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화 (프롤로그) (1/256)

<패스파인더> 1부

1화

프롤로그

“이거 팔고 싶어요.”

가시나무 잡화 상점의 주인 폴른은 소녀가 가게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상점은 그리 작지 않은 상점이고, 거기다 남쪽으로는 미르드, 북쪽으로는 칼츠버그, 서쪽으로는 바랄라인 제국을 두고 있는 지형 탓에 하루 동안 오가는 여행자의 숫자도 무시 못 할 정도로 많았다.

그쯤 되면 여행자들보다 길 가는 개 한 마리에 더 관심 가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른은 흥미롭게 소녀를 주시했다.

잡화 상점의 주인이란 직업을 갖고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루에 몇십, 혹은 몇백의 여행객을 보게 된다. 사람을 보는 것에 아주 이골이 나 버리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눈앞의 이 소녀는 특별했다. 그녀는 무려 동양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열다섯은 넘었을까 싶은 어린 동양인.

도시에 아무리 여행자가 썩어 나도록 많다고 해도, 동양인은 아직 희귀한 존재다. 동대륙과의 개혁 개방을 한 지 몇십 년도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저기요?”

동양인 소녀가 불안한 기색으로 폴른을 불렀다.

진짜 머리가 까맣구나, 눈도 까맣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던 폴른은 소녀가 불안함에 가판대에 올려 둔 물건을 다시 회수하려고 손을 꼼지락대자 그제야 느릿느릿하게 가판대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손가락 반 마디만 한 굵기에, 투명한 주황색의 몸통을 가진 데다 그 몸통의 재질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보석도 유리도 아닌데 투명하고 매우 가볍다.

그리고 윗부분에는 작은 쇳조각이 달려 있었는데, 도무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예쁘장한 것이, 장식물인가?

“라이터라는 거예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폴른의 손에 들린 라이터를 건네어 받아 쇳조각의 한편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딱 하는 소리가 나며 쇳조각의 구멍에서 불이 솟아난다.

그 광경에 폴른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보기 드문 동양인 소녀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녀는 마법 도구를 갖고 있었다.

부싯돌로 불을 붙이면 된다지만 그래도 마법용품인 이상 한두 푼 하지는 않을 터.

만약 이것이 동양의 물건이라면 더 큰 값으로 되팔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거 큰손님이었군.’

마법용품은 못해도 단위가 골드다. 게다가 마법용품을 마법 상점이 아니라 잡화 상점에 팔러 온 것을 보니 이 동양인 소녀는 서대륙의 경제에 무지한 것이 분명하다.

폴른은 세상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것 같던 태도를 치워 버리고 그 라이터를 받아 들어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폴른의 머릿속은 라이터를 관찰하는 대신, 중요한 고민을 하느라 바빴다.

‘얼마를 부를까?’

이 소녀가 이걸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 도둑질한 건 아닌지 생각하던 폴른은 곧 소녀의 옷차림으로 관심을 돌렸다.

처음 보는 복식에 처음 보는 재질의 가방. 전에도 동양인 손님을 보긴 했지만 소녀는 그와도 많이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신발을 보면 산을 걸어 내려왔음이 분명한데 등의 가방이나 옷차림은 마치 새것처럼 말끔했다. 소녀의 안색은 조금 지쳐 보였지만 말이다.

“음, 부싯돌이나 다름없구먼.”

간편함과 장식성, 그리고 활용도로 따지면 솜씨 좋은 사람이 잘 사용해야 간신히 불똥을 얻을 수 있는 부싯돌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폴른은 일부러 물건을 깎아내렸다.

나는 이것의 값을 후려칠 거라고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폴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진해 보이는 까만 눈망울에, 폴른은 생각한 것보다 높은 금액을 불렀다.

“50쿠퍼.”

마법 물품은 최소한 1골드는 넘는다. 이 제품의 희소성을 생각하면 적정가는 3골드 정도 될 것이다. 폴른은 거의 몇 백배가 넘게 가격을 후려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른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나타나지 않았다. 흥정에 재주가 없으면 벗겨 먹히는 게 당연하다. 그래야 상인들도 먹고살 것 아닌가. 그것이 폴른의 지론이었다.

폴른이 부른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쌌던 건지 소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밖에 안 돼요?”

“아가씨, 이건 부싯돌이나 마찬가지야. 부싯돌이 10쿠퍼인데, 다섯 배나 쳐줬다고.”

원래 20쿠퍼를 부르려던 폴른이 억울해하며 항변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정말로 폴른이 값을 후하게 쳐줬다고 생각했을 만한 연기력이었다.

당연히, 모르는 사람인 소녀는 그 말에 홀딱 넘어가 버렸다.

폴른은 노련한 상인이었고, 소녀는 물건의 가격이 정찰제인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왔기에 그의 말에 그러려니 했다.

과일을 2천 원이라 적어 놓으면 2천 원에 구입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 앞에서 상인의 멱살을 잡고 500원에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은 흥정이 아니라 협박을 잘 하는 것이었다.

