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3화 (3/256)

3화

가람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멀리서는 잘 몰랐지만, 가까이 가니 무슨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났다.

믿기지는 않지만 호랑이가 고기를 굽고 있었다. 가람은 잠시 갈등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갔다가는 저기서 구워지고 있는 고기가 자신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갈등하고는 있었지만, 가람의 몸은 이미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가람의 오른발이 천천히, 왔을 때와는 달리 신중함으로 무장한 채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람의 그런 결정이 무색하도록, 고기를 굽던 호랑이가 갑자기 뒤를 휙 돌아보았다. 가람이 온 것 정도는 이미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가람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호랑이는 백호였다. 새하얀 백호. 다행히 이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호랑이는 호랑이였다.

가람은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덤벼들 것 같아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호랑이는 꼬리로 자신의 앞쪽을 툭툭 치곤 고개를 돌렸다. 여기 앉으라는 태도다.

어쨌거나, 가람을 구워 먹을 생각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었지만 그 앞에 앉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가람이 망설이고 있자, 호랑이가 다시 자신의 앞을 툭툭 치며 가람을 돌아보았다. 빨리 앉으라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후, 차원도 넘었는데 고기 굽는 호랑이도 있을 수 있지.’

호랑이가 채식주의자였다면 더욱 반가운 일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여기 호랑이도 고기를 먹는 모양이었다. 가람은 비척비척 걸어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앞에 앉고 보니 호랑이는 그냥 볼 때보다 더 컸다. 거의 가람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입도 엄청나게 커서, 가람의 머리통 정도는 한입에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호랑이는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앉아 고기가 익기를 기다릴 뿐 가람에게 이를 드러내거나 하진 않았다.

고기를 굽는 불은 모닥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스 불도 아니었는데, 그저 바닥에서 올라오는 불길에 구워지고 있을 뿐이었다. 설마 이 호랑이가 마법을 쓰는 걸까?

호랑이를 의심스럽게 본 가람은 한편에 깔아 둔 널찍한 나뭇잎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기를 발견했다.

고기는 돼지고기처럼 핏기가 별로 없었고, 그 크기가 모두 균일했다. 겉이 살짝 노릇노릇했는데 호랑이는 그 고기를 앞발로 찢어 불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무슨 고기지?”

설마 사람 고기는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물은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고기나무 열매다.”

가람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호랑이가 말을 했기 때문이다.

“말을 했어!”

가람은 펄쩍 뛸 기세로 놀라 호랑이를 손가락질했다. 호랑이는 가람의 손가락을 지그시 노려보다 대답했다.

“손가락 치워라. 확 물어 버린다.”

가람은 내뱉는 말에 따라 호랑이의 입이 들썩들썩하는 것을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보았다.

곧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갈무리하는 것을 나른한 눈으로 보던 호랑이는 이윽고 다 익은 냄새를 풍기는 고기를 한 덩이 집어 들더니 커다란 나뭇잎을 손바닥만 하게 잘라 그 위에 올린 후 가람에게 내밀었다.

둥그런 호랑이 발바닥으로 잘도 그런 섬세한 작업을 한다 싶어 가람은 어느새 무서움도 잊고 신기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먹어.”

가람이 망설이자 호랑이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그걸 발견한 가람이 재빨리 고기를 받아 들었다. 신기하게 표정이 풍부한 호랑이다 싶은 가람이었다.

호랑이는 가람이 고기를 먹든, 손에 들고 고사를 지내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인지 곧 관심을 거두고 자기 몫의 고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작은 조각을 떼어 내어 불에게 먹였다. 정확히는, 불을 내고 있는 도마뱀에게 먹였다.

“에엑? 이게 뭐야!”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가람이 다시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호랑이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손가락.”

가람은 그 말에 재빨리 손가락을 접어 넣었다. 그리고 고기 아래에 파묻힌 도마뱀을 쳐다보았다.

도마뱀은 호랑이가 입에 넣어 준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가람의 시선에 지지 앉고 맞받아쳤다. 뭘 보냐는 도도한 시선이다.

자신의 등판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데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게 꿈이라면 남의 꿈일 것이다. 가람은 대체 자신의 정신세계 어디에 도마뱀의 등판에 고기를 구워 먹는 호랑이가 있을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거, 안 먹나?”

