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외전 : 은빛의 새
마수를 제압한 두 자루의 검과 함께 공간의 틈 사이로 나타난 것은 붉은 거인.
교단 최강의 무인 틴달로스와 그의 성체 붉은 틴달로스였다.
붉은 틴달로스는 허리의 양쪽에 검을 한 자루씩 장비하고 있었다.
어깨의 거대한 오른쪽 바인더 위에도 가로로 수납된 검이 두 자루가 있었으며 왼쪽 바인더는 방금 내던져진 검이 있던 곳인지 수납 칸만 남긴 채 비어있었다.
붉은 틴달로스는 갈라진 공간의 틈 위를 딛고 서 있었다.
< 차원의 너머에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
붉은 틴달로스의 안에선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나이가 있는 느낌의 목소리 였지만 그 목소리는 힘이 없는 늙은이의 것이 아닌 무인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무게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빠른 마수를 단번에..."
엘 르아살의 안에 타고 있던 엘리세바는 발아래에 양 날개를 검에 꿰인 채 버둥거리는 마수를 내려 보았다.
사도의 육신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속도로 날아가던 마수를 눈앞의 무인은 단 두번의 투척만으로 잡아내었다.
- 캬아아아악!
눈이 없는 마수의 머리가 하늘 위의 붉은 틴달로스를 올려본 채 입을 열었다.
그 입안에선 검붉은 빛이 모여 쏘여지려 하고 있었다.
- 콰앙!
입 안의 검붉은 빛이 모여지기도 전에 한 자루의 검이 내던져지면서 마수의 입을 세로로 찢어 꿰어 버렸다.
머리가 꿰여지자 펄떡이던 마수는 힘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마수를 제압한 틴달로스는 자신과 같은 높이에 떠있는 엘 르아살을 바라보았다.
[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성찬식의 아이여. ]
엘리세바는 자신을 돌아본 틴달로스를 향해 엘을 통한 교신을 시도했다.
< 이 목소리는... 역시 그 안에 계신 건 성자님 중 한분이시군요.>
엘리세바의 교신에 응하듯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방금 전 비야키에겐 닿지 않던 목소리가 틴달로스에게는 닿았다.
< 처음 뵙겠습니다. 하늘 너머의 성자님. 저는 교단의 수호자. 부끄럽지만 무인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틴달로스입니다. >
[ 당신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군요. 역시 당신은 제 2 사도의... ]
< 성찬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성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
[ 저 아이는 정말로 온전한 성찬을 받지 못한 것이군요... ]
엘리세바는 짧은 대화를 통해 이제는 마수가 되어버린 비야키를 내려 보며 조금 슬픈 표정을 지었다.
< 형제를 알고 계셨습니까? >
[ 세례명은 비야키라고 했지만... 누군가에게 거짓된 성찬을 받았어요. ]
< 거짓된 성찬 말입니까... >
틴달로스는 거짓된 성찬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짐작 가는 곳이 없는지 당당하던 그 목소리 끝이 조금은 흐려졌다.
[ 당신의 목적은 저 자처럼 이 세계를 파괴하는 건가요? ]
엘리세바는 조금 긴장한 채 틴달로스에게 물었다.
비야키가 조금 전 까지 보인 행동은 방공시설의 파괴. 만약 눈앞의 무인마저 같은 목적으로 이 세계에 찾아왔다면 그녀는 싸워야만 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사라진 형제를 찾아 이 곳까지 온 것뿐입니다. >
무인의 목적은 파괴와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저 사라진 비야키를 찾기 위해 이 곳으로 온 것뿐이었다.
[ 그건 다행이네요... 당신과 싸우면 이길 수 없을 것 같았어요. ]
무인의 대답을 듣자 엘리세바는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지쳐있는 듯 한 그녀의 목소리는 엘 르아살의 조종으로 인한 피로가 쌓인 듯 지쳐보였다.
...
엘리세바의 긴장이 풀릴 무렵 강한 엔진음과 함께 두 대의 전투기가 멀리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전진익이 달린 검은 전투기는 코어가 쓰이기 이전 옛 시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 이 쪽은... 데릴라1... 세라프는... 격추... 되었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옛 시대의 통신은 여과 없이 세상의 이치를 넘나드는 성체에겐 전부 들려왔다.
