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화 (2/256)

2화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던 가람은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잠깐 누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피로 때문에 시간 감각이 둔해졌는지 시계는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 후의 시간이 빨리 가 버리는 것은 어제오늘 있던 일이 아닌지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아직 씻지 않아서 다시 씻으러 나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싫었다. 아직 거실에 부모님이 있으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등하던 가람은 결국 다시 침대에 앉았다. 하루쯤 씻지 않는다고 죽는 건 아니니까.

묘한 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아니, 소리라고 하기도 조금 뭣했다.

밤이 우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 우주나 별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은 이상한 소리였다.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느껴졌다. 이명과는 조금 다른, 절대 소리는 아니지만 소리라고 느껴지는 무언가.

가람은 보지 못했지만, 시계는 이때 정확히 12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가람의 생일이었다.

“무슨 소리지?”

가람은 왠지 무서워서 일부러 소리 내어 말하며 분주히 방을 뒤졌다.

혹시 전화기인가 싶어 휴대폰을 들어 봤지만 휴대폰은 기본 화면이었고, 컴퓨터가 켜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밖에서 나는 소리인가 했지만 방음창은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가람은 자신이 왜 그것을 아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이 소리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 소리는, 공간이 일그러지는 소리였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눈으로 ‘이것은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예요.’라고 적힌 것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감각 기관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방에, 가람의 작은 방에 다른 차원으로 가는 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깜빡 졸았나?”

가람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뇌의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거나. 그녀는 현실감을 되찾기 위해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팔을 꼬집어 봐도 자각몽에서 느낄 수 있는 몽혼한 느낌 대신 현실임이 확실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사이, 공간이 완전히 열렸다.

열린 문 안에는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빛깔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간간이 빛이 마치 물방울처럼 튀어 올랐지만 그 문 안은 끝을 알 수 없이 깊어 보였다.

이 문은 오로지 가람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가람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방 안에 열린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이라는 건 언뜻 듣기에 꽤 신비롭고 흥미진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정체불명의 상황에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가람은 공포는커녕 당황스러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다만, 그 문이 아주 아름답다고 느꼈다.

정말로 너무 아름답고 멋지다고. 그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람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녀는 조금씩 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람의 방에는 가람도, 가람을 집어삼킨 차원의 문도 사라지고 없었다.

* * *

차원의 문에 들어선 가람은 문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마주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고, 시골로 간다고 해도 요즘은 보기 드문 별 많은 하늘이었다.

거의 별 반, 밤하늘 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별이 많았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세 개의 달이 이곳이 절대 지구가 아님을 알려 주었다.

하긴, 방에서 차원의 문을 열고 나왔는데 뒷동산이라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세 개의 달 탓인지 밤인데도 그리 어둡지 않아서 밤눈이 밝지 않은 가람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가람이 서 있는 장소는 숲과 평야를 반쯤 섞어 둔 것 같은 장소였다.

경사가 없는 너른 평지에 발목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 작은 풀이 촘촘히 나 있었는데, 드문드문 자란 나무들이 불규칙하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숲이라고 하기엔 나무가 너무 없고, 평야라고 하기엔 나무들의 키가 너무 컸다.

가람은 우두커니 서서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어찌나 많은지 손을 뻗어 휘저으면 한 움큼 잡힐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모두 빛깔이 다른 별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가람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주었다. 거대한 우주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 하늘 아래 서 있으니 자신이 먼지보다 못한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아래 살고 있다면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엣취!”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람은 터져 나온 재채기에 정신을 차렸다. 코가 살짝 맹맹한 것이 감기에 걸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반쯤 빼놓고 그 문으로 들어선 탓에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짧은 반팔 차림이었다. 바지가 길어 맨다리가 풀에 쓸리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충동적으로 그 구멍에 뛰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데리러 올 친구를 부르려던 가람은, 곧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실소를 터뜨렸다.

달이 세 개나 떠 있는 이곳을 설명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당연히 전화 신호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법사가 되기만 하면 되나?’

가람은 얼마 전 읽었던 소설을 떠올렸다. 늘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가느라 바빠 가람은 판타지 소설이나 제대로 된 만화책 하나 접하지 못했었다.

가람이 접한 공상의 세계는 어릴 적 인성 교육을 위해 읽은 동화나 영화가 전부였다.

그런 가람에게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친구가 스트레스가 심할 때 가볍게 읽으면 머리 비우기 좋다며 권한 판타지 소설은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읽은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여고생이었는데, 고3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녀는 우연히 드래곤에게 소환되어 강대한 마법을 배워 세계를 주유하며 행복하고 아쉬울 것 없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었다.

아주 잠깐 그것이 부럽긴 했지만, 가람은 자신이라면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자신의 친구나 그간 커 오며 보았던 사람들은 어떡하고? 소설이니 그렇게 쉽게 남 잊어버리듯 잊었겠지만, 가족이란 원래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말이 심했어. 돌아가면 사과하자.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지?’

소설의 주인공은 드래곤이 소환했다 치지만, 가람은 자신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바람이 휭하니 불어 가람의 머리칼을 마구 흩뜨려 놓았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기온은 아니었지만, 가람의 팔에 소름이 돋도록 하기에는 충분한 바람이었다.

가람은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바람을 피할 곳을 찾은 후 나중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최고로 좋은 건 이 상황이 그냥 한여름 밤의 멋진 꿈이라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인 거고, 그다음으로 좋은 건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앗 얘가 아니었네 하고 자신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최악은 바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현실감이 없도록 별이 많은 하늘 탓인지, 아니면 이런 동화 같은 상황을 믿기엔 동심을 너무 잃어버린 탓인지 그리 심각하게 고민이 되지는 않았다.

‘정 안 되면 나중에 구두라도 부딪히지 뭐.’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는 은구두를 부딪쳐 ‘우리 집이 최고야.’라고 주문을 외워 집으로 돌아갔다.

가람은 방에서 나오느라 구두는커녕 양말만 신은 상태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도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현실감이 없었기에,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기에 가람은 이게 꿈이든 뭐든 빨리 바람을 피할 곳이나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키 작은 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허리를 휘며 달빛에 반사되었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가람이 보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약 100미터쯤 떨어진 장소에 불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게 도깨비불이든 아니면 마법사가 피운 불이든, 가람은 일단 불이라 반가웠다.

어찌 되었건 불을 피웠다는 건 불의 주인이 불을 피울 정도의 지성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어쩌면 그가 자신이 집에 돌아갈 방법을 알지도 몰랐다.

양말만 신은 발로 흙길을 걷기는 그리 쉽지 않았지만, 가람은 발바닥을 찌르는 잔돌을 모두 무시하고 불을 향해 걸었다. 다행히 도깨비불이 아니었다.

모닥불을 지나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 등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지만, 괴물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히 무서운 꿈은 아닌 모양이다.

모닥불과의 거리가 거의 10미터도 남지 않았을 무렵, 가람은 그 등의 정체를 깨달았다.

인간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뾰족한 귀가 솟은 머리통과 엉덩이 아래에서 넘실거리는 꼬리, 그리고 온몸을 화려하게 뒤덮은 검은 줄무늬.

호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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