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외전 : 은빛의 새
제 42 비행단 소속 필리스티아 연구소에 트레일러가 내려진지 며칠이 지났다.
외부와는 단절된 연구소의 격납고안에는 군복을 입은 군인이나 정비복을 입은 정비원 그리고 가운을 걸친 연구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 개의 복장으로 나뉘어진 이 연구소에서 단 한명만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조금 긴 스커트를 기조로 한 평상복을 입은 채 연갈색의 가디건과 백색의 숄을 걸친 눈이 감긴 듯한 은발의 여인.
그녀는 혼자서 격납고의 한 쪽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오셨군요. 미스..."
어딘가 부스스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 연구원은 한참이나 입고 다녀 구겨진 가운을 걸친 채 머리를 긁적였다.
자기 앞에 있는 은발의 여인을 뭐라 불러야할지 감을 잡지 못해 한참이나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리라.
민간 협력자? 용병? 보육사? 그것도 아니면 테스트 파일럿?
그녀가 이 기지에서 불리는 직함은 많았지만 어느 것도 그녀를 명확하게 나타낸다고 보기 힘든 것들뿐이었다.
"엘리세바."
그녀 역시 이런 취급이 한두 번은 아니었던 듯 직함으로 불리기보다 이름으로 불리는 쪽을 선택한 듯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엘리자베타."
구겨진 가운을 걸친 연구원은 그녀의 이름을 듣자 이제서야 기억이 났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몇 번씩이나 다르게 부르는 건가요."
여성은 자신이 불러준 이름을 다르게 부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작은 뺨을 부풀렸다.
"본인 입으로 엘리자베타 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들렸나요."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잘못 이해하는 상황이 익숙했던 것인지 눈앞의 연구원을 설득하길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엘라자베타."
"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름으로 이야기가 길어지는 건 원하지 않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드디어 바다 건너 도착한 프레임을 완성했습니다."
연구원이 손을 뻗어 가리킨 곳에는 격납고 한 쪽에 3대의 거인이 나란히 서 있었다.
며칠 전 트레일러 속에 담겨있던 앙상한 뼈대가 아닌 두꺼운 흑색의 장갑판이 붙은 기체들은 한 쪽 어깨에 01,02,03이 마킹되어 3기가 모두 형제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이... 세라프군요."
세라프.
바다건너 외국에서 한 연구원이 독자 개발해낸 기체를 토대로 만들어진 1세대 양산 계획의 시작기였다.
필리스티아 연구소에 할당된 프레임은 단 3개.
3개란 숫자는 적게 느껴지지만 물자가 부족한 지금의 상황에서 3대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이 국가가 혼란 속에서도 건재함을 나타내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3대나 받아올 줄이야... 모든 예산이 이 쪽으로 쏠리겠네요."
"정말 골치 아픕니다. 위에서는 이 프로젝트에 모든 걸 걸라면서 다른 부서의 예산을 모두 줄였습니다."
무리해서 3대나 받아온 1세대 양산 계획의 프레임이지만 이 국가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이트 이후 발생한 혼란과 함께 점점 거칠어져가는 자연환경은 당장 내일의 식사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개인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국가가 아직 건재하며 언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음에 대한 상징으로 무리하게 형편에 맞지 않는 프레임을 3대나 받아왔다는 것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었다.
그 여파로 다른 군수 관련 프로젝트는 모조리 동결.
파일럿의 육성과 1세대 양산계획에만 모든 예산이 집중된 탓에 비행단이면서도 전투기는 최소한의 숫자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코어의 탑재는 완료되었나요?"
"그게 말입니다... 기지 안에 있는 코어를 싸그리 가져와서 연결하고 있지만 도저히 맞질 않습니다."
연구원은 코어의 이야기가 나오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있는 높은 분들은 빠른 성과를 원하지만 당장 움직일 수조차 없다면 저 쇳덩어리들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제가 한번 봐도 괜찮을까요?"
"당신이 말입니까?"
모든 엘리트들이 모여서 며칠을 매달려도 실패한 코어 연결 작업을 저 여인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해 연구원은 잠깐 고민했다.
"어차피 제가 타야 할 기체 아닌가요?"
"그건 그렇군요."
하지만 그녀의 접근을 막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는걸 깨닫고 고민을 그만두었다.
연구원은 그녀와 함께 격납고를 조금 걸어 기체의 발아래에 다른 연구원과 정비원들이 모여있는 곳 까지 금방 도착했다.
사람의 키 보다 조금 작은 검붉은 색의 코어 앞에서 여럿이 모여 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었지만 진전은 보이지 않았다.
붉은 선을 이어도 푸른 선을 이어도 눈앞의 검붉은 코어는 밝게 빛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안되는 거야? 코어 문제 아니야?"
"그 소리는 벌써 다섯 번도 넘게 하셨습니다..."
기름때에 찌든 정비복을 입은 정비원은 선임 정비원의 푸념을 익숙하게 받아 넘기며 같은 작업을 계속 반복할 뿐이었다.
