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6 그리고 7
아론 마흐타. 제사장의 도구...
사도는 지면에서 뽑아낸 백색의 검을 그렇게 불렀다.
사도의 발아래에 있던 작은 게이트가 닫히며 뽑아진 검은 무척이나 거대했으며 주변을 녹여내는 듯 한 일렁이는 열기를 뿜고 있었다.
거대한 검 날의 가운데는 구멍이 뚫려 비어있었지만 아르베넷의 모니터에 표시된 열감지에선 빈 부분에서 엄청난 열기가 나오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저 검은 보통의 무기가 아니다. 여태까지 상대하던 장갑판과는 다르게 정말 위험한 무기일지도 모른다.
- 후욱!
거대한 검이 한번 허공에서 휘둘러지자 검의 궤적이 지나간 곳이 신기루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윽..."
검이 휘둘러져 일렁이는 풍경을 바라보자 연속된 전투의 피로 탓인 듯 시야가 조금 흔들렸다.
장시간의 전투를 지속한 폐해가 뒤늦게 나타나고 있었다.
아르베넷은 무적의 기체일지 몰라도 그 안의 나는 무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체를 떼어놓고 보면 그저 작은 여자아이의 몸일 뿐... 몸이 작은 만큼 피로가 몸에 금방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 피로를 적에게도. 미하일이나 주혁이게도 밝힐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어른인 채 있어야 한다.
아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 과연 그걸로 괜찮은 걸까.
숨을 한번 삼키고.
"수고했어. 미하일. 이제 나와 1호기에게 맡기고... 후방 지원을 부탁해."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미하일에게 부탁했다.
한쪽 팔을 잃은 채 다리가 으스러져가는 2호기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히려 억지로 전투를 지속하다가 만약 인질로 잡힌다면 그 때는 더 골치가 아파질지도 모른다.
< 아직 싸울 수 있는데... >
"...부탁할게."
두 번째 부탁.
미하일은 착한 아이니까.
< ...알았어! >
미하일은 나의 지시를 수긍한 듯 2호기를 이끌어 전선에서 한발자국 물러났다.
아마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지시였다면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창을 다시 한 번 쥐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아르베넷을 땅에서 일으켰다.
< 묘월아 너도... 지원으로 빠지는 게 어떨까? >
통신망에서 주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망설임이 담긴 목소리.
아마도 나를 배려한 거겠지.
카메라는 계속 꺼두었지만 내 목소리에서 내가 지쳐있는 것을 짐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 수 없는 거 잘 알고 있잖아."
나는 이 전장에서 물러날 수 없다.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한 이야기를 지키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
< 하지만... >
무언가 말하려던 주혁이의 목소리가 잠깐 멈췄다.
이 뒤에 말하는 내용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어른이 된 줄 알았지만 아직 어른처럼 능숙하게 말하는 법은 모르고 있구나.
< 그... >
이어서 해야 할 말을 미처 고르지 못한 듯 망설이는 것 같았다.
피로감에 떨리는 눈을 잠깐 감은 뒤.
"... 그러니까."
별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네가 도와줘."
어렵게 꺼냈다.
어른이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될 줄이야.
"혼자서 상대하긴 힘들어... 네가 내 옆에서... 도와줘."
그러나 도움을 요청한 상대가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라면.
한 번쯤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꺼내도 되지 않을까.
< 맡겨줘! >
자신감이 넘치는 대답이 돌아왔다.
동시에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도움을 청하고 마는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저 아이의 옆에 서 있을 자격이 있을까...
---
지금은 그런 싸구려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도움을 요청한 이상 확실하게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싶었다.
< 이야기는 끝난 거야? >
사도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1호기와 아르베넷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검을 든 채 달려들었다.
- 후욱!
검이 다시 한 번 휘둘러지자 검이 휘둘러진 주변이 녹아내렸다.
무너진 활주로의 아스팔트는 끈적한 타르가 되었고. 다 무너져가던 건물의 철골은 녹아서 콘크리트 사이에 엉겨 붙었다.
1호기가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백색의 검을 단검으로 막으려 했지만.
