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외전 : 은빛의 새
짙은 회색빛의 활주로 위로 새하얀 눈이 내린다.
이 나라에 끝나지 않는 눈이 내리기 시작한지 벌써 일 년이 더 지났다.
눈이 내릴 때 마다 제설작업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제설 작업이 끝날 때마다 새로운 눈이 끊임없이 회색빛의 활주로를 새하얗게 덮어갔다.
모두가 제설을 포기한 채 쉬고 있을 무렵 새하얀 활주로 위를 한 소녀가 달린다.
활주로 위를 달리는 한 소녀는 손에 무언가를 소중하게 쥐고선 계속해서 달렸다.
소녀가 달리고 있는 활주로의 끝에 서있는 것은 어깨 위로 숄을 걸친 은발의 여인이 서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소녀는 은발의 여인을 향해 선생님이라 부르며 달린다. 은발의 여인은 자신을 부르는 소녀를 향해 돌아본 채 미소를 지었으나...
- 꽁!
소녀는 활주로 위로 얇게 얼려진 눈에 미끄러져 공중을 한 바퀴 돌아 무릎과 팔꿈치로 땅 위에 착지했다.
"서... 선생님... 으흐윽..."
넘어진 소녀는 은발의 여인을 다시 한 번 부르며 딱딱한 활주로 바닥에 찍힌 팔꿈치와 무릎의 아픔을 참으며 울먹였다.
"미하일! 앗...!"
- 쿵!
은발의 여인은 넘어진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소녀를 향해 조심히 달렸으나 그녀 역시 얇게 깔린 얼음을 피하지 못한 채 소녀의 앞에서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단지 다른 점은 소녀가 몸을 던져 활주로 바닥에 부딪쳤다면 그녀는 엉덩이를 찧은 것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선생님... 괜찮아?"
소녀는 여인이 넘어지자 자신이 넘어져 아팠던 것은 잊은 것처럼 팔꿈치와 무릎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먼저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괘...괜찮아요..."
선생님이라 불린 여인은 자신보다 작은 소녀의 손을 붙잡아 몸을 일으켰다.
"선생님은 너무 덤벙거려... 눈을 안 뜨고 다니니까 그런거야."
소녀는 자신이 넘어진 것은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넘어진 여인에 대해 걱정하는 듯 한 말을 꺼냈다.
"이...이래도 보일 건 다 보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녀의 눈은 확실히 다른 사람이 볼 때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일자로 그은 것처럼 닫힌 눈이었지만 새하얀 속 눈썹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항상 나보고 앞을 똑바로 보라고 하는 주제에..."
"선생님은 어른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괜찮은 거랍니다! 참... 미하일은 왜 이 시간에 저를 찾아온 건가요?"
그녀는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 소녀의 말을 다른 주제로 돌리듯 소녀에게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아! 맞아 선생님한테 꽃을 주려고... 가져왔는데..."
소녀는 이제야 자신이 그녀를 찾아온 이유를 떠올린 듯 털장갑을 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보여주었다.
"...망가져 버렸어."
소녀의 손에는 넘어질 때 눌려버려 줄기가 꺾여버린 한 송이의 붉은 꽃이 들려있었다.
소녀의 표정은 꺾여있는 꽃줄기처럼 점점 구겨져가며 곧 울것 같아 보였다.
"괘...괜찮아요 미하일! 울지마세요!"
여인은 곧 울것 같은 소녀를 달래듯 소녀의 양 뺨을 새하얀 손으로 잡고 문질러주었다.
"망가졌는데... 정말 괜찮아?"
"저는 미하일이 가져온 그 마음 자체만으로도 기쁜걸요."
소녀가 울것 같은 표정을 멈추자 그녀는 뺨에서 손을 때 소녀의 손에 들린 작은 꽃을 소중하게 받아 자신의 웃옷 주머니 위에 꽂아 넣었다.
"정말...?"
"정말이랍니다. 미하일."
"고마워 선생님!"
어린 소녀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여인의 품에 달려들어 안겼다.
회색빛의 칙칙한 활주로와 삼엄한 군사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은발의 여인과 금발의 소녀는 서로를 안은 채 새하얀 눈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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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하일... 지금은 교육을 받을 시간이 아니었나요?"
활주로의 한쪽 끝에 걸터앉은 은발의 여인은 자기 무릎 위에 올라탄 어린 소녀를 보며 물었다.
"교육 받고 싶지 않아... 지루해."
"이번에는 왜 싫어진 건지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은발의 여인은 소녀가 교육에서 빠져나온 일이 익숙한 듯 소녀에게 조심스럽게 교육을 빠진 이유를 물었다.