설원의 위에 쓰러진 세라프는 그녀가 엘 르아살로 환승하던 중 공격을 받아 조종석이 꿰뚫려있었으니 격추되었다는 판단은 타당한 판단이리라.
[...데릴라2... 아래에 거대한 무언가가 보인다... 차원수...?]
다른 전투기에서 들려오는 통신은 세 자루의 검에 꿰뚫린 비야키를 목격한 듯 본부를 향해 보고를 시작했다.
[쓰러진 차원수와... 소속을 알 수 없는 두 기... 으아악!]
- 콰챠아아아악!
힘을 잃은 줄 알았던 마수는 자신의 위를 지나가는 전투기를 향해 살덩이를 뻗어 올려 전투기를 붙들어냈다.
[...데릴라2!]
- 탕 탕 탕 탕!
자신의 동료가 낚여채가는 것을 본 전투기는 곧바로 살덩이를 향해 기총을 갈겼다.
- 후욱...!
그러나 전투기를 쥔 살덩이가 다른 전투기를 내려찍어 조종석부터 뭉개 찍어버렸다.
살덩이에 찍힌 전투기의 반투명한 캐노피의 안은 파일럿이 터져나간 듯 붉은 자국이 번졌다.
- 쾅!
파일럿을 잃은 전투기는 그대로 떨어져 마수의 위로 떨어지며 연료탱크를 폭발시켰다.
- 철퍽!
연료탱크가 터지며 일어난 폭발은 아래에 있던 마수를 찢어 터뜨려내며 역겨운 살덩이를 설원 위로 흩뿌려내었다.
세 자루의 검에 묶여있던 살덩이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찢겨진 살덩이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여 구물거리더니 다시 날개가 달린 형상으로 빚어졌다.
빚어진 것은 조금 전의 크기보단 작지만 여전히 흉물스러운 살덩이로 포장된 마수일 뿐이었다.
- 캬아아아악!!
역겨운 날개를 펼친 마수는 도망치려 하지 않고 머리 위의 틴달로스와 엘 르아살을 향해 적의를 품은 듯 울부짖었다.
< 이 곳에 내버려둘 수는 없겠군요. >
무인은 눈앞에 보이는 변질 되어버린 것을 막기로 결심했다.
마수를 검으로 꿰어도 임시방편일 뿐 저대로 내버려둔다면 마수는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삼키고 말 것이다.
- 철컥
붉은 틴달로스가 손을 뻗자 바닥에 꽂힌 세 자루의 검은 양 손과 어깨의 바인더 위로 돌아왔다.
[ 더 많은 사람이 오기 전에 이 곳에서 막는 수밖에 없겠어요. ]
엘리세바 역시 마수가 기지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검을 들어올렸다.
---
- 샤아아아!
틴달로스의 양 손에 들린 붉은 검이 강하게 빛을 내며 휘둘러졌다.
- 푸샤악!
거대한 참격이 마수의 날개와 몸을 갈라놓자 하얀 눈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 철퍽... 철퍽...
갈라진 틈 사이로 노출된 마수가 되어버린 비야키의 코어는 붉은색이 아닌 어두운 검은색을 띄고 있었다.
코어는 심장처럼 맥동하듯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둘로 나뉘어진 몸체를 이어 붙이자 마수는 언제 잘렸냐는 것처럼 공중을 향해 뛰어 오르려 했다.
- 채앵!
엘 르아살은 코어를 노려 세검을 정확히 내질렀지만 코어를 지키려는 듯 세검의 끝은 원래의 형상을 남기고 있던 은색의 날개에 막혀버렸다.
오히려 세검의 날을 날개로 붙잡은 마수는 자신을 공격한 엘 르아살을 붙잡으려는 듯 살덩이가 세검의 날을 타고 감겨 오르기 시작했다.
"쳇!"
침식하려드는 마수의 의도를 파악한 엘리세바는 세검의 날을 분리시켜 손잡이만 쥔 채 뒤로 피했다.