- 슈우욱...
빛으로 이루어진 단검의 날이 서서히 흩어지며 출력이 끊겼다.
1호기는 출력이 끊긴 단검에서 빠르게 손을 때어 물러나자 공중에서 단검이 타오르더니 이내 녹아서 사라져가는게 보였다.
< 너희들은 아버지께 올리는 번제물이 되는 거야! >
한 발자국 물러난 1호기를 향해 백색의 검이 다시 한 번 휘둘러졌지만.
- 파샷!
사도를 향해 탄환이 날아왔다.
사격이 쏘아진 곳에서는 2호기가 소실된 왼팔 대신 무너진 방공포의 포신을 연결한 채 사도를 노리고 있었다.
- 슈우우...
그러나 사도를 노리던 탄환은 사도에게 닿지 못한 채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탄환은 검이 뿜어내는 열기에 녹아버리고 만 것이다.
- 탕! 탕! 탕!
2호기가 만들어준 틈을 타 1호기가 근처에 버려져있던 케루브의 라이플을 쥐어 쏘았지만 그 탄환 역시 사도에게 닿기 전에 증발해버렸다.
- 카앙!
아르베넷 역시 창을 휘둘렀지만 이번엔 장갑판에 막혀버렸다.
멀리서 쏘는 사격은 맞지 않고, 가까이에선 장갑판이 막아버리며, 더 가까운 거리에선 고열로 인해 오래 버틸 수 없다.
< 대검이라도 챙겨올걸 그랬나... >
휘둘러진 검을 피해 1호기와 함께 뒤로 물러나자 아쉬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일한 근접무장이었던 단검이 사라진 만큼 막상 돕겠다고 말했지만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아쉬운 것 같았다.
"이걸 사용해."
1호기를 향해 들고 있던 창을 건네주었다. 창이야 한 자루 더 꺼내면 그만인 소모품이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아르베넷의 무기라면 저 고열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고마워! >
1호기는 익숙하지 않은 창을 받아 자루를 양 손으로 검처럼 쥐었다.
창을 든 1호기와 함께 사도의 양쪽을 노려 달려들었지만.
< 소용없어. >
- 카앙!... 드득...
백색의 검과 창 두 자루가 얽히는 소리가 울렸다.
사도가 가볍게 휘두른 검에 두 자루의 창은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1호기와 아르베넷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검을 든 사도를 밀쳐낼 수 없었다.
- 콰앙!
사도가 어깨에 달린 장갑판의 추진력을 이용해 검을 휘두르자 1호기와 아르베넷은 밀려나버렸다.
---
"쳇..."
여태까지 싸워온 교단이나 차원수와는 다르게 눈앞의 적은 강했다.
계속 빈틈이 보일 때 마다 달려들었지만 장갑판에 의해서 공격이 막혀버리고, 그 뒤에는 사도의 검이 휘둘러졌다.
여섯 장 중 두 장밖에 남지 않았지만 저 장갑판은 골치 아픈 상대였다.
장갑판만 없었더라면 공격이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그 순간 아까 연구실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다.
시험관 안에 담겨있던 장갑판의 조각을 움직였던 것처럼. 저 장갑판도 움직여볼 수 있지 않을까?
분명 박사의 분석대로라면 직접 닿지않더라도 조종할 수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나라도 움직이는 게 가능할지 모른다.
1호기와 사도가 검과 창을 맞부딪치는 사이 아르베넷의 왼 손을 들어 사도를 향해 뻗었다.
"움직여..."
사도의 어깨에 있는 장갑판을 향해 한쪽 손을 뻗은 뒤 조금 집중했다.
전장에서 눈을 감을 수 없었으니 온전한 명상은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다.
- 채앵!
내가 움직임을 멈춘 사이 다시 한 번 검과 창이 휘둘러지고 1호기를 향해 장갑판이 들어 올려졌지만.
- 카드득...!
두 장의 장갑판은 온전히 맞물리지 않고 어딘가 어긋나듯 삐뚤어졌다.
- 캉!