호랑이의 말에 그제야 가람은 손에 든 고기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입 베어 물었다가 깜짝 놀랐다. 굉장히 맛있었기 때문이다.

소고기도, 닭고기도 아닌 것이 약간 사각하게 씹히더니 곧 쫄깃하게 변하면서 육즙이 확 터져 나와 입 안에서 농후하게 퍼졌다.

육즙도 느끼하거나 비린 맛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소금 간을 한 것처럼 간도 딱 맞았다.

“와, 정말 맛있네요!”

가람의 감탄에 호랑이는 고기를 씹으며 덤덤하게 끄덕거렸다.

그녀가 고깃덩이 하나를 먹어 치우는 동안, 호랑이는 다섯 덩이의 고기를 해치웠다. 한 입에 거의 한 점씩 사라졌다.

그렇게나 빠르게 고기가 해치워짐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불을 뿜는 도마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호랑이가 고기를 주워 먹기 무섭게 새로운 고깃덩이를 도마뱀의 등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도마뱀은 또 머리 위까지 고기를 올린 모습으로 파묻혔다.

한 판의 고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호랑이가 다시 앉아 고기가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기를 씹는 소리가 사라지자 자연히 적막이 감돌았다. 간간이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가람은 그 침묵이 못 견디게 불편했다.

“저기, 호랑이 씨.”

지그시 불을 보고 있던 호랑이가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은 그 얼굴이 처음처럼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원래 동물을 좋아했던지라 친숙함까지 느껴졌다.

처음에야 호랑이라서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놀라 도망가려고 했지만 가만히 보니 그리 포악해 보이지 않는 데다, 배가 부른 맹수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트리거. 호랑이 씨가 아니라 내 이름이다. 그래, 네 이름은 뭐지? 인간 씨.”

“아, 저는 한가람이에요. 가람이라고 불러 주세요.”

“특이한 이름이군. 동양인들은 이름이 다 그런가?”

호랑이, 아니, 트리거의 말에 가람은 깜짝 놀랐다. 사람이, 그것도 동양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여기에도 있단 말인가? 놀라 묻자 트리거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성명을 할 정도로 가까운 동양인은 없지만, 동양인이 있긴 하다. 너처럼 머리가 검고 눈도 검지. 원래는 보기 힘들었는데, 한때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시끄러운 이후로는 제법 보인다.”

트리거는 호랑이치고는 아는 것이 많았다. 그가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기 때문이지만,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가람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가람이 여기에 와서 본 것 중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 빼고는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리거 씨는 왜 여기서 고기를 굽고 계세요?”

“그냥 트리거라고 불러. 트리거 씨는 무슨, 낯간지럽게.”

“네에.”

생각보다 소탈한 호랑이였다. 가람은 트리거의 귀가 쫑긋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곧 도톰한 앞발이 고기를 뒤집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트리거는 앞 발가락의 발톱을 내어 고기를 찍더니 그대로 휙 뒤집었다. 마치 풀빵을 뒤집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바삐 고기를 뒤집은 트리거는 다시 지긋이 앉아 반대편도 다 익기를 기다리며 입을 열었다.

“고기나무 근처를 걷고 있는데 이 불쌍한 불도마뱀이 고기가 먹고 싶어서 헉헉대고 있더군. 안 되었다 싶어서 이놈과 거래를 했지. 불을 빌려주면 고기 먹는 걸 도와주겠다고. 그리고 내가 왜 여기 있느냐는 당연한 것 아닌가? 야수가 야수들판에 살지 어디에 살겠어?”

“야수들판? 뭐, 그렇군요. 그럼 이 불도마뱀과는 처음 보는 사이세요?”

“그렇지 뭐. 그런데 가람은 왜 여기 있나? 인간이 있기엔 그리 좋은 동네가 아닌데?”

가람이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대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호랑이에게 도저히 거짓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말없이 고기를 씹으며 가람의 긴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부모님과 다투고 방 안에 열린 차원의 문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 원래 세계는 이곳과 완전히 다르다는 이야기도 빠짐없이 모두 했다.

트리거는 묵묵히 앉아 고기를 씹으며 가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달이 하나라니, 믿기지 않는 동네로군.”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짜 맞춘 듯 산더미 같은 고기도 다 떨어졌다. 트리거는 그렇게 한마디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람은 당황해서 어슬렁어슬렁 걷는 호랑이의 뒤를 따랐다.

