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SP. Once Upon A Time
"헉...!"
정신을 차려보니 백색의 인테리어로 치장된 조종석 안 이었다.
이질적이고 낮선 풍경이어야 할 테지만 나는 이 곳을 알고 있다.
알겠다. 이건 분명 방금 전 까지 개발하던 게임에 등장하는 기체의 조종석 안이다.
기체의 이름은 '엘 □□□□'. 정식 업데이트에서 새로 추가 된 기체였다.
어째서 내가 이 안에 있는 건지는 의문이 들었지만. 업데이트 내역을 전부 읽은 뒤 실행하자 이 세계 속이었다.
그런 것보다. 지금 이 기체는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흑색의 하늘 에서 점점 해가 저물어가는 오후의 도심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 저 아래에서 보이는 것은 거대한 괴물. 차원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차원수들은 도심 한 가운데에 놓인 청색의 기체를 감싸듯 포위하고 있었다.
< 도망쳐선 안 돼...! 내가 도망치면 모두를 지킬 수 없어...! >
통신채널 너머로 다급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구나.
저 푸른 기체에 타고 있는 아이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다.
우연히 방치된 군용 기체. 베레시트 1호기에 탑승한 것을 계기로 고난에 휘말릴 운명을 가진 아이.
힘든 현실 속에서 주인공의 성장을 바라보면서 많은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전까지는 화면 너머에서 시련에 맞서는 모습을 응원해주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나와 이 엘 □□□□ 라면 저 아이를 시련과 고통 속에서 구해줄 수 있다.
- 슈아아...!
엘 □□□□의 머리 위로 신성한 원. 헤일로가 강하게 떠오르며 낙하 속도가 점차 줄어들어간다.
- 콰드득!
헤일로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의 오른 손에 쥐어진 백색의 거대한 창이 베레시트를 노려오는 차원수를 단숨에 꿰뚫어냈다.
< 창...? 백색의 차원기...? >
"내가 너를 구해줄게."
---
"더 안 먹니?"
"저는 괜찮아요..."
조명이 어둑한 작은 방에서 상 위에 놓인 설렁탕을 먹으며 눈 앞의 여자아이.
아직 이름을 물어보질 못했으니 적당히 부르자면. 주인공양을 바라보았다.
아직 한창 클 나이일 텐데 이것밖에 안 먹다니 아저씨는 걱정이야.
"...아저씨는 누구에요?"
숟가락을 내려놓은 주인공양은 어딘가 겁을 먹은 것처럼 조심스럽게 눈만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전지전능한 신?"
"신이요?"
"뭐 농담이지만."
이 세계를 창조한 사람 중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둘러대어 이야기했다.
"... 왜 이런 짓을 한건가요?"
"이런 짓? 어떤 걸 말하는거야?"
주인공은 손을 뻗어 반 이상 무너진 벽 너머의 잔해를 가리켰다.
"아 저거? 도통 이야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고 너를 잡아가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
손끝이 가리킨 것은 팔과 다리가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는 녹색의 기체. 케루브의 잔해였다.
힘조절을 한 덕분에 기체의 팔 다리만 꺾었지만 뭐. 다섯대를 불용품으로 만든 건 심했나.
---
"좋아! 그렇게 계속해!"
< 네! >
나의 지시를 들은 푸른색의 베레시트가 양 어깨에 달린 포격형 유닛을 사용해 중형 차원수를 쓰러뜨린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뒤로 벌써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타브하도 처음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나와 엘 □□□□를 제압하기 위해 마찰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력의 일부인 파일럿겸 주인공의 교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타브하와 적대하는 세력인 '교단'도.
'...저희는 성자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나를 '성자'로 인정하며 주인공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최소 목적만을 위해 조용히 활동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죽지 않고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 잘 된 게 아닌가.
이 세계에서 교단의 위험은 사라졌다.
주인공은 더 이상 위험한 이계의 존재와 싸울 필요 없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차원수와 전투경험을 쌓으며 장래가 유망한 파일럿으로써 살아가면 된다.
- 삐이이익!
< ...게이트가 열렸어요! >
커다란 공습경보와 함께 도시 위로 거대한 적색의 게이트가 열렸다.
"아론 마흐타."
게이트가 열린 것을 확인한 뒤 짧은 키워드를 읊조리자 기체의 손 안에서 ■■■■의 ■■가 나타났다.
- 콰득!
적색의 게이트는 구겨진 종이뭉치처럼. 우그러든 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미안해. 방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하네."
"저는 괜찮아요..."
"여자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출장을 나왔는데 방이 하나 밖에 없을 줄이야.
이런 어린애랑 단 둘이 호텔의 스위트룸에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보호자로 온 것이다.
만약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개발부장님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는가.
"아저씨는 소파에서 자도 되니까 감기 걸리기 전에 얼른 씻고 자렴."
손짓으로 주인공을 보낸 뒤 웰컴 기프트로 받은 와인을 따 한 잔 음미했다.
이 것은 좋은 것이다.
...
두 잔을 마시고 눈이 감겼는데.