< 멀리서 베어버리면 재생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삼키려 하다니 성가신 적입니다. 재생력만 둔다면 베헤못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군요. >
여러 번 베어냈지만 그 때마다 재생되는 마수를 내려 보며 틴달로스는 이야기를 꺼냈다.
눈앞의 마수는 작지만 끈질긴 생명력만큼은 대형 차원수인 베헤못과도 견줄 정도였다.
토벌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성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수가 얼마나 성가신 적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 계속 재생하고 있지만... 저 것엔 영혼이 없어요. 빈 그릇을 오염으로 채워진 것일 뿐이에요. ]
눈앞의 것을 마수로 바라보는 틴달로스와 다르게 엘리세바는 영혼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눈에는 눈앞의 살덩이는 제 2 사도의 껍질을 뒤집어 쓴 끈적한 오염의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불경한 마수는 일반적인 공격으로 쓰러뜨릴 수 없다.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그 때 엘리세바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 저걸 퇴치할 방법이 떠올랐어요. ]
< 경청하겠습니다. >
무인은 엘리세바의 말에 질문조차 표하지 않고 곧바로 수긍하였다.
[ 아마도 저라면 저 것과 성체를 분리해낼 수 있을거에요... 직접 손으로 닿아야겠지만요. ]
비야키의 코어를 중심으로 기생한 오염을 자신이라면 분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격납고에서 세라프의 코어를 정제했던 것처럼 성체와 오염을 나누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저 것에 직접 닿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 저 것이 분리된 뒤에 성자님을 삼킬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
[ 그 순간을 노려 당신이 베어주세요. 당신은 무인이잖아요. ]
< 과연... 알겠습니다. >
무인은 단 한 번의 질문. 그녀의 안위를 걱정한 질문을 끝으로 그녀의 계획을 받아들인 듯 수긍했다.
엘리세바는 틴달로스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곧바로 마수를 향해 뛰어 들었다.
"엘 르아살!"
그녀의 부름과 함께 백색의 기체는 강하게 빛나며 그 위의 고리 또한 찬란하게 빛났다.
백색의 고리는 신성한 헤일로처럼. 엘 르아살의 후광이 되어 타들어가는 듯 한 백색의 빛을 내며 마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 촤악! 치이이익...
엘 르아살은 세검이 아닌 날카롭게 세운 두 손으로 마수의 가슴을 찔렀다.
찔려진 두 손이 마수의 살점을 태우자 살점은 잠깐 주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엘 르아살의 팔을 타고 살점이 감겨오기 시작했다.
[ 크윽! ]
사도인 그녀에게조차 살점의 침식은 버거운 듯 사념 너머로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저 그녀의 작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 틴달로스는 검을 고쳐쥘 뿐이었다.
무인은 성급하게 나서지 않았다. 성자가 지시할 때 까지 검을 들고 기다릴 뿐이었다.
- 푸샤악!
잠시 후 살점이 엉겨 붙은 엘 르아살의 손 위로 검은 코어가 들어 올려졌다.
손에 들린 검은 코어는 생물의 심장처럼 급격하게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며 맥동하고 있었다.
코어는 자신을 감싼 손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듯 살점이 아닌 그림자와 같이 검은 촉수를 내지르며 저항하듯 엘 르아살의 두 팔에 완전히 감아 먹어치우고 있었다.
백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사도의 육신은 점차 회색빛으로 탁해지고 있었다.
- 쨍!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엘 르아살의 가슴이 꿰뚫렸다.
< 성자님! >
[ 저는... 괜찮아요! 조금만 더... ]
정말 엘리세바의 능력이 효과가 있었던 듯 검은 코어는 자신을 형성한 살점에게서 은빛의 새를 흘려내고 있었다.
"...코어가 없지? 엘 르아살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아."
엘리세바는 꿰뚫린 사도의 가슴 안을 꾸물거리며 헤집는 촉수를 비웃었다.
사도에게는 코어가 필요하지 않다. 죄를 가지고 태어난 자들만이 위로 오르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니 죄 없이 태어난 사도들에겐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촉수는 엘 르아살의 가슴을 넘어 조종부의 바닥까지 뚫은 채 그녀의 발 아래로 감겨오기 시작했다.
"으윽... 조금만... 조금만 더..."