"전부 어른들 뿐이야... 나랑 비슷한 나이의 아이는 한명도 없어."
소녀가 교육을 빠져나와 활주로에서 그녀를 만난 이유는 소녀와 어울릴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시설의 교육기관. 소녀처럼 어린아이가 있을 자리가 아니지만 소녀는 그 자리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세상이 바뀐 지금 적합자는 한명이라도 귀중하다. 어린 나이임에도 적합률이 70이 넘은 소녀 미하일은 필리스티아 연구소의 핵심 인원 중 한명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제가 놀아주고 있지 않나요?"
은발의 여인은 소녀의 고운 금색의 머리를 품에 넣어두었던 빗으로 빗겨주며 이따금씩 쌓이는 눈을 털어 내주었다.
"그래도... 놀고 싶은걸..."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도 어린 소녀는 여전히 어린 소녀인 그대로였기에 그녀를 붙잡아두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인. 선생님을 제외한다면.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이런데 오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
소녀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여인은 소녀의 머리를 빗겨주던 손을 잠깐 멈추었다.
"...선생님?"
소녀는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던 손이 잠깐 멈추자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표정은 조금 착잡한 것처럼 어두운 빛을 띄고 있었다.
"미하일."
"응."
"잠깐 기도할까요?"
"기도?"
소녀는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의아한 단어에 의문을 품었다.
"'아버지'에게 소원을 비는거에요."
"...아버지는 싫어."
소녀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육친.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에게 있어서 별로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미하일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은발의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선생님의 아버지야?"
"모두의 아버지께 기도하는거에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선생님이 하는 거라면 나도 따라서 해볼게."
은발의 여인이 말하는 '아버지'의 개념은 소녀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개념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 차이를 소녀는, 아니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미하일. 눈을 감고, 손을 모아주세요."
"이렇게...?"
소녀는 여인의 안내에 따라 눈을 감고 작은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 뒤에 마음속으로 자신의 소원을 바라는거에요.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아버지'와 당신만 알 수 있는 소원을."
"..."
소녀가 눈을 감은 채 집중하자 그녀 또한 소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작게 입을 열었다.
[□ □□□ , □□ □□ □□ □□□□...]
은발의 여인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작게 읊었다.
그 말은 이따금씩은 시처럼 혹은 노래처럼 들렸지만 소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전언이 끝난 뒤 여인은 눈을 조심스럽게 떠 소녀를 바라보자 소녀는 흘끔 뜨고 있던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선생님은 뭘 바란 거야...?"
"미하일이 강하게 지낼 수 있게. 씩씩하게 자랄 수 있게 기도했어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하지않았어?"
소녀의 지적에 여인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곤 조금 작게 웃었다.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지금은 이 정도 실수는 용서해 주실거에요."
"선생님의 아버지는 자고 있어?"
"네 지금은 깊은 잠에 빠져 계시지만... 언젠가 깨어나실 날이 오실 거예요."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소녀를 일으켜 주었다.
"자고 있으면 지금 기도도 듣지 못하는거 아니야?"
"그건 아니에요. 아버지는 잠들어 계시더라도..."
여인은 조금 웃으며 감긴 눈을 살짝 떴다.
"모두를 사랑하고 계시니까요."
여인의 눈은 새 하얀 숄 위에 얹힌 붉은 꽃 처럼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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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나중에 봐."
어린 소녀 미하일은 뒤늦게 자신을 찾으러 온 나이든 교관의 손을 잡고 교육장소를 향해 돌아갔다.
"나중에 봐요 미하일."
여인은 멀어져가는 소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곤 아무것도 없는 활주로를 마저 걷기 시작했다.
당장 작년까지 전투기가 빼곡했을 활주로는 지금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은 채 눈만 쌓여가고 있었다.
[너무 정을 주고 계신게 아닙니까.]
하얀 숄 사이에서 빠져나온 백색의 원반은 여인의 주변을 돌며 그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당신은 매정해요 엘."
[죄를 가지고 태어난 자를 아끼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엘이라 불린 원반은 여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불규칙하게 주위를 돌았다.
- 팅
여인은 새하얀 손가락을 뻗어 원반 끝을 툭 쳐내자 원반은 힘없이 흔들렸다.
[계속 저들과 지내다보면 죄가 옮게 될 겁니다.]
밀려난 원반은 흔들리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죄 많은 저들조차 사랑하시는걸요."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저들은...]
"네.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심판 앞에 서게 되겠죠."
심판을 언급하는 여인은 붉은 눈을 작게 떠 차가운 시선으로 활주로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수송기 아래 모인 작업원들이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는 커다란 트레일러로 향했다.
"그 전까진 아버지의 피조물과 같이 어울려도 되지 않을까요?"
