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6 그리고 7
뒤늦게 출격한 미하일의 베레시트 2호기는 예전과는 형상이 조금 달랐다.
등과 척추 전체를 지탱하는 듯 한 역C자형의 골조 '브니엘의 등'이 추가되어 있었고. 맨 윗단부터 아랫단까지 세 단의 거대한 연료탱크가,
마지막으로 거대한 대형 병장인 '골야트의 팔'을 양 팔에 장비하고 있었다.
과연 저 장비라면 출격까지 시간이 걸린 것도 이해가 간다.
미하일의 판단인지. 지휘부의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유효한 장비를 착용하고 온 샘이다.
< 약해. >
골야트의 팔을 장비한 2호기의 거대한 손에서 '천사'였던 것의 부스러기가 떨어져내렸다.
< 뭐 뭐야. 너 어떻게 인간이 천사를 한방에... >
사도도 일격에 천사가 해치워진 것에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인간? 너는 인간이 아니야? >
2호기는 다음 상대를 노리듯 공중에서 몸을 돌려 사도를 노리고 있었다.
< 그래. 난 너희 인간들과 달라! 아버지가 대충 흙으로 빚어 던진 너희와는 다르게. 신성이 담긴 몸이야! >
사도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운 듯 했다.
아까부터 언급되는 [아버지]는 대체 누구일까.
이 세상을 만든 사람이라면 단 한사람 밖에 없을 텐데. 나와 상의없이 저런걸 만들었을 줄이야.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저 녀석도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사도의 등 뒤를 지키고 있던 천사가 아르베넷을 노려 발포했다.
쳇. 빈틈을 타서 라자루스를 재장전하고 있었는데.
재장전 할 시간은 충분히 벌긴 했다.
- 파직...
활동을 멈춘 포탑에서 뜯어낸 코어를 억지로 쑤셔 넣은 영향인지 아니면 저 사도의 영향 때문인 건지 출력은 조금 불안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합류한 2호기와 함께라면 2:2로 충분히 싸워볼만한 상황이다.
"미하일. 저 차원수를 부탁해."
< 맡겨줘. >
라자루스의 상단부를 쥔 채 사도를 향해 얼마 남지 않은 시모닉스 유닛의 가동시간을 확인하고 달려들었다.
< 소용없어! 그런 느려터진 사격은 이제 안 맞아! >
사도는 지원군인 천사가 2호기에게 마킹되자 나를 의식하기 시작한 듯 아까보다도 더 장갑판이 촘촘하게 움직였다.
촘촘하게 움직이는 장갑판의 틈사이로 사격을 성공시키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 철컥!
이번에는 사격이 아니다.
라자루스의 손잡이를 꺾어들자 손잡이의 연결부가 수직으로 고정되었다.
형태가 일자로 바뀌자 총신이 있는 부위에서 백색의 타오르는 광선이 솟아올랐다.
개량된 라자루스의 두 번째 모드.
광검.
- 파스스...!
불안정한 출력이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라자루스를 휘둘러내자 가장 앞을 막고 있던 장갑판이 썰렸다.
< 아앗! 반칙이잖아! >
창을 꺼내 상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창처럼 좁은 면적을 노리기보단 넓게 베는 쪽이라면 이쪽이 더 편하다.
하얗지만 강렬하게 타오르는 빛의 검을 쥔 채 사도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
'최종 점검완료! 기동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기지의 외곽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동안. 제 1 격납고에서는 라파 베레시트의 출격준비가 바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원래 예정대로였다면 조금 더 정비와 가동테스트를 거쳐야했지만. 지금은 하나하나의 전투력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기지의 방어 시스템이 다운 된 지금은 활약할 수 있는 기체가 하나라도 더 있는게 중요했다.
세라프나 케루브 같은 양산기의 경우는 가동을 해도 곧바로 멈춰버렸기 때문에 1호기와 2호기 그리고 아르베넷이 현 시점에서 운용 가능한 기체였다.
'출격 준비 부탁드립니다!'
바뀐 건 1호기의 외관만이 아닌 듯. 1호기 앞에 선 소년의 파일럿 슈트도 형상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이전보다 투박함은 줄어들었지만 훨씬 더 강하고 안정적인 소재로 바뀐 신형 파일럿 슈트를 입은 소년이 조종석에 탑승했다.
"이게 새로운 1호기..."
익숙한 느낌이 드는 조종석이었지만. 어딘가 다른 느낌이 드는 1호기의 조종석이었다.
소년은 양 손에 조종간을 쥐고 정신을 집중했다.
새로운 몸에 옮겨진 코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파일럿의 초기 세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 위이잉...
집중과 함께 코어의 가동이 시작하자 조종석의 안에서 서서히 코어가 도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기동 시작했습니다! 임계점까지 앞으로 30!'