깨어나 보니 침대에 둘이 나란히 누운 채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파에 곯아떨어진 나를 끌어 옮겨 눕혔을 뿐 아무 일은 없었다는데.
...개발부장님을 무슨 얼굴을 하고 봐야 하는 거지.
---
"파파!"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니..."
밝은 금색의 머리를 흩날리며 달려오는 여자아이.
붉은 베레시트. 2호기의 파일럿인 마샤 필리스티아.
이대로 달려오게 내버려두면 몸에 부딪힐 것이 뻔했으므로 힘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양 손을 뻗어 미샤의 허리를 잡은 뒤 공중으로 조금 들어 올렸다.
"진짜 아버지가 들으면 슬퍼하시겠네."
"그... 파파도 파파지만. 파파도 파파야."
뭔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모국어로 빠르게 말했지만 결국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젊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어려운 법이다.
"미샤!"
나와 미샤의 실랑이를 본 듯한 주인공이 놀란 듯 이 쪽으로 달려왔다.
"떨어져! 아저씨가 곤란해 하잖아!"
"싫어! 더 있을 거야!"
어린아이처럼 때를 부리는 미하일을 나에게서 떼어놓으려는 듯 주인공은 미하일을 잡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도 곤란하죠? 네?"
주인공은 자기주장에 동의 해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음..."
어떻게 대응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미샤는 고향에 있는 자기 아버지가 그리워서 나에게 이러는 게 아닐까.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외국인 준장에게 자기 딸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보호자로써의 책임을 지는 것뿐이다.
"너야말로 늘 파파를 곤란하게 하잖아!"
"아니거든!"
"앗! 보스! 헤헤 헤헤!"
주인공과 미샤가 작게 다투는 사이 멀리서 안경을 쓴 여자아이가 손을 흔들며 나에게 인사했다.
"부탁한 그건 잘 됐어?"
"보스의 설계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얼마 안 남았어요!"
눈앞의 여자아이. '박사'라 불리는 연구원은 내가 부탁한 연구를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 직장은 여자가 참 많네. 파일럿과 연구원이 혼재된 직장에서 전부 여자라니.
뭐 전부 애들뿐이지만.
"대단해. 천재는 역시 천재네."
"조금 더 칭찬해주셔도 좋아요!"
"역시 최연소 연구소장이야. 박시..."
"아아아 아앗!!! 지금 이름 부르려고 하셨죠! 그건 안돼요!"
조금 칭찬해주려고 했더니 무심코 이름을 부를 뻔 하자 엄청 부끄러워했다.
같이 일하게 된 한 달 동안 제법 친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은 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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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순간이 왔구나."
교단의 활동을 막더라도 마지막 순간은 오게 되었다.
게이트는 점점 커져가며 두 개의 세계를 하나로 삼켜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있으니 이 세계. 아니 차원 너머의 세계마저 지켜낼 수 있다.
베레시트의 근원이 되는 코어와, 교단의 성체. 틴달로스를 이루는 코어, 마지막으로 나의 엘 □□□□ 까지.
기체의 양 손에 들린 □□□□의□□ 와 ■■■■의 ■■가 세 개의 코어와 공명한다.
엘 □□□□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세 개의 신성한 원.
헤일로.
헤일로가 사라져가는 이 세계와, 가라앉은 교단의 세계를 안정화 시킨다.
게이트가 사라지며 무너져가는 세계는 안정을 찾았고. 가라앉은 교단의 세계는 마침내 떠오르게 되었다.
세계는 마침내 게이트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
"구해주신다는 약속... 정말로 지켜주셨네요."
모든 것이 끝난 뒤 엘 □□□□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해준 것은 어느새 머리가 제법 길어진 주인공이었다.
언제까지나 아이 같아 보였지만. 이제 여자가 된 티가 제법 나는구나.
"약속했잖아?"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나는 전지전능했다.
"부끄럽네."
모두를 구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거에요?"
"시골이라도 내려가서 과수원이라도 가꿔볼까."
"같이 가도 괜찮을까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아저씨 뒤치다꺼리는 할 필요 없어."
세계는 평온해졌으니 주인공은 더 이상 파일럿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구한 세계 속에서.
모두 평화롭게 지내면 된다.
"싫어요."
나의 제안을 거절한 주인공은.
한 걸음씩 앞으로 다가오더니.
- 쪽
나의 뒷머리를 잡은 채 발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아저씨를. 따라갈거에요."
... 신은 그의 나라에 여전히 계시며. 세상은 변함없이 평온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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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인가."
등을 가득 적신 불쾌한 찝찝함에 잠에서 깨서 일어났다.
잠에서 깨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가느다랗고 새하얀 두 팔.
연약하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패배자의 비참한 몰골이다.
꿈의 내용은 어딘가 흐려진 것처럼 잊혀지고 있었지만.
내가 바라던 무언가를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전지전능한 나는 모두를 구했다.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모두에게서 도망쳐버렸다.
무너져가는 회색의 폐허 속에서.
나는 반파 된 아르베넷과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