일단 폴른보다 정보도 없고, 무언가를 사 보기만 했던 그녀는 사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팔아 보려 했기에 대부분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원래 무언가를 사는 것보다 팔 때 물건 값이 헐값이 되지 않던가. 심지어 중고니까, 별것도 아닌 물건이니 더욱 그러했다. 그깟 라이터 하나가 해 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좋아요.”

“좋아. 잘 생각했어.”

그래도 이렇게 쉽게 납득할 줄은 몰랐던 터라 얼떨떨했지만 폴른은 아무렇지도 않게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의 2골드 99실버 50쿠퍼의 이문을 남긴 폴른이었기에 그 미소는 진심이었다.

폴른에게 라이터를 넘기고 50쿠퍼 동전 하나를 건네어 받은 소녀는 가방을 열어 코펠과 침낭, 보온병과 세발 버너를 꺼내었다.

매대는 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누워도 될 만큼 널찍했기에 자리는 충분했다. 이것들까지 팔아넘길 생각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돈이 너무 적었다.

여관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에 읽은 판타지 소설을 참고하면 50쿠퍼는 작은 돈이었다. 그 책과 이곳의 화폐 단위가 다를 수도 있지만,

최대한 많은 돈을 손에 넣어 두는 것이 좋으리라 그녀는 판단했다.

“이거 전부 팔게요.”

“아가씨 여행용품 아닌가? 여행을 그만두려고?”

폴른은 조금 놀랐다. 그렇게까지 값을 후려친 이유는 그녀가 어디를 봐도 여행자의 행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길로 떠나면 두 번 보기 힘든.

그러나 침낭과 세발 버너의 자세한 용도는 모르겠지만, 눈치로 때려 맞춘 바에 의하면 그것들은 여행용품이었다.

이걸 다 판다는 이야기는 여행을 접겠다는 소리다.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 같아 후려쳤는데, 나중에 경비대라도 데려오면 피곤해진다.

뭐,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딱 잡아떼면 그만이지만.

“아뇨, 저는 다시 가져오……. 아니, 다 방법이 있으니까요. 설명드릴게요. 이건 침낭. 이렇게 펴서 안에 들어가서 자는 거구요. 이것들은 코펠이라고, 조리 도구구요. 보온병은, 내용물의 온도가 오랜 시간 변하지 않도록 해 주는 물건이에요. 그리고 이건 모닥불 대신 쓸 수 있는 세발 버너구요.”

폴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박이다. 전부 범상치 않은 물건들이다.

침낭이 조금 애매하긴 했지만, 만져 본 바에 의하면 지금까지 본 적도 없을 만큼 고급 물품이었다.

그는 재빨리 계산했다. 그녀가 이 도시에 어느 정도 머무를 것으로 보였기에,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후려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상인이지 사기꾼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라이터와 가격 차이가 너무 나면 안 되니 적절히 조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침낭은 정말 상등품이구먼. 음, 이 정도면, 중고 물건인 걸 감안해서 12실버 쳐주겠네. 아가씨가 물건을 깨끗하게 써서 이만큼 쳐주는 거야. 그리고 이 코펠은, 그냥 그릇이구먼? 그래도 재질이 특이하고 여러 개니까 8실버. 보온병이라, 나는 처음 보는 물건인데, 흠, 온도가 유지될 필요가 있을까? 5실버 쳐주겠네. 이 세발 버너는 모닥불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나무가 없거나 불을 켜기 힘든 동굴 같은 장소에서는 요긴해요.”

며칠간 실제로 그렇게 잘 써먹었던 그녀가 덧붙였다.

이게 제일 비싸 보였기에 확 후려치려던 폴른은 괜히 멋쩍음에 헛기침을 하곤 재빨리 가격을 불렀다.

“30실버. 어때? 만족하나?”

“네. 좋아요.”

드디어 자신이 기대했던 돈 단위가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캠핑 장비를 다 팔아넘겼어도 지금 가방에는 세면도구와 식량이 있었기에 다음 문을 열 수 있는 이틀 후까지 버티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이곳은 도시이니 여관에서 자며 문이 열리길 기다리면 될 거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폴른은 셈을 하느라 바빴다. 종이에 숫자를 끼적끼적 적곤 한참 동안 두 수를 더하고 그 숫자에 손가락을 접어 가며 더했다.

여기 사람들은 유난히 수학에 약했다. 저리 어렵게 계산하기가 더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55실버예요. 12실버에 8실버면 20실버, 거기에 보온병까지 더하면 25실버, 버너가 30실버니까 전부 다 더해서 55실버요.”

폴른은 흘긋 그녀를 보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계산에 몰두했다.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계산이 끝나 그녀가 말한 것과 동일한 숫자가 나오자 그제야 놀란 얼굴을 했다.

“자네 정말 셈이 빠르구먼.”

폴른이 챙겨 주는 50실버 동전 하나와 5실버 동전을 챙겨 넣으며 소녀가 담담히 별말씀을 하고 겸양했다.

그녀가 배낭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그 동전을 갈무리하는 것을 끝까지 기다린 폴른이 서둘러 물었다. 정말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자네, 어디서 왔나? 내가 이 일 하면서 동양인을 많이 보긴 했는데 자네 같은 동양인은 처음이야.”