그녀는 발 아래로 쥐어 짜이는 듯한 격통을 참으며 분리 작업을 계속했다.
- 콰앙!
엘 르아살의 손에 붙들린 검게 물든 코어를 주축으로 한 오염에게서 은익의 비야키가 내던져졌다.
삼켜지기 전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은빛의 새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지금이에요! ]
은빛의 새가 내던져진 것을 확인한 엘리세바는 순수한 오염만을 손에 들어 올린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무인을 향해 외쳤다.
< 알겠습니다! >
붉은 틴달로스에게 장비 된 여섯 자루의 검이 한 자리에 모인다.
한 자리에 모인 여섯 자루의 검은 원래부터 하나의 검이었던 것처럼 거대한 검으로 조합되어 오른 손에 들렸다.
타들어가는 듯 한 붉은 검날은 정말로 공간 그 자체를 찢어발길 듯한 강렬함을 보였다.
- 촤아악!
거대한 검이 휘둘러졌다.
- 철컥
휘둘려진 거대한 검은 다시 여섯 자루로 나뉘어져 바인더와 허리로 나뉘어져 돌아간다.
거대한 참격이 휘둘러졌지만 검은 코어는 여전히 촉수를 내뻗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 철퍽! 철퍽!
엘 르아살의 조종석을 꿰뚫어 그 안의 사도를 노리는 검은 촉수는 엘리세바의 몸을 감아 올라가며 어느 새 허리 위 까지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 철퍼억...
그러나 한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 스륵...
검은 코어는 반으로 갈라져 잿가루 처럼 흩날려 흩어져버리며 그녀를 감고 있던 촉수조차 부스러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베어진 것 대상조차 베어졌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참격.
무인의 이름에 걸맞은 베기였다.
- 쿠르르르르!
곧 이어 검은 코어의 뒤에 있던 설산조차 반으로 갈라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베어진 산봉우리는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무인 틴달로스.
그는 정말로 공간을 베어낼 수 있는 교단 최강의 무인이었다.
---
- 콰아아아앙!!!
무너진 산봉우리는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키며 발아래에 얼어붙은 땅을 무너뜨렸다.
무너져버린 땅은 홀로 남아버린 은빛의 새를 깊고 깊은 속으로 삼켜 버렸다.
얼마나 깊이 삼켜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공간 너머로 은익의 비야키는 가라앉았다.
< 회수는 힘들겠군요... 적어도 유해라도 회수했다면 좋으련만. >
참격을 마친 틴달로스는 깊게 뚫린 구멍 아래를 내려 보고 금방 단념했다.
산사태가 가라앉아 겨우 시야가 보이게 되자 설원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공간을 밟고 올라 서 있는 붉은 틴달로스와 팔이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엘 르아살 뿐.
힘을 잃은 엘 르아살은 천천히 땅 아래로 떨어져갔다.
< 성자님! >
엘 르아살이 떨어지는 것을 본 틴달로스는 공간의 틈 위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떨어지는 엘 르아살을 두 팔로 받아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바닥에 내려진 엘 르아살의 아래로 힘겨워보이는 엘리세바가 내렸다.
촉수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고운 은색을 띄고 있던 머리는 듬성듬성 흑색이 섞인 듯 탁해보였다.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녀를 도우려는 듯 붉은 틴달로스의 안에서 남자가 뛰어 내렸다.
검은 양복. 마치 상복과도 같이 느껴지는 정장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는 높은 높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뛰어내려 그녀의 앞에 내려왔다.
"당신이 제 2사도의 아이... 이런 얼굴이었군요."
초췌해 보이는 엘리세바는 평소와 같은 나긋하지만 어딘가 힘겨운 목소리로 틴달로스의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성자님 설마 방금 전 저의 참격이..."
혹시 방금 전의 참격이 오염을 넘어 성자마저 베어버린 것이 아닐까.
무인의 얼굴에는 세월마저 베어버리진 못한 듯 나이를 나타내는 주름이 얼굴에 있었지만 젊은이와 같이 느껴지는 강한 눈빛은 어딘가 걱정을 띄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오염을 떼어놓느라 힘을 너무 쓴 것 뿐... 당신의 잘못은 없어요."