“저기, 그게 다예요?”

“그래. 아마 나한테 돌아갈 방법을 묻고 싶었나 본데, 나는 그런 거 몰라.”

“저 불도마뱀 씨는요?”

“저 녀석은 내버려 두면 떠날 거다.”

트리거가 흘긋 불도마뱀이 있던 곳을 보았다. 가람이 그 시선을 따라가니 이미 불도마뱀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트리거는 혀를 차곤 커다란 활엽수 나무 밑에 멈춰 섰다.

“불도마뱀들은 다 저렇지. 얻을 게 없다 싶으면 재빨리 떠나 버려. 자, 너는 좀 춥겠구나. 가람. 이리 와라.”

트리거가 옆으로 길게 누워 자신의 품을 열었다. 그러나 가람은 망설이기만 할 뿐, 걸음을 떼지 않았다.

결국 잠시 기다리다 왜 그러냐고 물어 온 트리거에게 가람은 조심스럽게 현실적인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기, 아침이 되어서 배고파지면 저 잡아먹는 거 아니에요?”

한껏 눈치를 보는 가람에 트리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당돌한 아가씨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눈치를 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트리거는 한참을 큭큭 웃다가 간신히 웃음기를 가라앉히곤 꼬리로 자신의 옆을 툭툭 쳤다.

“절대 안 잡아먹으니 걱정 마라. 나는 아침에는 식욕이 없는 편이거든.”

“그럼 점심이 되기 전까진 트리거와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한숨을 푹 내쉰 가람의 말에 트리거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가람은 하얀 배를 다 보이며 데굴데굴 웃는 트리거를 보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풋 웃고는 그에게로 다가섰다.

트리거는 가람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두툼한 앞발로 그녀를 덮었다. 가람에 비해 트리거가 워낙 컸기에 앞발 하나로 가람의 등이 거의 다 덮였다.

트리거의 털은 폭신하고 기분이 좋았다. 노린내가 나면 어쩌나 싶었는데 노린내는커녕 바람과 풀 향기가 뒤섞인 알싸한 향이 났다.

게다가 희다 못해 은빛에 가까운 털은 몹시 부드러워서 최고급 이불보다 기분이 좋았다.

가람은 트리거의 가슴에 머리를 부비다가 간지럽다는 핀잔을 듣고 멈췄다.

대신 트리거의 크고 강한 고동을 들었다.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힘 있는 맥박이 마치 강한 생물의 증명처럼 느껴졌다.

“트리거는 심장이 엄청 세게 뛰네요.”

“호랑이니까.”

“털도 엄청 하얘요. 귀도 쫑긋거리고. 앞발 만져 봐도 돼요?”

“그래.”

트리거는 일부러 발톱을 집어넣고 가람이 발을 만지기 좋도록 자세를 고쳤다. 가람이 만져 본 트리거의 앞발은 고양이처럼 말랑말랑하지는 않았지만 크고 도톰했다.

가람이 트리거의 발바닥 젤리와 앞 발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트리거는 이제 자신이 전혀 무섭지 않은지 완전히 경계를 푼 이 재밌는 아가씨를 지켜보았다.

“트리거 같은 백호는 여기 많아요?”

트리거의 거대한 앞발을 두 손으로 꾹 움켜쥐며 가람이 고개를 젖히고 물었다. 트리거는 고개를 저었다.

이 근처의 호랑이는 트리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트리거는 백호가 아니었다.

“나는 백호가 아니다.”

“그럼요?”

“은호다.”

“뭐가 다른데요?”

“털이 은색이지.”

“그냥 흰색처럼 보이는데.”

“때가 타서 그래. 원래 은색이야.”

“때가 타다니. 고양이들은 깨끗한 동물이라고 들었는데, 트리거는 자기 털 핥아서 깨끗이 하지 않나요?”

“난 고양이가 아니다.”

“그래서 지저분한 호랑이?”

“그래, 어디 지저분한 호랑이 냄새 맡아 봐라!”

그렇게 말한 트리거는 가람을 힘주어 안았다. 꽉 안겨 품 안에 갇힌 가람이 숨이 막힌다며 팔다리를 바동대도록 트리거는 품에 가람을 안고 있었다.