[...온전한 육신을 숨겨둔 채 죄로 지어진 저것에 타는 의미가 있는 겁니까.]
트레일러에서 내려진 것은 인간을 닮은 형상을 한 거대한 거인.
아버지가 자신을 본떠 인간을 만든 것처럼, 인간도 자신을 본 딴 거인을 만들어내었다.
이 세계를 침범하는 차원수에게서 대항하기 위한 병기 개발 계획의 1세대 시작형 기체 '세라프'.
신성을 따온 이름과 다르게 기체는 흉흉한 흑철색의 골조만 남은 채 트레일러 위에 눕혀져 있었다.
영원히 얼어붙어가는 땅의 바로 옆 필리스티아 연구소에서 세상을 되찾기 위한 계획은 시작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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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상이 눈에 덮여갈 무렵 이 세상과 다른 어딘가...
붉은 호수가 넓게 펼쳐진 어두운 굴을 두 남자가 걷고 있었다.
은색의 성의를 입은 남자와 간결한 사제의 예복을 입은 남자가 옷이 물에 젖어가는것은 신경 쓰지 않은 채 호수를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남자들이 걸을 때 마다 찰박이는 붉은 물이 두 남자의 옷을 물들여가고 있었다.
"...정말 나도 성찬식을 받을 수 있는 건가?"
은색의 성의를 입은 남자는 자신의 앞을 걷는 사제의 예복을 입은 남자에게 의심에 가까운 태도를 가진 채 물었다.
"물론입니다 형제님. 성자님을 돕고자하는 마음만 있다면 형제님도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성자님이 잠들어계신 지금도 말인가?"
은색의 성의를 걸친 남자의 시선이 향한 곳은 호수의 한 가운데.
붉은 호수에 잠기지 않은 채 호수의 표면 위로 살짝 떠올라있는 검은 관은 이음새 사이에서 끊임없이 피처럼 붉지만 맑은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호수에 잠들어있는 관의 주인은 자신의 육신을 잘개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자.
나누어진 육신처럼 자기의 피를 아낌없이 나누어준 자.
'성자'는 지금 관 속에서 깨어나지 않는 잠 속에 빠져있었다.
"항상 성자님은 자신이 떠난 뒤 그 다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사제의 예복을 입은 남자는 관 앞에 멈추어 관 위에 얹어진 금색의 잔을 들어올렸다.
"이것은..."
그 잔 속에는 호수를 가득 채운 것처럼 붉은 물이 어느새 채워져 있었다.
사제의 예복을 입은 남자는 잔을 은색의 성의를 걸친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성찬의 수는 이미 완성되었던 게 아닌가?"
은색의 성의를 걸친 남자는 잔을 손에 든 채 고민했다.
" '노란 옷의 왕', '무인', '투신', '인형사', '꿈의 거미' ... 정말 이 다섯에게만 모든 것을 위임하셨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사제의 예복을 입은 남자의 질문에 은색의 성의를 걸친 남자는 그 수에 대해 고민하듯 표정을 조금 찌푸렸다.
과연 성자가 다섯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났을까.
다섯 외에도 예비를 준비해두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자리에 다섯에 들지 못한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군. 내가 그 다섯보다 부족할 리가 없다."
은색의 성의를 걸친 남자는 자신의 고민에 대해 해답을 내린 듯 잔을 들어올렸다.
"훌륭합니다."
사제의 예복을 걸친 남자는 잔을 들어 올린 결정에 대해 찬사하듯 작게 박수를 쳤다.
"이 곳에서 당신은 성자님의 예비된 성찬을 받는 겁니다."
은색의 성의를 걸친 남자의 손에 들린 잔이 점차 비워져가자 호수의 가운데에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 그오오...
잔이 비워져 갈 때 마다 남자의 사이에 놓인 검은 관은 작게 공명하듯 울리기 시작했다.
- 철썩... 철썩...
마침내 잔이 온전히 비워지자, 호수의 저편에서 커다란 물결이 일며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호수의 바닥 아래에서 나타난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새.
은색의 새는 붉은 호수의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은빛의 날개를 환하게 펼쳐 빛내고 있었다.
"잠긴 우리의 고향을 다시 떠오르게 하기 위해. 나는 다른 형제들 보다 먼저 나서겠다."
비워진 잔을 관 위에 얹은 은색의 성의를 걸친 남자는 은색의 새를 향해 걸어 나갔다.
"형제님을 응원하겠습니다."
사제의 예복을 걸친 남자는 은색의 새와 자신의 형제를 향해 웃었다.
성자가 떠난 뒤 성찬을 받은 자.
은익의 비야키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성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