엘리세바는 어딘가 많이 힘들어보였다.
"조금 춥네요... 이상하네요. 추위를 느낄 리가 없는데..."
두터운 검붉은 색의 파일럿 슈트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기를 느끼듯 조금 떨기 시작했다.
[ 다시 잠에 드실 시간이 왔습니다... ]
그녀의 주위를 도는 엘은 평소의 침착하던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는 어딘가 슬프게 들렸다.
"어쩔 수 없죠. 저는 형제들 중 약했으니까... 체력 부족일지도요."
엘리세바는 엘을 향해 힘없이 웃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오염을 베어낸 무인을 올려보았다.
"부탁이 있어요. 교단의 아이 틴달로스. 저를 제 2사도가 잠든 곳으로 옮겨주시지 않겠나요. 다시 깨어날 때는 형제와 함께 하고 싶어요... 미하일과 더 놀아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엘리세바는 파일럿 슈트의 안쪽의 지퍼를 열어 꺾인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싱그러워 보이는 붉은 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성자님..."
"그냥 부탁하진 않겠어요... 보수로 남은 초콜릿 전부를 드릴게요."
- 툭
그녀가 손을 올려 백색의 원반을 툭 두들기자 작은 공간 너머에서 초콜릿이 담겨있던 박스가 톡 떨어졌다.
"그게 성자님의 뜻이라면... 알겠습니다."
무인은 잠들려는 사도의 눈높이에 맞추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마워요 틴달로스... 다음에 일어날 때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
엘리세바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눈이 감긴 것과 함께 나타난 흑요석처럼 검게 빛나는 관은 잠든 그녀를 안으로 서서히 삼켰다.
[ 다시 깨어나는 날 옆에서 뵙겠습니다. 주인님... ]
제 5 사도. 엘리세바는 잠에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깨어날 때가 올 때 까지.
---
남겨진 틴달로스는 설원 위에 놓인 거대한 검은 관을 들어올렸다.
무거운 관일 텐데도 그는 힘겨워하는 모습 없이 그 관을 조심스럽게 든 채 자신의 성체를 향해 걸어 나갔다.
"당신은 성자님의 기계천사군요."
엘리세바는 잠들었지만 엘은 남겨졌다. 사도를 지키는 것이 홀로 남은 천사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리라.
틴달로스는 엘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닌 것처럼 설원 위를 걸으며 말을 걸었다.
[ 그 곳에도 사도가 있었다면 나와 같은 형제가 있는가? ]
엘은 자신의 관을 부탁한 엘리세바의 뜻을 존중하듯 관을 옮기는 틴달로스에게 적대감을 품지 않았다.
성찬을 받은 자는 사도와 가까웠기 때문에 굳이 엘이 인간에게 그러했듯 적대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네 있습니다. 모습은 조금 달라졌지만 우리와 같이 뜻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료입니다."
[ 주인님이 잠들어 계신동안 말 상대는 부족하지 않겠군. ]
"성자님을 따르는 분이라면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엘."
두 명만 남은 설원의 위에서 틴달로스와 엘은 어느새 붉은 틴달로스의 앞에 도착했다.
양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붉은 거인을 향해 그들이 올라타려던 찰나.
"아아 불쌍한 비야키. 반쪽뿐인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었네."
둘 밖에 없어야 할 설원의 위에서 세 번째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높은 기괴한 듯 한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있는 것은 검은 넝마와 같은 천더미를 걸친 누군가였다.
키는 사람보다 한참 높아 누구나 올려보아야 할 높이에 있었고, 얼굴 위에는 검은 베일이 여러 겹 둘러져있어 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엘. 성자님을 부탁드립니다."
틴달로스는 그 말과 함께 아공간에서 태도를 꺼내어 검은 천을 걸친 자를 향해 휘둘러내었다.
- 풀썩
순식간의 참격과 함께 검은 천더미는 반으로 쪼개어져 바닥 위로 떨어졌다.
[ 망설임이 없군. ]
"망설임은 죽음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정말 멋진 말이네."
어느새 엘과 틴달로스의 사이에 있는 관 위에 검은 천더미가 올라타 있었다.
"어느 틈에!"