결국 트리거는 가람이 ‘향기로운 호랑이님 제발 놓아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것을 듣고서야 가람을 풀어 주었다. 가람은 헥헥대고 웃다가 결국 트리거의 품으로 늘어졌다.

“그런데 가람,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너 손등의 그건 뭐냐?”

트리거의 말에 가람은 자신의 손등을 살폈다. 손등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등의 문양이 빛나고 있었다.

아주 약하게 빛이 나고 있어서 의식하고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지만, 가람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문양은 시계를 여러 개 겹쳐 둔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교차된 원의 정중앙에는 그 원들을 꿰뚫듯 시계 침을 닮은 침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원 중 하나는 문양이 변하고 있었는데, 원은 가느다란 선으로 48등분 되어 있었고 그중 3등분은 옅게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4번째 등분이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이거, 원래 없었는데.”

가람도 그 문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대답하는 가람의 목소리가 점점 늘어졌다. 피곤에 절어 한계에 달한 몸이 강제로 수면에 빠져들고 있었다.

가람은 문신을 보던 자세 그대로 밀려오는 수마에 정신을 잃었다.

트리거는 손등을 바라보다 갑자기 잠에 빠져든 가람을 황당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힘이 빠진 가람이 품에서 흘러 나갈 듯 늘어지자 앞발에 힘을 줘 그녀를 품에 단단히 안았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동양인이야. 왜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나지?”

트리거는 짐승으로서 범상치 않은 급에 이른 자였다. 그의 예민한 기감이 본능적으로 패스파인더의 강력한 영혼에 호감 어린 감각으로 이끌린 것이었지만 그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지나던 바람만이 트리거의 말을 훔쳐 듣고 깜짝 놀라 휘잉 소리 내어 불었다.

* * *

“가람.”

가람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더욱 트리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무언가 따끈따끈하고 기분이 좋아서 사람을 한없이 졸리게 만드는 체온이었다.

트리거는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앞발을 잡아다가 햇살을 가리는 모습에 피식 웃었다.

한껏 몸을 말고 제 털에 얼굴을 박는 것이 귀여워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가람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지금 깨우는 편이 좋았다.

“가람. 아침이다.”

“으― 네에.”

결국 앞발로 흔들어 깨우자 가람은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일어나 앉았을 뿐, 눈을 반도 뜨지 못하는 것이 아직도 정신은 꿈나라인 것이 분명했다.

트리거는 가람의 고개가 앞으로 까딱까딱하는 것을 보다가 결국 고꾸라져 코를 박기 직전에 앞발로 잡아 주었다. 그 바람에 가람의 잠이 확 깬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헉! 트리거?”

“그래. 다행히 날 기억하나 보군. 일어나서 꿈인 줄 알았는데 하면서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면 어쩌나 했는데 말이다.”

트리거의 말에 가람은 나오려던 말을 목 안으로 쑥 집어넣었다. 트리거가 1초만 늦게 말했어도 그 바보 같은 소리를 할 뻔했다.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가람은 눈을 비비며 들판의 잔디가 머금은 이슬이 일제히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아침 이슬 보라고 깨운 건 아닐 테고.

“으, 새벽인 거 같은데 왜 깨웠어요? 나 어제 엄청 늦게 잠들었는데.”

눈을 비벼도 쉽게 졸음기가 가시지 않았기에 가람은 결국 포기하고 앉았다. 트리거는 앞 발바닥을 핥다가 귀를 쫑긋거리며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가람이 그 시선을 따라갔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트리거는 보여서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 소리가 들린다.”

“전 안 들리는데요?”

트리거는 가람에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람은 머쓱해져서 괜히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직 잠이 덜 깨서 툭 흘러나온 말이지 결코 진심은 아니었다.

정말 표정이 풍부한 호랑이라니까. 가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트리거는 사람 소리의 거리를 가늠했다.

남자 둘로 이루어진 조촐한 일행이다. 큰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봐서는 그렇게 험한 인간들은 아닌 걸로 보였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멍한 눈을 한 가람이 트리거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 믿기 힘든 이야기로 짐작하건대 이 아가씨는 곱게 자란 어린 애송이였다.