소년은 한시라도 빨리 전장으로 나서야한다.
'20!'
하나인 줄 알았던 적이 셋에서 넷으로 늘어나고 있는 동안.
'10!'
소녀 둘이 전장에 나가있는데. 소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5!'
새로워진 1호기라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기동 부탁드립니다!'
소년은 싸워나가야만 한다.
"1호기 기동하겠습니다!"
소년의 외침과 함께 모든 스태프가 코어의 기동이 정상권에 들어가기 직전인 것을 확인하고 뒤로 물러났으나.
- 기이잉...
1호기의 코어는 모두의 기대를 배신하듯 움직임을 멈췄다.
소년은 싸울 수 없었다.
---
- ...
2호기는 눈이 없는 기이한 것. '천사'라 불리는 것과 싸우고 있었다.
< 으으읏...! >
브니엘의 등 뒤로 거대한 연료탱크와 무장을 짊어진 2호기는 움직임이 무거웠다.
무거워진 움직임은 파일럿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 미하일은 조금 힘든 듯 한 목소리를 내었다.
< 으랴앗! >
천사의 변모된 오른팔. 대검을 팔을 올려 겨우 받아내고 있는 2호기는 천사의 배를 걷어 차내었다.
- 후욱!
그 후 브니엘의 등 옆에 달린 서브암 유닛이 견착되어있던 특대검을 2호기의 오른손에 쥐어주었다.
- 서걱!
특대검을 쥔 2호기는 곧바로 천사를 노려 달려든 뒤. 천사의 오른팔을 한 번의 일격만으로 썰어 내버렸다.
땅에 떨어진 천사의 팔은 다른 차원수처럼 시체를 남기지도 않고.
모래처럼. 혹은 소금처럼 흩어지듯 천천히 바스러져 형태를 잃었다.
< 뭐야 저 녀석!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
천사가 밀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 사도는 크게 당황한 것 같았다.
"정신 팔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라자루스의 광검을 휘둘러 사도를 다시 노리려고 하자.
- 카앙! 깡!
장갑판들은 무슨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검날에 닿는 것을 피한 채 라자루스의 몸체나 아르베넷의 팔을 때렸다.
"날벌레 같은 것들이... 성가셔!"
사도는 네 장으로 줄어든 장갑판에게 보호받듯 아르베넷과 직접 싸우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 꼴이 어른 뒤에 숨은 어린애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역시 저 녀석은.
사도는.
마음에 들지 않아.
- 삐!
시모닉스 유닛의 남은 제어시간은 이제 20초.
더 이상 시간을 끈다면 저 녀석은 또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장갑판을 모두 치워버린다면 1호기나 2호기에게 추격을 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갑판이 남아있는 상태에선 안 된다.
- 슈우우...
시모닉스 유닛의 코어가 아르베넷을 지탱하기 힘든 듯 점점 아르베넷의 몸이 땅으로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사도의 장갑판을 무력시킬 방법.
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으나 과연 그 방법이 통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해볼 수밖에 없다.
- 슈우우... 철컥!
라자루스의 광검을 꺼버린 뒤 앞에 달린 광검 모듈을 분리했다.
- 지직... 직
라자루스에서 분리된 모듈은 출력이 불안정해진 듯 파지직 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이대로라면 오래 기동시킬 수는 없겠지만. 단 5초만이라도 움직여준다면 할 수 있다.
- 후우욱!
광검 모듈을 켠 채 사도를 향해 던지자 하얗게 타들어가는 빛의 검이 공중을 돌았다.
< 자포자기 한거냐? >
사도는 장갑판 뒤에 숨어 그 행위를 비웃었지만.
- 위이잉...!
아르베넷의 바이저가 내려가고.
오른 손등위의 커버에 박힌 수정에서 붉은 광선이 쏘아졌다.
< 빗나갔네! >
사도를 맞추지 못하고 붉은 광선은 멀리 떨어진 곳에 쏘아졌지만.
내가 노린 것은 사도나 장갑판이 아니었다.
- 파샤샤샤샤!
노린 것은 라자루스의 광검모듈.
공중에서 매섭게 도는 하얗게 타들어가는 빛의 날은 붉은 광선을 난반사하듯 쳐내었다.
쳐내진 붉은 광선은 확산되어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고 전장에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졌다.
- 콰아아아!
바닥 아래의 활주로가 절단되고.
활동을 멈춘 포탑의 포신도 잘려나갔다.
- 서걱!
그리고 사도의 장갑판도 잘려졌다.
< 너 너 미쳤어?! >
가장 앞을 막고 있던 장갑판 중 두개가 사선으로 썰려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남은 장갑판은 두 장 뿐...
- 삐이이...