무인은 다시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무인은 검을 잡을 수 없었다.
그의 오른팔은 사라져있었다.
"...무슨!"
그의 오른팔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틴달로스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원래부터 없었던 신체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
그들의 위에 서있는 붉은 틴달로스 조차 오른팔이 사라져 있었다.
"너는 성가셔. 왕 조차 알아채지 못한걸 알아채고 쫓아와버렸어."
검은 천더미는 허리가 기괴하게 꺾이며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로 팔을 잃은 무인을 보고 웃듯 천더미가 들썩거렸다.
"팔을 잃은 정도로 검을 잡지 못할 것 같더냐!"
무인은 바닥에 꽂힌 태도를 왼손으로 다시 잡았다.
"이야기를 나눌 생각은 없나보네. 그냥 죽어줘."
검을 들고 달려드는 무인을 향해 검은 천더미는 한숨을 쉬고.
무언가 했다.
아무도 그 행동을.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가 이루어졌다.
- 풀썩
무인은 눈의 위로 쓰러져버렸다.
[ 무인! ]
엘조차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 만큼은 알 수 있었다.
무인은 죽었다.
너무나도 쉽게.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사도를 한번 구경해볼까?"
무인이 죽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검은 천더미는 틴달로스의 시신을 확인하지 않은 채 자신이 깔고 앉은 관을 억지로 열려는 듯 비틀기 시작했다.
[ 주인님에게 손을 대게 내버려둘 것 같더냐! ]
백색의 원반은 아공간에서 날카롭게 벼려진 하얀 세검을 꺼내어 엘리세바의 관을 비트는 검은 천더미를 향해 내던지려 하였으나.
- 콰악!
검은 천더미의 안에서 창과 같은 모양의 검은 가시가 솟아나와 엘을 꿰뚫었다.
[ 내버려 둘... 것... 같...]
"시끄러워."
- 으적 으적 으드득 으득 득
엘을 꿰뚫은 검은 천더미는 창끝에 꿰인 엘을.
기계로 이루어진 천사를.
먹고 있었다.
[ 미안합.. 주인.. 약속의 때 까지... ]
- 콰드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은 완전히 먹혔다.
깨진 도자기와 같은 백색의 조각이 검은 천위로 지저분하게 떨어졌다.
"역시 천사는 먹을게 못 돼. 사도라도 잡아 먹어볼까."
식사를 마친 검은 천더미는 다시 한 번 관을 잡아 비틀기 시작했다.
"사도는 어-떤-맛-일-까?"
검은 천더미는 흥겨운 듯 콧노래를 부르며 관의 끝을 쥐자 관이 으드득이는 소리를 내며 모서리가 깨져나갔다.
- 아아아 아아아
"조금 깨진 것만으로 절망하다니. 사도는 감정에 참 약하단 말이야."
깨져가는 관은 절망과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시끄러워."
검은 천더미는 손 위에 얹어졌는데도 세상을 절망하듯 소리를 지르는 관의 조각을 저 아래의 눈구덩이 밑으로 던져버렸다.
"뭐 역시 사도는 못 먹겠지. 쓸 곳이 많으니까."
검은 천더미는 사도를 먹으려는 것을 포기한 듯 관을 내버려두다가 발아래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 아래에 떨어진 곳은 무인이 함께 옮기던 엘리세바의 초콜릿 상자였다.
"이게 더 맛있겠는걸!"
검은 천더미는 발아래에 떨어진 초콜릿 상자를 가느다란 팔로 들어 올려 베일의 안으로 털어넣었다.
"아아 역시 죄악을 품고 태어난 인간이 만들법한 맛이야. 정말 맛있어."
단번에 초콜릿을 삼킨 검은 천더미는 즐거워진 듯 그 자리에서 춤을 추듯 들썩거렸다.
"이제 교단으로 돌아가 볼까. 왕 처럼 속이기 쉬운 멍청이들만 남았으니까. 정말 재밌을 거야."
검은 천더미는 자신의 몸을 크게 부풀려 설원 위를 뒤덮었다.
넓어진 검은 천막은 주인 없이 남겨진 두 대의 기체와 하나의 관을 삼켰다.
잠시 후 검은 천막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