마음 같아서는 옆에 계속 있으며 돌봐 주고 싶었지만 그건 트리거에게도, 이 아가씨에게도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달이 그리 차지 않아 괜찮지만 만월이 되면 흉포해진 야성으로 저 맛있는 냄새가 나는 아가씨를 살려 둘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봐, 잠 깼으면 내 등에 타.”

“으, 잠깐만요.”

한참 만에 왕건이 눈곱을 떼어 낸 가람이 낮게 엎드린 트리거의 등에 겨우 올라탔다.

그녀가 단단히 무게 중심을 잡은 것을 느낀 트리거는 천천히 다리를 폈다. 거의 말 등에 앉은 만큼 높아진 높이에 가람이 저도 모르게 트리거의 귀를 꽉 잡았다.

“윽, 거기 잡지 마. 차라리 목에 손을 둘러.”

“그러면 목이 졸리잖아요.”

“귀 뽑혀 나가는 건 괜찮고?”

할 말이 없어진 가람이 트리거의 목에 손을 둘렀다. 말 그대로 두른 것뿐이라, 트리거는 재차 가람에게 세게 두르라고 조언했다.

결국 가람이 트리거가 만족할 만큼 목덜미를 강하게 둘러 안고서야 트리거는 땅을 박차고 달렸다.

설마 하던 가람은 그 흔들림에 팔이 하얘지도록 힘을 줬다. 조금만 힘을 빼도 미끄러지거나 튕겨 나갈 것 같았다. 왜 말에 고삐가 있는지 절실히 알 것 같았다.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해. 혀 깨무니까. 내가 좀 있다가 사람 근처에서 내려 주면, 사람을 만나러 가. 아마 나보다는 쓸 만할 거야. 다만 주의 사항은, 나한테 말했듯이 그렇게 너에 대해 솔직히 다 말하면 절대 안 돼. 연고가 없는 동양인은 노예로 팔려 갈지도 모르니까. 어디에 있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말해. 알았지? 응, 이라고 해 알았으면.”

트리거는 가람이 네 하고 대답하다 혀를 깨물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가람은 얼굴을 때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지만 간신히 알아듣고 대답했다.

“으, 응.”

“그래. 잊지 마. 절대로 네가 다른 세계 사람이라거나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잘못하면 마녀로 몰려서 죽임당할지도 모르니까. 혹시나 누가 묻더라도 절대로 아니라고 말해. 알았지?”

“응.”

“그래. 난 널 내려 주고 떠날 거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근처를 맴돌면서 지켜보다가 별일이 없으면 떠날 생각이야.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는 말고.”

“여기 저 말고 다른 이계인이 왔었어요? 트리거는 별로 안 놀라는 거 같, 으겍!”

그렇게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혀를 깨물었구나 싶어 트리거는 달리면서도 혀를 찼다.

그리고 가람이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심하게 물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이계인은 처음 본다. 다른 세계가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은 했지만, 인간만 사는 차원이 있는 줄은 몰랐어. 그러니 인간들에게 네가 다른 차원에서 왔니 뭐니 해도 미친 여자 취급 받을 거다. 철저하게 숨기고 혹시나 캐묻더라도 대충 둘러대.”

트리거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절대로 이계인임을 밝혀서는 안 된다고 가람에게 강조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가람의 입으로 몇 번이나 확인을 받은 후에야 조금 안심했다.

이상하게 이 맛있는 냄새가 나는 동양인에게는 자꾸 마음이 쓰였다.

“알았어요. 내 정체는 숨기고, 돌아갈 정보를 얻는다. 맞죠?”

“그래. 그럼 다시 달린다.”

“잠깐만요, 트리거!”

“음?”

“저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네가 원래 세계로 성공적으로 돌아간다면 볼 수 없지 않을까?”

대답한 트리거는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렸다. 냄새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가람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윽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이상 멀어지면 힘들어진다.

트리거는 들판을 질주해 바람처럼 달렸다. 바위 몇 개는 그냥 훌쩍훌쩍 뛰어넘었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가람은 입을 뗄 생각도 못 하고 있는 힘을 다해 트리거에게 매달려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바람이 너무 매섭게 부딪쳐서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이 시렸기 때문이다.

“자, 다 왔다. 너무 가까이는 못 가. 날 보면 안 되니까. 여기서 좀 기다리면 사람 둘이 올 거다. 난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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