소녀는 고개를 들어 폴른을 바라보았다. 곧 소녀의 입술이 열렸지만, 폴른이 기다리던 대답은 아니었다.

“수고하세요.”

소녀가 대답해 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깨달은 폴른이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잡화 상점을 나서는 그녀, 가람의 머릿속으로 지난 스무 날의 다사다난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며 씁쓸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Chapter 1

“너 효연이 기억하니? 걔가 글쎄 유학 갔다 오더니 외국계 기업에 취직했다더라. 너는 언제까지 알바만 하고 있을 거야? 이제 너도 좀 제대로 된 회사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날, 그날의 기억은 어머니의 짜증스러운 질책으로 시작되었다.

가람의 어머니는 가람이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현관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닦달했다.

이미 한두 번 들은 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이 그날따라 치솟는 짜증을 참지 못한 것은 알바처에서 진상 손님을 만나 몸도 마음도 말도 안 되게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다면 알아보고 있다고 느긋하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을 텐데 가람은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의 질책에 걱정이 섞여 있다는 생각도 못 할 만큼 그저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참던 것이 폭발했다고 해도 좋으리라.

“그러는 엄마야말로 집에서 매일 빈둥빈둥 놀고 있잖아!”

순간적으로 나온 말에 가람과 가람의 어머니, 미연이 동시에 굳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미연이었다.

미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다가 극심한 배신감에 가람을 노려보았다. 이를 악문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가 감히 지금 엄마한테…….”

너무 심했나 싶어 뉘우치려던 가람의 짜증이 미연의 말에 다시 한 번 폭발했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딸에게 감히라는 말을 써 가며 자신의 권위를 찾기 바쁜 그 말에 원망의 마음이 치솟았다.

“감히? 감히라고? 엄마가 뭔데 나한테 감히라고 해? 무슨 내 상전이야? 내가 엄마 노예라도 돼? 고등학교 내내 노예처럼 엄마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

마지막 말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가람이 빽 소리친 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가람은 미연을, 미연은 가람을 노려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정적을 깬 것은 퇴근하고 돌아온 가람의 아버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심상찮은 거실 분위기에 흠칫했다가 두 사람이 싸움을 하고 있음을 곧 깨닫고 혀를 찼다.

“뭘 더 바라냐고? 너 말 잘했다. 내가 너한테 어디 큰 거 바랐니? 고등학교에, 대학 교육도 다 시켜 줬는데 내가 너한테 그거 하나 못 바라? 어느 집 애들은 말 안 해도 부모님 호강시켜 주고 싶다고 그렇게 열심이라는데, 너는 지금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야? 그렇게 너 부족한 거 없이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는데, 제대로 된 직장 잡아 오라는 말도 못 해?”

다시 선공을 날린 것은 미연이었다. 가람을 대학에 보내고, 4년간 등록금을 대며 허리가 휘도록 노력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무엇보다 크게 공감한 것은 가람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가람의 눈에는 부모님이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추궁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 엄마 아빠 살던 때랑 같은 줄 알아? 엄마 아빠는 학창 시절 추억 이야기했었지? 그때야 그렇게 학교 가서 대낮에 잔디밭에서 기타 치고 놀아도 대기업에서 뽑아 줬겠지. 매일 나한테 노력, 노력 하시는데, 사실 내가 지금까지 한 노력이 아빠가 첫 직장에 취업하려고 노력한 거의 몇 배는 될걸? 그리고, 유학 갔다 와서 취업한 애랑 비교할 거면 나도 유학을 보내 주던가!”

가람은 씹어뱉듯 마지막 말을 외쳤다. 미연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딸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얼마나 힘겨운 상황인지도.

가람은 언제나 착하고 성실한 딸이었고, 언젠가 반드시 자신의 자리를 찾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갈 자신의 딸이, 이런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기에 모진 말이 나오고 말았다.

방법이 잘못되었음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근보다는 채찍이 언제나 큰 효과를 발휘했기에, 이번에도 습관처럼 채찍을 휘두르고 만 것이다.

미연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연히 서 있는 동안, 가람은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내일은 내 생일이란 말이야. 잊어버렸지?”

절대 잊지 않았다. 미연은 물론이고, 갑작스레 이 폭풍에 휘말리게 된 가람의 아버지까지.

늘 야근을 하던 가람의 아버지가 오늘따라 일찍 귀가한 것은 내일 있을 가람의 생일 파티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가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방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달칵하고 닫힌 방문에 두 사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가람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이라도 시원하게 났으면 좋겠는데, 원래 잘 울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런지 눈물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이 잘못한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든 원망하고 싶었다. 부모님을 원망해도 이 상황을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

부모님은 최선을 다해 주셨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못나서 그런 것을 괜히 엄마에게 상처만 주었다.

엄마가 조금 서툴 뿐 진심으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 아니, 취직 걱정도 없고 아무 걱정도 없는 어디로든 가고 싶다. 어제 읽은 판타지 소설 같은 그런 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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