그 틈사이로 1호기가 들고 있던 창 끝이 파고 들어갔다.
< 카나프?! >
사도도 적잖게 당황한 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갑판을 완전히 치워낸 것이 아니라 잠깐 옆으로 밀쳐낸 정도지만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후... 으윽..."
특별히 어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아까보다 더 지치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론가 힘이 새어나가는 듯 한 피로감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 아버지가 주신 날개에 무슨 짓을 한거야! >
사도는 장갑판을 움직인 것이 나라는 것을 눈치 챈 듯 아르베넷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 정도 거리야 금방 움직이면...
- 툭
조종간을 쥔 손이 미끄러지며 바닥 아래로 창을 놓쳐버렸다.
이어지는 피로감에 의해 초보자도 저지르지 않을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 떨어져! >
멀리서 2호기가 엄호를 위해 사도에게 포격을 쏟아 부었지만 검과 장갑판에 의해 포격은 닿지 않았다.
창을 놓친 지금 상황에서 공격을 방어할 수단은 아르베넷의 두 팔 뿐.
"안 돼...!"
아르베넷의 조종석을 향해 백색의 검이 휘둘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두 팔을 올려 검을 막으려했지만.
백색의 검은 아르베넷에게 휘둘러지지 않았다.
눈앞에는 푸른 입자를 흩날리는 푸른 1호기가.
아르베넷을 지켜주고 있었다.
---
- 카드드드드득...!
1호기가 양손으로 창을 쥐어 백색의 검을 막고 있었지만 창은 점점 부서지고 있었다.
검이 뿜어내는 고열의 열기 속에서 창을 들고 있는 1호기의 장갑 표면이 조금씩 녹고 있었다.
< 형제를 사칭한 가짜들 주제에! >
- 콰앙! 캉!
검이 부딪쳐 올 때 마다 1호기가 들고 있는 창이 깨져갔다.
- 투둑... 둑...
부서져가는 것은 창뿐만이 아닌 듯 1호기의 장갑도 겉 부분이 녹아가며 얕은 장갑이 바닥으로 떨어져갔다.
"주혁아..."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나를 지켜주기 위해 1호기는 자신의 몸을 깎아내고 있었다.
< 나는... >
기체의 손상으로 인한 통신모듈의 노이즈와 함께 주혁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나와 묘월이는... >
< 해치워버려! 카나프! >
사도의 양 어깨에서 떨어진 두 장의 장갑판이 1호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 가짜가 아니야! >
주혁이의 외침과 함께 녹아붙어있던 1호기의 패널이 열렸다.
- 카가각...가가각...!
팔과 다리 그리고 등의 틈 사이로 푸른 입자가 쏟아지듯 흩날리며 자신을 향해 날아온 장갑판을 밀쳐냈다.
기체를 덮은 회색의 장갑이 입자의 방출에 밀려 떨어져나가며.
회색의 재처럼 날리는 금속의 분진 속에서.
1호기는 하늘처럼 푸른빛을 띄며 비상했다.
[ ARON HABRIT :: ON ]
라파 베레시트의 성궤가 열렸다.
...
1호기에게서 밀쳐진 장갑판은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 뭔가 느낌이 이상해... 돌아와 카나프. >
움직임을 멈춘 장갑판은 사도를 향해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 카나프 ?! >
장갑판은 자신의 주인을 공격하듯 날아들었다.
- 으득...득...
< 카나프... 어째서? >
사도는 백색의 검을 들어 올려 장갑판을 막았다.
백색의 장갑판은 끝이 먹에 닿은 것처럼 검게 물들어있었다.
< 쳇... ! >
자신을 노리는 장갑판을 검을 휘둘러 쳐내자 두 장의 장갑판은 힘을 잃은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 쌔애액!
푸른 입자를 방출하는 1호기는 사도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 카앙! 캉!
1호기는 빠른 속도로 사도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 무슨... 갑자기 속도가! >
사도는 조금 전 까지의 여유로운 공격방식과 다르게 1호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인 것 같았다.
< 빠르다... >
통신 너머로 미하일의 감탄을 담은 목소리가 들렸다.