시모닉스 유닛은 움직임을 멈추고 아르베넷은 점점 땅 아래로 내려앉았다.
---
"미하일. 시모닉스 유닛의 남은 시간은?"
< 앞으로 2분 정도야... >
다섯 장의 장갑판 중 세 장을 잃고 두 장만 남자 사도는 점점 더 방어적으로 변했다.
이따금씩 도망치려는 듯 했지만 미하일의 추격과 나의 사격에 의해 도망칠 수도 없었다.
< 너희들 정말 끈질겨! >
< 하아아아!>
- 카앙! 캉!
2호기가 들고 있던 특대검이 사도의 장갑판에 강하게 맞부딪쳤다.
천사를 한방에 썰어낸 특대검도 장갑판을 썰어낼 수는 없는 듯 마찰로 인한 불꽃이 흩뿌려졌다.
- 투칵! 쾅!
오른팔로 특대검을 휘두르는 사이 다른 한 장의 장갑판은 2호기가 장비한 골야트의 팔의 왼쪽 유닛을 파괴했다.
< 쳇! >
쓸 수 없게 된 골야트의 팔 왼쪽 유닛을 퍼지 한 2호기는 언밸런스한 길이의 양 팔로 특대검을 쥔 채 날아들어오는 장갑판을 반복해서 쳐냈다.
- 슈우우! 까드득...
결국 두 장의 장갑판이 2호기를 찌부러뜨리려는 것처럼 앞과 뒤에서 눌러대기 시작했다.
< 카나프 한 장 이기지 못하는 인간주제에! >
- 드드득... 득
저번 테스트 때처럼 2호기의 힘만으로는 장갑판을 밀쳐낼 수 없었다.
그 순간.
- 콰아아아아...!
브니엘의 등에 달린 연료탱크 3개가 강렬하게 점화했다.
< 뭣?! >
- 파앙!
2호기는 순식간에 3배로 늘어난 추진력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장갑판을 밀치고.
- 콰앙!
왼팔로 사도의 얼굴을 가격하는데 성공했다.
- 파샤아...!
2호기가 사도에게 한방 먹인 것과 동시에 라자루스의 잔탄을 전부 쏘아서 두 장의 장갑판을 밀쳐냈다.
< 너... 감히... 아버지가 주신 엘 이다밀의 얼굴을... 때린 거야...? >
처음으로 근접타를 얻어맞게 된 사도의 안에서 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 아버지가... 빚어주신 이 얼굴을... >
목소리는 분함에서.
점점 분노로 뒤바뀌어갔다.
2호기는 연료탱크 안의 연료를 전부 태워 최고 추진력으로 사도를 밀치고 있었지만.
< 이 녀석... >
- 콰아아아아...!
< 맞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아...! >
사도는 공중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도는 얼굴에 주먹을 맞은 채 버티고 있었다.
공중에 버티고 있던 사도는 오른 팔을 들어올려.
- 콰드득!
자신의 얼굴을 밀치고 있는 2호기의 왼팔을 나뭇가지를 꺾듯. 가볍게 꺾어 내버렸다.
< 꺄아악! >
2호기의 왼팔을 꺾는 것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집어던지듯 2호기의 몸이 공중에서 크게 돌아버렸다.
< 너 만큼은... 절대로 용서 못해! >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사도의 전력은 주변을 날아다니는 장갑판이 전부가 아니었다.
- 콰아아아...!
사도의 주먹에 단 한방 얻어맞은 2호기는 달고 있던 골야트의 팔과 브니엘의 등이 부서진 채 땅으로 떨어져내렸다.
저 기체 역시 아르베넷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 쌔애애액...!
사도의 머리 위 고리가 밝게 빛나며 사도의 등 뒤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그 안에서 열은 족히 넘는 [천사]들이 아르베넷과 2호기를 향해 다가왔다.
---
'게이트 추가 발생 확인!'
'신형 차원수도 다수 관측되었습니다!'
"큭..."
조종석에 앉은 소년은 분한 표정을 지으며 조종패널을 내리쳤다.
모니터 위로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2호기와 아르베넷이 언노운과 차원수에게 점점 밀려가는 게 보였다.
2호기는 왼팔을 잃은 채 라이플을 들고 차원수 두 마리와 겨우겨우 싸우고 있었고.
아르베넷은 언노운과 나머지 차원수들을 상대로 홀로 싸우고 있었다.
언노운의 떨어진 장갑판을 방패삼아 든 채 창을 들어 싸우고 있는 아르베넷의 모습은 용맹한 기사와도 같아 보였지만.
동시에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기사와도 같이 보였다.
'라파 베레시트 제 12차 기동 실패!'
'다시 한 번 003C 단계부터 시작해봐!'
- 위이잉...
정비요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과는 다르게.