"바다 건너에서는 열 살쯤 되는 어린애가 기동에 성공했다던데..."
"우리에게 지기 싫어서 거짓정보를 흘리는 거겠지. 그 쪽은 프레임도 한대밖에 없다며?"
정비원은 다시 한 번 코어의 옆에 전극을 꽂으며 바다 건너 프레임을 보내주었던 국가의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앗 엘리자베타."
"...엘리세바에요."
코어 앞에 도착한 그녀는 잠깐 볼을 부풀리곤 코어 앞에 섰다.
"합성 코어네요."
"환경이 척박하다고 차원 수들도 작은 놈들밖에 안오다보니... 이런 것 밖에 없습니다."
기지의 모든 코어를 긁어모았지만 쓸 수 있는 것은 중형 차원수의 코어를 기반으로 다른 소형 코어를 억지로 이어붙인 순도가 떨어지는 합성코어 뿐이었다.
'이 코어. 영혼의 형태가 제각각이구나... 불쌍하게도.'
그녀는 눈앞에 있는 코어를 보고 조금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다.
"이 부분 접속 확인해보셨나요?"
그녀는 옆에 있는 단말을 확인하는 척 연구원들의 시야를 돌린 뒤 한 손을 코어 위에 얹었다.
'가장 큰 아이의 의식이 가라앉아있어... 이 아이를 중심으로 다른 혼을 묶어보면...'
- 위이잉
그녀가 짧은 손짓을 마친 것과 함께 코어가 점점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접속은 멀쩡한데... 어? 어."
"뭐야 이게 왜 되는 거지?"
연구원들은 며칠을 매달려도 시동하지 않았던 코어가 빛나기 시작하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전극의 선이 하나 빠져있었어요."
그녀의 손에는 코어에 접속하는 케이블들 중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럴 리가... 분명히 전부 연결을..."
"그게 뭐가 중요해. 가동하기 시작했잖아. 얼른 탑재준비나 해."
선임 정비원은 코어가 가동한 것에 만족하는 듯 의문을 품는 정비원을 보챌 뿐이었다.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슬슬 퇴근 시간이거든요."
"살펴가십쇼."
정비원은 코어 탑재작업에 정신이 팔려 떠나는 그녀에게 적당히 인사만 하곤 작업을 서둘렀다.
가운을 대충 걸치고 있던 연구원만 그녀의 등을 미심쩍은 듯 한번 바라본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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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흥 식사를 할까요."
길었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지에서 일과가 끝난 그녀는 혼자 조악한 실력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숙소에 딸린 냉장고를 열었다.
"오늘의 메뉴는... 칼로리바와 칼로리바와 칼로리바와... 합성 쥬스군요."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저온보관이 가능한 군용식량의 일종인 칼로리바와 함께 보급되는 합성 감미료를 쓴 포도 그림이 그려진 쥬스팩 뿐이었다.
"모처럼 세상에 내려온건데... 가끔이라도 맛있는 걸 먹고 싶어요."
보급상황이 좋지 못하니 끼니를 때울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다행이었지만 그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쉬었다.
"조촐한 비스킷에 포도쥬스라니... 이래선 혼자 성찬식을 하는 것 같아요."
[성찬식을 너무 가볍게 말하지 마십시오.]
"그냥 해본 말이에요."
칼로리바의 포장을 뜯던 그녀는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는 하얀 원반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은 자신의 사명을 가지시는 게...]
"성찬을 나눠줄 만큼 사랑하는 사람도 없네요!"
은발의 여인은 하얀 원반. 엘을 향해 포장지를 던졌지만 원반은 가볍게 투척을 피했다.
[그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엘은 자신의 주인을 향해 어린 소녀. 미하일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는 다른거에요 엘."
[저로선 이해하기 힘들군요.]
엘은 자신의 주인이 말하는 사랑과 호의의 감정에 대한 차이를 이해할 수 없는 듯 제자리를 붕붕 돌 뿐이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만. 누군가 이 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아. 이 시간이라면... 그 아이겠네요."
엘의 보고를 들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현관문을 열자 그 앞엔 코트를 입은 금발의 어린 소녀가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미하일."
"어라 선생님 내가 오는걸 어떻게 알았어?"
"감이에요."
"선생님 대단해!"
그저 원반의 도움을 받아 타이밍 좋게 문을 연 것뿐이었지만 소녀는 자신이 오는 것에 맞춰 문을 열어준 그녀를 대단하다며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저 녀석도 같이 있네."
[저는 저 녀석이 아닙니다. 인간의 꼬마.]
"짜증나."
미하일은 자신의 머리 위에 떠있는 엘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손을 휘둘렀지만 어린아이의 손은 원반의 높이에 닿지 않았다.
"선생님 저녁 먹고 있었어?"
잠깐 원반에 정신이 팔렸던 미하일은 책상위에 놓인 칼로리바와 쥬스팩을 보곤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네? 아하하..."
그녀는 미하일의 앞에서 휑한 식단을 보이는 게 조금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어색하게 웃었다.