1호기는 점점 내가 따라잡기 힘든 속도로 가속하고 있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나의 옆에서 나란히 싸우던 주혁이는.
어느새 나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 까지 올라가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경이로운 조종 실력.
...더 이상 내가 지켜줘야 할 필요가 없어진 걸지도 모른다.
< 조... 조금 빨라진 정도 가지고! >
사도안의 어린아이는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 카앙!
< 아앗...! >
1호기가 휘두르는 창에 의해 사도가 들고 있던 백색의 검이 손에서 떨어져버렸다.
< 카...카나프! >
사도는 당황하여 장갑판을 불렀지만. 바닥에 떨어진 장갑판은 움직이지 않았다.
< 처...천사들! 빨리 나타나줘! [아버지의 계약]을 이행해 ! >
- 쌔애액...
사도는 다급하게 천사를 부르려는 듯 사도의 등 뒤에서 붉은 게이트가 몇 개 열렸지만.
- 기직...직...
붉은 게이트는 그 자리에서 일그러지듯. 구겨져 사라지는 것처럼 닫혀버렸다.
게이트는 열리지 않았으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저 사도에게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다.
< 도망치는 것 정도라면...! >
사도의 머리 위 백색의 고리가 강하게 빛을 내며 사도가 떠오르려 했지만.
- 카앙!
< 아악! >
아르베넷이 던진 창에 맞아 활주로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
- 슈우우...
푸른빛을 흩날리는 1호기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창을 든 채 사도의 앞에 섰다.
< 싫어! 아직 아버지도 오지 못했는데 벌써 잠들 수는 없어...! >
사도는 저항하려는 듯 팔을 휘둘렀지만 어린아이의 저항처럼 보일 뿐.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하지 못했다.
1호기가 마무리를 짓기 위해 창을 꽂으려는 순간.
- 콰과과!
사도와 1호기의 틈 사이에 세 갈래의 빛이 쏘아져 내렸다.
"뭐...?!"
1호기를 엄호하기 위해 아르베넷을 움직이려 하자 아르베넷의 앞에도 세 갈래의 빛이 쏘아졌다.
빛이 내 앞에 떨어지기 직전까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아르베넷의 창의 크기와 맞먹는 크기를 가진 백색의 빛.
화살의 형상을 가진 빛은 땅에 꽂힌 뒤 잠깐 타오르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 콰앙!
쓰러진 사도에게 더 다가가는 것을 막는 것처럼 백색의 빛은 다시 한 번 우리를 향해 쏘아졌다.
"큭..."
어디서 쏘아진지 모르는 빛을 피하기 위해 회피기동을 취하는 게 전부였다.
"엘. 이 공격이 쏘아진 곳은 어디야?"
[ 저 쪽이에요! ]
모니터 위로 엘이 표시해 준 지점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백색의 거인이 서 있었다.
유려하게 생긴 백색의 거인은 자신의 몸보다 커다란 백색의 활을 들고 있었다.
우리가 상대한 사도와 비슷한 형상을 가진 저 것은, 필히 다른 사도일 것이다.
- 끼이익...
백색의 활시위에 세 갈래의 빛이 걸렸다.
- 콰앙!
활시위에 걸려있던 세 개의 화살은 다시 한 번 전장을 향해 쏘아졌다.
화살이 한 발 떨어질 때 마다 활주로는 형상을 잃어 부서져갔다.
1호기도 더 이상의 대응은 할 수 없는 듯 몸을 피하는 게 전부였다.
화살이 쏘아지는 동안 바닥에 쓰러져있던 사도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 두... 두고 봐! >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있던 자신의 검을 든 채 하늘을 날아 도망쳐버렸다.
"기다려!"
도망치는 사도를 향해 창을 내던졌지만.
- 카앙!
던져진 창은 멀리서 쏘아진 빛의 화살에 맞아 튕겨져버렸다.
활을 들고 있던 백색의 기체도 사도가 이탈하는 것을 확인하자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두 명의 사도를 놓쳐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전투에서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