주변에 있지 않을까 해서."

"여자에게 말인가요?"


"어? 응."


"좋겠네요.  여자는."

소녀는 소년의 대답을 듣고 조금 미소를 지었다.

"좋아하겠지...? 그런데 하나도 찾질 못해서..."

소년은 눈앞의 어린 소녀를 처음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오래 알고 지내기라도 했던 것처럼 친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소녀와.


꽃을 가져다주려는 소녀와 닮았기 때문인 걸까.


"꽃이라면 바로 이 근처에도 있어요."

"이 근처에?"

"바로 여기에. 제가 연주하던 곳 뒤쪽이에요."

소녀가 손을 가리킨 곳.

소녀가 서있던 분수대의 뒤쪽에는 전부 따간다면 한 아름은 될법한 꽃이 피어있었다.



"정말이네...  못본거지?"

"너무 멀리 있는 것만 보다보면. 주변에 있는 것들을 놓칠지 몰라요. 지금 이 백합화 처럼요."


"그렇구나...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소년은 소녀가 가르쳐준 분수대의 뒤로 향한 뒤 꽃을 꺾기 위해 단검을 꺼냈다.

소년의 발아래에는 여러 가지 색의 꽃이 피어있었다.

"...전부 가져가면 되는 걸까?"


"흰색을  가득 꺾어 가세요."

"흰색?"


"네. 흰색을 한가득."

어린 소녀는 소년이 꽃을 가져가는 것을 도와주려는 듯 무릎을 굽혀 몸을 숙인 뒤 소년이 꽃을 고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지막으로 이 무리에 저 꽃을 하나."



소녀는 손끝으로 하얀 꽃무리의 구석에 홀로 피어있는 붉은 색의 꽃을 가리켰다.

"조금 안 어울리지 않을까? 흰색 바탕에 붉은색 하나라니."

"당신이 꽃을 가져다주려는 하얀 소녀는.  꽃을 분명 좋아 할거에요."

"그래?"



소년은 구석에  붉은 꽃의 줄기를 잘라내어 조심스럽게 손에 들고 있던 꽃 아름에 같이 꽂아 넣었다.



그 때 소년에게 작은 위화감이 들었다.


어떻게 내 뒤에 있는 소녀는.

내가 꽃을 가져다주려는 소녀가 하얗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



작은 위화감이 생겨 등 뒤를 돌아보자.

그 자리엔 소녀가 없었다.



처음부터 소년 혼자만 있었던 것처럼.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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