"잘 됐다. 선생님이랑 먹고 싶어서 이거 가져왔어."
"가져왔다뇨?"
미하일은 깊게 찔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몇 번 뒤지기 시작했다.
"이거야! 이번엔 안 넘어졌어!"
그 안에서 꺼내진 것은 작은 은색의 포장지로 감싸진 것... 판 초콜릿이었다.
"미하일 그...그건..."
그녀는 소녀의 손에 들린 초콜릿을 보자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오늘 시뮬레이션? 거기에서 1등했어. 교관님이 잘 했다고 주셨어."
미하일이 받아온 것은 고급 기호품. 지금 시대엔 구하기 힘들어진 사치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비록 예전 시대의 상점에서 팔리던 것처럼 질 좋은 초콜릿은 아닌 군수 보급품 수준의 초콜릿이었지만 그 깐깐한 교관이 이걸 상으로 줬다는 것은 어린나이임에도 미하일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났던 것이리라.
"선생님이랑 나눠먹을거야!"
"저...정말인가요?"
그녀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과연 저 소녀가 초콜릿의 절반을 자기에게 정말로 나눠줄 것인가.
그녀는 시련 앞에 마주 선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아버지 앞에 선 것 처럼.
인지를 초월한 존재. 원죄를 짓지 않은 자. 12인의 사도라는 지위가 고작 인간이 만든 기호품 앞에서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응!"
"사랑해요 미하일!"
그녀는 미하일의 변심 없는 올곧은 대답을 듣자 미하일을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선생님 숨 막혀-"
미하일은 조금 답답해했지만 누군가 자신을 안아줬다는 사실이 기쁜 듯 작은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같이 껴안았다.
"얼마나 착한아이인가요... 미하일이라면 이 자리에서 성찬식을 베풀어도 아깝지 않을 거에요..."
"성찬식? 선생님은 알기 어려운 말을 자주 해. 얼른 같이 나눠먹자."
아직 어린아이인 미하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보다 선생님과 지금의 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던 듯 그녀의 이야기를 적당히 넘겼다.
실수로 아직 어린아이에게 베풀어질 뻔한 성찬은 반쪽의 초콜릿과 함께 조용히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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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어 접속작업이 한참일 무렵.
필리스티아 연구소가 소속된 비행단의 사령부에서는 쉴 틈없이 감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규모 게이트가 열려 세계가 혼란에 빠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언제 열릴지 모르는 게이트를 항상 감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였다.
여러 개의 모니터와 레이더를 감시하던 군복을 입은 군인은 모니터 한 쪽 지도 위에서 광점을 발견했다.
"동쪽 고원에서 이상 반응을 감지했습니다!"
그는 광점을 확인한 즉시 감독관을 향해 보고를 올렸다.
"이상반응? 차원수인가?"
보고를 받은 감독관은 곧바로 감시원의 화면을 큰 모니터위로 옮겼다.
사령부의 주 모니터 화면에는 작은 감시소가 있는 고원 위로 백색의 광점 하나가 여러 번 반짝이고 있었다.
"차원수와 파장이 비슷하긴 한데... 조금 다릅니다. 적색이 아니라 백색의 신호를 띄고 있습니다."
"백색이라면 소속불명기일텐데... 혹시 다른 기지의 전투기가 아닌가?"
생물에 가까운 차원수는 적색. 식별된 기체는 녹색으로 떠야 할 센서는 백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백색의 신호는 등록이 되지 않은 기체. 일반적으론 외부 기지의 전투기가 주로 백색의 신호를 띄었다.
"비행기록을 확인해봤지만 이 시간에 비행예정은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감시시설은?"
"파괴된 뒤로 지어진 곳이... 한 곳 있습니다. 곧바로 영상 돌리겠습니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외부 감시망을 연결하자 주 모니터 위로 아무것도 없는 눈이 내려앉은 백색의 고원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지 않나?"
"이상합니다... 분명 반응이 있는데..."
관측소의 벽에 설치된 작은 카메라는 아무런 이상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앗 저기에!"
그 순간.
카메라 한쪽에 빠르게 지나가는 빛의 궤적이 보였다.
- 치지직...
감시원의 눈에 궤적이 보인 것과 동시에 관측소의 연결이 끊어졌다.
"통신장애인가?"
"네 그런것 같습니다... 한번 관측소에 연락해보겠습니다."
송출 중이던 신호가 끊어지는 일은 제법 흔한 일이었던 듯 감시원은 수화기를 들어 관측소에 연락을 넣을 준비를 마쳤다.
"...감시관님."
"자네까지 무슨 일인가?"
감시관은 한창 바쁜 순간에 뒤에서 자신을 부른 부하에게 인상을 찌푸린 채 쳐다보았다.
"관측소가 파괴되었습니다."
영상이 끊어진 것과 함께 관측소는 파괴되었다.
관측소가 파괴되기 전 유일하게 남은 짧은 순간의 기록영상에는.
은색의 거대한 새를 닮은 것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