격납고에 묶인 회색의 거인은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제 1 격납고에 알립니다! 신형 차원수 몇 마리가 그 쪽을 향해... 지직...'
'지지직...'
기지 외부 방송망과 연결되어있던 스피커가 끊겼다.
'전 정비원 후퇴! 적습이다!'
가장 먼저 정비원들에게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1호기는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얼른 내려! 도망쳐라!'
나이가 제법 있는 선임 정비원은 1호기 안에 남아있는 소년에게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먼저 가세요! 제가 다시 한 번 기동해볼게요!"
'난 분명히 말했다!'
차원수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알리는 경보가 점점 크게 울리자 더 이상 파일럿을 설득하는 것을 무리라고 느꼈는지 정비원들은 지하 비상통로를 향해 달렸다.
'정말로 두고 간다!'
선임 정비원은 마지막까지 소년 파일럿을 설득했지만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한 듯 통로 입구에서 한번 소리를 더 치곤 문을 닫았다.
소년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아니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도망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콰아아!
모두가 대피한 격납고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 ...
눈이 없는 새하얀 그것들은 날개를 접은 채 격납고에 묶여있는 1호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회색빛을 띄는 1호기에게서 기이함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리는 것 같은 행위를 취하고 있었지만.
그 행위는 단순한 호기심에 그친 듯. 오른 팔을 변화시켜 라이플로 바꾸었다.
- 기이잉...
라이플로 변화한 새하얀 것들의 손에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묘월이와의 약속. 지켜야 하는데..."
1호기의 조종석에 앉은 소년은 다시 한 번 가동 시퀀스를 작동시키며 조종간을 꽉 붙잡았다.
소년이 움직일 수만 있다면.
이번엔 소년이 소녀를 지켜줄 수 있을 텐데.
- 콰아...!
"이번엔 내가 지켜줘야 했는데...!"
1호기를 향해 붉은 광선이 쏘아지는 것을 보며 소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1호기의 조종석을 향해 붉은 광선이 세 개가 쏘아진 순간.
[ 정말로 지켜줄거야? ]
소년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소년이 항상 듣던 목소리.
소년이 지켜주려던 소녀의 목소리가 소년의 머릿속을 울렸다.
아니. 이 목소리는 그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다.
소년이 눈을 뜨자.
세계는 회색빛으로 물들어있었다.
1호기를 향해 날아오던 광선은 그 자리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멈춰 있었다.
"이건...?"
[ 잠깐 세계를 멈췄어. ]
목소리의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에메트..."
[ 기억하고 있었구나. 나의 이름. ]
그 목소리는 어딘가 웃고 있었다.
꿈과 현실이 모호해지는 경계선. 드림랜드에서 소년이 만난 소녀의 또 다른 모습.
자신을 시작이자 끝. 곧 진리라 말한 소녀의 목소리였다.
"여기에 있는 거야?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소년은 멈춰진 시간 속에서 주변을 열심히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검은 머리의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야. 저 아이들의 [아버지] 처럼. ]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어... 얼른 1호기를 움직여 묘월이를 구하러 가야해..."
멈춰진 것은 적들뿐만이 아닌듯.
소년이 손을 움직여도 조종간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소년의 의식 뿐. 몸은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 또 다른 '나'를 구하러 가는 거구나.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영원히 둘 만 남아도 상관없는데. ]
"그럴 수는 없어..."
소녀의 목소리는 자신과 함께 남아달라고 권하는 것 같았지만.
소년은 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
"미안해..."
소년은 저번 꿈 속 처럼.
검은 머리 소녀가 아닌 하얀 머리의 소녀의 곁을 택했다.
"미안하지만 도와줘..."
염치도 없이. 소년은 자신이 거절한 소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 너의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없는걸 알고 있잖아... ]
- 기이잉...
멈춰있던 시간 속에서.
1호기의 코어가 돌기 시작했다.
- 60%
모니터에 표시되는 코어의 색상은 점점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 80%
검게 물든 코어는 점점 빠르게 돌기 시작하면서 가동 임계점인 80%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1호기가... 움직여."
[ 코어에 묶여있는 영혼을. 너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게 해준 것뿐이야. ]
멈춰있던 세계 속에서 소년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100%
- 113%
마침내 코어는 100%를 넘어 113%의 수치에 도달했다.
[ 혼자서 싸우고 있는 또 다른 '나'를 구해줘. ]
소년은 조종간을 강하게 당겼다.
[ ARON HABRIT :: OPEN ]
- 파아아아아...!
1호기의 팔과 다리. 그리고 등의 장갑판이 열리며 펼쳐졌다.
열린 장갑판의 틈 사이에서 푸른빛의 입자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멈춰있던 세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나'와 '우리'의 기사님. ]
라파 베레시트는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